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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공적인 순례를 위하여 (시 143:8, 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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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순례를 위하여 (시 143:8, 히 11:13-16)

오늘 저는 설교 메목을 성공적인 순례를 위하여라고 정했습니다. 순례, 혹은 순례하는 사람을 순례자라고 부릅니다. 순례자라는 말을 국어사전으로 찾아보면 종교적인 목적으로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을 순례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좀더 넓은 의미로 저 영원한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고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순례자라고 지칭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릴때부터 귀에 익숙하고 많이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작자가 누군지는 알지 못하지만 순례자의 노래라는 그런 악보가 있습니다. 가사를 소개해보면 저 멀리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 밤을 세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 아득한 나의 갈 길 다간후 저 동산에서 편히쉴때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빈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곤할지라도 오 내주 예수 날 사랑하사 날 지켜 주시리. 어릴때부터 많이 불러오던 복음성가 청교도들이 불렀던 곡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순례자라는 표현은 직접적으로 성경에 표현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편 84편을 가리켜서 순례자의 시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명절이 되면 우리가 고향을 찾듯이 그들은 태어난 고향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옵니다. 바로 예루살렘 성전은 그들의 마음의 고향이였습니다. 적어도 유대의 남자라면 일년에 세차례씩 그 많은 험난한 길을 지나서 때로는 일주일에서 한달의 시간이 걸려서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러 옵니다. 

시편 84편의 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만군의 주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사모하는 심정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악인의 장막에서 천날을 거하는것보다 주의 궁정에서 하루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례자들의 고백인것입니다. 

순례자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나그네, 외국인, 거류자라는 표현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사람들이나 오늘 우리들이 육신의 고향을 찾는 마음이나 영원한 하늘의 도성, 하늘의 고향을 찾는 순례의 길과 동일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어떤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는 그래서 한곳에 머물수 없는 사람들을 나그네라고 순례자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앞서갔던 믿음의 조상들도 자신을 가리켜서 나그네라고 주로 표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23장 4절에 나는 당신들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자니 자기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헷사람들에게 막벨라라는 동굴을 사기 위해서 그들에게 이야기할 때 나그네라고 이야기 합니다. 

창세기 47장 6절에 보면 야곱이 요셉을 따라서 애굽의 바로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나이가 130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조상들의 나그네 세월에 비하면 아주 짧고 험악한세월을 살아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야곱만이 아닙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에 이기고 아름다운 궁정을 짓고 거기 거했던 다윗도 자신을 나그네라고 표현합니다. 

역대상 29장 15절에 보니까 우리는 우리조상들과 같은 주님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 옛날성경에는 머무름이 없나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이, 다윗이, 나그네라면 오늘 우리도 틀림없이 나그네인 것입니다. 이땅을 살아가는 나그네로서 그리고 저 하늘의 도성을 향한 순례의 길에서 우리가 진정 성공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물론 순례길이 성공이라는 말과 잘 어울리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이땅에 보내신 이곳에서부터 영원한 하늘의 저 목표를 향해서 순탄한 여정을 계속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적인 순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성공적인 순례의 조건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는 궁극적인 본향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노래에도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오 거룩한 곳 아버지집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서 많은 유대인들이 그 성전탑을 향해 달려왔듯이 오늘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모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것을 이렇게 물어보면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가. 이 땅에 재물을 쌓고 집을 짓고 내 영력을 높이는 일에 내 인생의 목적을 걸고 있느냐 그것이 나의 관심이냐 아니면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 본향에 우리 하나님나라 천국창고에 내 상급을 쌓는것이 내 관심이냐 하고 물어보면 됩니다. 그래서 물질이 있는 곳에 내 마음도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땅에 물질을 쌓는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교적인 일이나 구제하는 일이나 아름다운 선행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내 물질을 쌓고 있느냐 이것을 물어보면 여러분의 관심이 이땅에 있는지 저 하늘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집이 두채라고 자랑하는 분들, 땅값이 올랐다고 좋아하는 분들, 이런 분들은 틀림없이 땅에 관심있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위해서 내가 하나님앞에설 그날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는 하늘에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모라는 말은 열렬히 갈망하는, 마치 사랑하는 애인들이, 부부가 서로를 그리워하고 바라보는 그런 마음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갔습니다.  

13절 14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사라와같은 믿음의 조상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신 약속을 다 얻지를 못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이 부르셔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가나안땅에 잠시 거주했지만 그것을 영원히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네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번성케할것이라 그러나 아브라함당대에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그 약속이 이루어져 가고 있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바라본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영원한 하늘 도성을 바라봤습니다. 

그래서 오늘 14절에 본향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고향과 다른 또 다른 도성을 그는 바라봤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0절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고 하나님이 지으시는 그 아름다운 천국도성을 아브라함은 바라보며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그가 바라본 본향은 그가 나온 갈대아 우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천국의 도성을 바라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15절 16절입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5절 16절 보면 두가지 본향이 나옵니다. 앞에 15절은 나온 바 본향을 행각했다 그들의 육신의 고향입니다. 갈대아 우르. 여러분들도 고향이 있으실 것입니다. 제 고향은 유명한 곳입니다. 강원도 평창입니다. 뉴스를 타고 뜨는 동네입니다. 감자많은 감자바위동네 평창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나온 본향이 바로 갈대아 우르 메소포타미아입니다. 

그런데 이는 그 고향으로 돌아가려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바라본 것이 무엇입니까?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그것은 바로 더 나은 하늘의 도성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 개의 고향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향이 있고 영적인 고향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향은 이번 명절에 여러분이 가려고 하는 곳이 육체적인 고향입니다. 태어나고 자란곳, 그러나 우리는 육체의 고향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것만큼 영원한 하늘의 본향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니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주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나라 시민 대한민국시민인 동시에 우리는 천국시민입니다. 이걸 잊으시면 안됩니다. 

골로새서 3장 2절에 보니까 여러분은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의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땅의 것만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만 생각하라고. 그러면 기독교인의  삶이 너무 내세적이고 너무피안 지향적이 아니냐 이런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천국만 바라보다가 이 땅에서 행동하지 아니하고 구체적으로 선을 베풀지 않으니까 세상에서 비판받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건 일리가 있긴하지만 꼭 맞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선배들의 삶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이웃사랑을 구체적으로 실현했습니다. 동시에 주님나라에 모든 소망을 걸고 살아갔습니다. 그러기에 이 땅에서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원수까지도 그것만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가진 물질을 아낌없이 이웃에게 베풀수가 있었습니다. 왜? 자기 소망은 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땅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임을 알기 때문에 공수레공수거라고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디에 가도 항상 보석업, 보석이라는 것은 물량은 작지만 비싼겁니다. 그들이 어디 이사갈때는 보석을 얼른챙겨서 가려고, 그러나 정미소를 했다면 쌀가마를 어떻게 이고갑니까 못갑니다. 또 그들은 채소업을 합니다. 채소라는 것은 하루지나면 팔수가 없습니다. 썩어서 버려야 합니다. 미련없이 버리고 갈 수 있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미련이 남아있다면 안 좋은 겁니다. 순례자는 이 땅에 미련을 가지면 안됩니다. 

유명한 존번연이라는 목사님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분입니다. 목사안수를 받았지만 영국에서 그는 설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가서 12년동안 생활하면서 그는 유명한 천로역정이란 책을 썼습니다. 한 크리스챤이 영원한 하늘 도성을 가기 위해서 그 먼길을 가는데 험난함도 있고 기쁨도 있지만 많은 유혹과 시련도 있습니다. 그는 그 유혹과 시련을 다 이겨내고 결국 천국의 도성에 도착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입니다. 

어찌보면 우리의 삶은 천국을 가는 청교도의 순례자의 길과 같다는 것입니다. 존번연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병에 걸려서 그는 숨을 거두게 되었지만 사람들에게 저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제가 주님품에 안길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며 손을 벌리고 주님 제가 이제 주의 집에 왔나이다 그렇게 고백을 하고 숨을 거둡니다. 

시편 23편도 다윗의 시입니다. 그는 우리가 순례자의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의 일생의 일대기를 시편 23편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마지막 고백이 무엇입니까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땅의 집이 아닙니다. 하늘의 집에, 하나님의 품에 영원히 거한다는 고백입니다. 저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는 주의 백성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성공적인 순례를 위해서는 우리는 복음의 노래를 불러야 됩니다. 순례자란 노래부르는 사람입니다. 노래를 불러야 즐겁고 흥겨우니까 그런데 우리가 불러야 되는 노래가 어떤 노래입니까 복음의 노래입니다. 그냥 아무일 없이 침묵하며 걸어가는게 순례자가 아닙니다. 천국을 향한 순례자는 복음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마가복음 16장에 너희는 온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또 때로 두르다니며 온 백성에게 복음을 전파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순례자의 삶입니다. 우리가 신길동 태어나서 신길동에서 숨을 거두는 한이 있더라도 어찌보면 우리의 삶은 영원을 위해 나아가는 순례자의 삶과 같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예루살렘에 교회에 핍박이 임했을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곳저곳으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빌립과 무리들은 사마리아 도성으로 내려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그 성이 완전히 뒤바껴 집니다. 순례자들이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례자의 노래입니다. 노래가 있다면 우리삶이 좀더 즐겁지 않겠습니까. 날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순례의 길에서도 늘 복음의 노래를 부르고 하나님의 본향을 노래하는 저와 여러분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본향을 알지못하는 육신의 고향만 아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고향을 알려주는 것이 전도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죽으면 끝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앞에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볼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실현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지만 동시에 궁극적으로 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백성들이다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세 번째로 성공적인 순례를 위해서는 하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의 음성을 듣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녀에게 매일 부정적인 이야기와 비관적인 이야기를 했다면 그 일생은 비참한 삶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부모로부터 늘 긍정적인 소리를 듣는다면 그는 믿음의 사람으로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제가 설교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TV를 켰더니 공감인터뷰라는 것이 YTN에서 나왔습니다. 신달자라는 시인이 나와서 잠시 봤습니다. 짧은 시간이였지만 그분의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자기는 거창 출신인데 결혼을 하고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져서 23년 동안 병간호를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중환자실이 얼마나 비싼는지 산소호흡기를 꽂고 있으면 하루에 백만원씩이였다고 합니다. 그걸 감당하기 위해서 집에 있는 것을 다 팔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시어머니가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남편 수발들고, 시어머니 수발들고 그러다가 자기도 지쳐서 쓰러졌는데 암이였습니다. 자기도 암수술까지 받았습니다. 이러다가는 이 집안이 완전히 망하겠더랍니다. 자기가 가진 것은 대학 졸업장 밖에 없는데 내가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대학원에 진학하고 문학을 전공하고 대학교수가 됩니다.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그리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됩니다. 그러면서 가정이 생활에도 안정을 찾게 됩니다. 

그가 어려운 가운데 낙심치 않고 갈 수 있었던 것은 한가지 이유랍니다. 자기 어머니가 자신에게 굉장히 기대가 컸다고 합니다. 자기가 어렸을 때 거창시골이였지만 그 시대에 벌써 무용학원을 보내고 장고배우는 곳에 보낼정도로 그렇게 자기에게 투자했다는 것입니다. 달자야 니는 뭘해도 잘될끼다. 늘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그 말입니다. 너는 뭘해도 잘될거야. 그는 그 말에 용기를 얻고 긍정의 힘을 가지고 일어섰을 때 그는 오늘의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갔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너는 잘될거라고 이런 격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힘든일을 당했어도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크리스챤들이 순례의 길을 가는데 늘 좋은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론 질병을 만나기도 하고 불황을 만나기도 하고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고 가족의 사별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 늘 격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소망과 위로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시편 143편 8절입니다.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로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이것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날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아침에 나로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그는 아침마다 하나님을 묵상했고 하나님앞에 나와 기도했습니다. 요즘 말로하면 새벽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갔습니다. 그 말씀이 그의 길을 인도해 갔습니다. 내가 다닐길을 알게하소서. 다윗의 인생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힘을 얻는 삶이였다면 오늘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가 모진매를 맞고 감옥에 갖혔을 때 성령님은 찾아오셔서 사도바울아 너는 여기서 죽지 않을거야 너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될 것이고 너는 결국 예루살렘을 거쳐서 로마까지 갈거야. 늘 그에게 희망의 말씀을 속삭여 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지치지 않았습니다.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 아침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뭘 좀 요청했다 그러면 정상적인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그러면 저 사람 정신분열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도란 대화입니다. 대화란 무엇입니까 내가 말하고 상대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기도가 대화라는 말은 우리가 아뢸것은 주님께 아뢰지만 동시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것이 기도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새벽에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우리가 날마다 아침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신바람나겠습니까. 어떤 어려움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해 주신다면 우린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피터마샬 이라는 미국 상원 원목을 지낸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영국에서 군목생활을 할 때 아침마다 말씀을 묵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귀 있는자는 들을지어다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게 무슨뜻인가. 그리고 하루를 사는데 그가 어떤 일이 있어서 어떤 황무지를 걸어가게 되었답니다. 불도없는 깜깜한 곳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채석장이였습니다. 그때 그의 귀에 피터, 피터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누구십니까. 사람의 소리인지 하나님의 소리인지 몰라서 누구십니까 했더니 다른말이 없습니다.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다가 돌에 걸려 넘어졌답니다. 그리고 앞을 더듬어 봤더니 그곳은 채석장 끝 절벽이였습니다. 벼랑끝, 자기가 벼랑 끝에 넘어져 있는 것입니다. 깜짝놀랐습니다. 내가 한걸음만 더 나갔다면 나는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을 터인데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셨습니다. 피터야, 피터야, 그는 그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날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생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앞에 나와서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주님앞에 나와서 새벽을 깨우며 주의 음성을 듣는것은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기도에 달려있습니다. 순례자는 하늘의 음성을 들어야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공적인 순례를 위해서는 절제해야 합니다. 순례자는 너무 무거운 짐을 들면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순례자는 이 땅에 미련을 둬서는 안됩니다. 요한일서 2장에 보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천국을 향해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것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몇일전에 신문을 보니까 유명한 명품가방이 있는데 거기 예약이 밀렸는데 몇 개나 밀렸느냐 천개가 밀렸다고 합니다. 그 가격은 족히 칠, 팔백만원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천개나 밀려 있습니다. 수공업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물량을 만들려면 2년쯤 걸린다고 합니다. 그 명품가방을 멘다고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런걸 보면 그런생각이 듭니다. 얼마나 사람이 못났으면 가방을 가지고 자랑하려고 그럴까. 얼마나 사람이 못났으면 옷자랑이나 하려고 그럴까.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자랑할것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것 자랑할 것없습니다. 그것들 시간이 지나면 다 거품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욕심내어서도 안됩니다. 너무 무거운짐에 얽매여도 안됩니다.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것과 얽매이기 쉬운죄를 벗어버리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무 세상에 큰 기대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해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환영받지만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오히려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간편하게 살아야 합니다. 너무 크게 벌리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떠나야 될 존재임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투자하기보다는 하늘에 투자하십시오. 마태복음 6장에 보니까 너희를 위해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저는 요즘 천국을 묵상하면 너무나 좋은 것 같습니다. 제가 몇주전에 3분이라는 책을 여러분에게 소개했습니다. 30권이 순식간에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그 이익은 제가 얻는게 아니라 이 책을 읽고 여러분이 도움을 받으라고 소개한 것입니다. 

토드부프라는 목사님이 지은책인데 그 목사님의 아들 콜튼이라는 아이가 4살 때 어려운 수술을 받다가 3분동안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천국을 다녀왔습니다. 그가 본 천국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는데 너무너무 그 천국이 놀라워서 아버지가 기록하다보니까 이 책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콜튼이 하루는 엄마에게 엄마 나에게 누나가 2명있는거 맞지? 미쳤니 너에게는 캐시라는 누나밖에 없는거야 남매잖아 너에게 누나가 어디있어. 아니야 엄마 누나가 2명있어요 내가 천국에 있을 때 봤어요 엄마 뱃속에 죽은 아기가 있었잖아요 아니에요? 하고 묻는데 엄마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딸을 낳고 콜튼을 낳기 전에 한 아이를 임신했었는데 건강이 안좋아서 자연유산되고 말았습니다. 엄마의 마음속에 큰 상처로 남아있는데 이 어린 콜튼이 그걸 알고 있습니다. 아니 네가 누나를 어디서 봤니? 천국에서 봤어요. 누나가 어떻게 생겼니? 누나는 엄마처럼 생겼는데 키는 좀 작고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였어요. 그럼 누나의 이름은 아니? 아니요 누나의 이름은 없어요. 왜? 엄마, 아빠가 누나의 이름을 지어주시지 않으셨으니까요. 태어나지 않았으니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이럴수가 있을까. 더 심각한 이야기는 콜튼이 태어나기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천국에서 할아버지를 봤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네가 태어났는데 천국에서 봤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젊을때 사진을 보여줬더니 맞다는 것입니다. 노인때 사진을 보여줬더니 모르겠다는 겁니다. 젊을 때 할아버지 사진을 보여줬더니 맞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다 젊게 사는구나. 천국에 가면 우리는 최고의 멋진 모습으로 살아갈 줄 믿습니다. 저는 그 천국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놀랍고 신비한 것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디트리본훼퍼 유명한 독일의 고백교회 목사님은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그 운동에 동참했다가 그는 감옥에 갇히고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 사형을 당하는 아침에 감옥을 걸어나가는데 같이 있던 동료들이 정이들었으니까 본훼퍼가 마지막보는구나 하면서 아쉬워했습니다. 

그때 본훼퍼는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여러분 이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동지들이여 내일아침 더 좋은 고향에서 꼭 만납시다. 그는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천국에서 만나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 정의를 위해 살아간 위대한 신학자였지만 동시에 영원한 천국의 하나님의 품을 바라보았던 본향을 사모했던 위대한 목사님이기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고향을 생각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영원한 고향,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 도성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순례의 길을 계속가는 저와 여러분의 발걸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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