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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께서 용서하신 것 같이 (골 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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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용서하신 것 같이 (골 3:12-15)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골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의 가장 유명한 명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바로 직전 다른 화가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너무나 교만하여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본노의 폭풍 속에서 서로 헤어졌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리에 앉았으나 레오나르도는 여전히 너무나 화가 나서 복수를 계획하기 시작했으며 곧바로 완전한 계책을 꾸며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팔았던 악명높은 배신자인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 화가의 얼굴로 그렸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힌 레오나르도는 미친 사람처럼 신속하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뛰어난 기억력은 자기 원수의 얼굴의 세세한 부분까지 다 생각해냈고 그는 그것을 유다의 얼굴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자  그리스도의 형상에 대한 영감이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좌절감에 사로잡혀 붓을 던졌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다른 화가의 얼굴을 유다의 얼굴로 그린 자신의 복수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갈등을 하던 레오나르도는 결국 진심으로 회개를 한 후 미워하던 친구의 얼굴을 화폭에서 지우고 나자 다시 영감이 떠올라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릴 수 있게 되었고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을 완성시킬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용서하는 마음을 품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자신의 마음에, 그리고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릴 수 없습니다. 용서없이는 자신의 인생을 명작 인생으로 완성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진심으로 용서하지 못함으로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음으로 직장에서 불화를 종식시키지 못하고 계속 잡음을 일으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음으로 교회생활에서 은혜의 통로가 막히고 기도의 문, 전도의 문이 막힌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지음받은 자로 항상 발견되기 위해서는 우리안에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하고 삶 속에서 주님처럼 남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삶속에서 실제 용서가 풍성한 사람으로 발견될 수 있습니까?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미움과 악한 감정을 몰아내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채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달을 때 용서의 능력이 임합니다.(12)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12절에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기본적인 성품이 거룩인 것처럼 우리도 이제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살 때 자연스럽게 용서하는 삶이 나타납니다. 
  
아마도 골로새성도들은 자신들이 죄를 용서하지 않고 차갑게 율법주의적인 태도로 심판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선생님은 진정한 거룩은 이와는 달리 용서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이 용서에 인색한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지 않은 사람입니다. 
  
1) 하나님의 거룩은 긍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보면서 '목자없는 양과 같다'고 하시며 측은하게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문둥병자들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시고 만져주시며 치료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다면 그들의 잘못한 것에 주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그가 겪고 있는 고통에 마음을 쓰며 안타까와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를 통해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용서를 하려면 먼저 인자하게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엄하게 심판하시기에 앞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눈으로 보시며 용서하심처럼 우리도 서로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가족을 향해 불쌍하게 여기며 손을 꼭 잡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체간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가간 적이 언제입니까?  허물이 크게 보일 때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거룩함은 겸손함으로 표현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겸손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 빌 2:5절 이하에서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용서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포기하고 이 땅에 내려오시고 마굿간에 태어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시고 멸시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겸손하셨습니다.  하늘보좌를 자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고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향해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나의 입장에서 그를 판단하려는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그의 형편과 그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겸손은 나의 위치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서 바라보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거룩함은 온유함으로 표현됩니다. '온유'라는 헬라어의 뜻은 다른 사람의 모독을 은혜롭게 견디는 능력이라는 의미입니다.   친절이 다른 사람들이 모독해도 그를 선대하는 능력이라면 온유는 다른 사람들의 모독을 너무나도 은혜롭게 인내할 뿐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분노조차 있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더라'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세의 누이와 형인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여 큰 손상을 입혔습니다.  모세가 흑인인 구스 여자와 결혼하였다고 못마땅하게 여기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의 영적 지도자인 모세의 권위를 손상시킨 벌로 하나님께서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걸리게 하였습니다.  그녀에게 몹시 시달린 모세가 '그것봐라 고소하다. 지도자에게 도전하다가 얻어맞을줄 알았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모세는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 미리암을 고쳐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온유함은 우리로 무릎을 꿇고 우리를 모독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우리의 크고 많은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거룩한 사람이 되면 우리도 용서에 능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더 많은 이들과 원만하게 잘 지낼 수 있습니다.  미숙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모두 더욱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사람들을 쉽게 용서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우리가 용서의 원리를 깨달을 때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먼저 우리에게 행한 다른 사람의 과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범한 과실에 비하면 매우 작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불평이나 불만은 골로새교회의 교인들을 분열시키는 요소였습니다.  중요하지 않고, 어리석고, 사소한 문제들이 골로새교인들에게 불평의 빌미를 가져다 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계속 불평을 하게되고 불평이 그들을 분열시키자 그들의 행동은 유치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원망과 다툼과 대적하는 일들이 나타나고 그것은 교회의 연합을 깨트렸습니다.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식어지고 영적 전쟁을 위해 힘을 기르는 일도 소홀해졌습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게 행한 제일 큰 죄악이나 잘못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께 지은 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은혜를 거부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죄값이 얼마나 엄청난지 실감하려면 죄없으신 예수님이 여러분을 대신하여 당하신 죄의 형벌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상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수모와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고, 채찍에 수없이 맞아 살이 터지고, 십자가에 못박힌채 달려 신음하며 지옥을 경험하며 고통스럽게 죽어가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죄가 있어서가 아니고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범한 죄는 보통 큰 것이 아닙니다.  그에 비교한다면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행한 죄악이나 잘못은 아주 사소한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우리 힘으로 갚을 길이 없고 모든 것을 그 빚 때문에 잃어버릴 운명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임금님의 은혜로 엄청난 빚을 모두 탕감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금새 잊고는 그가 친구에게 빌려 준 사소한 액수인 백 데나리온을 빨리 갚으라고  감옥에 넣어 버렸습니다.  자신이 받은 용서를 잊고 은혜를 베풀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 탕감받은 빚을 잊고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큰 용서를 받았는데 작은 용서에 인색합니다.  크고 많은 죄가 모두 덮어졌는데 작은 죄를 들추어 남을 정죄하기를 잘 합니다.  
  
성경은 '주께서 너희를 용서한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명령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을 마음에 새기고 똑같이 용서해야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용서의 은혜를 바라보며 마음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셨던 용서와 동일한 태도로  용서해야 합니다. 골2:13-14에 보면 의문에 쓴 증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은 부채증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범한 죄의 목록입니다. 그런데 도말하시고 하였습니다.  지원버렸다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누군가 빚을 갚으면 부채의 기록을 지울 때 헬라어 알파벳중 대문자 카이(X)로 표시하였습니다. 그러면 부채기록을 지운 후에도 빚을 졌던 흔적이 여전히 문자로 남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습니다. "아 아무개가 과거에 이렇게 큰 빚을 진 적이 있었구나!"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X 표시를 하신 것이 아니라 흔적이 남지 않도록 완전히 잉크까지 지우셨습니다. 우리는 용서할 때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행한 악의 기억을 지워야 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명단을 남기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의 이름이나 죄의 종류, 죄의 경중, 죄의 횟수 모두를 지워버립니다. 과실을 들춰내지 않으며 다시 거론하지도 않습니다. 

1986년 11월 25일 47세의 남침례교 선교사인 리비 센터와 그녀의 10살된 딸 레이첼은 라이베리아의 예케파에 있는 집에서 저녁놀을 바라기도 하며 애완동물 가정용 도마뱀에게 줄 먹이로 곤충을 잡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벤자민 모리스가 선교사 조지 센터의 집에 들어섰을 때 센터부인이나 그녀의 딸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여러차례 센터 선교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벤자민은  그날 아침도 생계를 위해 별 필요없는 잡다한 일들을 센터의 집에서 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벤자민이 센터선교사의 집문을 두드렸을 때 남편 조지는 나가고 없었지만 센터부인은 그를 집안으로 들였습니다.  그런데 신뢰하였던 벤자민은 그 밤에 돌변하여 레이첼을 구타하고 강간했으며 칼을 빼어 레이첼과 그녀의 어머니를 살해했습니다.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조지는 방송을 통해 소름끼치는 소식을 듣고서는 차를 몰아 급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리스는 자살하기 위해 막힌 싱크대를 뚫을 때 쓰는 화학약품을 한 병이나 마시고 실신해 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500명이 넘는 군중이 모리스를 죽이겟다고 교도소 담장에 장사진을 쳤습니다. 조지 선교사는 경찰서로 걸어가면서 벤자민을 만나기 위해서는 자기의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찾아 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리스의 맞은 편에 앉은 조지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레이첼이 잠자리에 들면서 해줬던 포옹과 따스한 웃음이 폭풍처럼 조지의 마음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또한 아내가 부드럽게 만져주고 달콤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추억을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잔혹한 살인장면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살인자의 입과 턱에 화학약품의 독성때문에 입은 화상자국을 보았을 때 조지는 그 독성이 더욱 강하여 벤자민이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갔으면 하고 바라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그때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조지 센터 자신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조지는 벤자민의 눈을 쳐다보면서 손을 그의 어깨에 올려 놓고 말했습니다.  "벤자민, 자네가 하나님께서 자네를 용서하시도록 허락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네를 용서하길 원하신다네.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나도 자네를 용서하네."
   
조지 센터가 살인자를 용서했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온 국민은 살인사건 그 자체보다 그의 용서에 더욱 놀랐습니다. 온 나라 전체에 수년동안 쌓였던 원한들이 용서되고 잊혀졌습니다.  깨어진 교회들이 다시 새로운 일치와 조화로 채워졌습니다.  님바 카운티에 있는 한 교회는 서로 분리되었는데 다시 합쳐졌습니다.  

한 아프리카 여인은 그녀의 원수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햇습니다. "조지는 자기 가족 전부를 죽인 사람을 용서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분명히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의 차이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수십 년동안 서로 철천지 원수였던 사람들이 서로 끌어 안았습니다.  자기 형제요, 믿음직한 친구로 생각했던 사람의 극단적인 배신을 용서한 한 그리스도인의 심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려고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자 라이베리아 전역에 걸쳐 선포되었던 복음에서 새로운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라이베리아 국민들은 주님을 생생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진심으로 용서하려고 몸부림칠 때 그의 얼굴을 통해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처럼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 땅에 나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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