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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그는 삶 (엡 4: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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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그는 삶 (엡 4:13-15)

가난한 시골 총각이 도시에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서 공부하던 중 예쁜 도시 처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녀는 부잣집 딸로서 고생이라곤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처녀는 총각의 늠름한 모습에 반했습니다. 그러나 총각은 처녀에게 관심을 가질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주경야독하면서 공부에만 매진했습니다. 처녀는 총각이 무관심할수록 더 총각이 좋았습니다. 매달리는 처녀에게 총각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 집은 시골의 가난한 집입니다. 아마 매우 힘들 겁니다.> 그래도 처녀는 막무가내로 총각을 좋아했고, 결국 집안 어른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시집을 가보니 만만한 게 아닙니다. 당장 추석 명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남편을 따라 시부모님이 사는 시골집을 찾아갔습니다. 부모님은 귀한 며느리 온다고 맛난 음식을 준비하고 맞아줍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지만, 며느리가 되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부엌에 나가 거듭니다. 그 때부터 문제의 연속입니다. 푹 꺼진 부엌에, 높은 문지방을 넘나드는 것도 쉽지 않고, 물도 마당에 나가 우물에서 길어야 하고 하나도 쉬운 게 없습니다. 자신이 살던 환경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너무 힘들어 <이게 현실이로구나> 생각이 듭니다. 

그 때 남편이 와서 <그래, 우리 가족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좀 알겠어? 물은 내가 길어올 테니 가만히 있어.>라고 말하고는 우물물을 긷습니다. 바라보니 남편은 모든 게 익숙합니다. 물도 잘 긷고, 싸리비로 마당도 잘 쓸고, 아궁이에 불도 잘 땝니다. 어려서 내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남편은 모든 게 익숙합니다. 그런 남편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아 남편은 역시 이 집 사람이구나. 난 아직 외인이구나......> 그녀는 아직 그 집 식구가 덜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힘들 때 만약 주변에서 <넌 뭘 하고 있니. 아니 그것도 제대로 못하니?>라고 말한다면 그 때는 정말 죽을 맛일 것입니다. 이 때 며느리는 몇 가지 길을 택할 수 있겠지요. 

하나는 <내가 잘못 생각했어. 결혼은 이렇게 간단한 게 아님을 몰랐어. 내 실수야. 도저히 이 남자와 못 살겠어. 지금이라도 갈라서야겠어....> 결혼이 깨지는 것이죠. 

또 하나는 한 시간이라도 빨리 남편을 끌고 자신들의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부모님 계신 시골집 이야기는 가급적 꺼내지 않습니다. 그냥 자신들만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면 내내 불편합니다. 남편이 어쩌다 시골 부모님 이야기만 꺼내면 분위기가 썰렁해집니다. 남편과의 사이에 늘 거리감이 있고, 불편합니다. 평생 괴롭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마지막 선택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남편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보, 난 당신이 알다시피 힘든 일은 해 보지 않았고, 더구나 시골에 살아보지 않아서 시골집 일은 영 서툴러요. 이번 명절에는 시부모님 보시기에 너무 죄송한 게 많았어요. 그렇지만 걱정 말아요. 저도 노력할게요. 다음엔 저도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여러분, 여인이 사랑받고 사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연히 마지막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남편은 감격해서 아내의 두 손을 꼭 붙들고 고마워할 것입니다. <당신, 정말 좋은 여자야. 오늘처럼 내 마음이 푸근한 적이 없었어...>라고 할 것입니다. 남편도 아내를 기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면 며느리도 점차 익숙해질 것입니다. 아기를 두어 명 낳은 후로는 시골집에 가도 이젠 어색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자기 집이었던 것처럼 모든 게 익숙합니다. 척 하니 마루에 아이를 내려놓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일을 거듭니다. 우물물도 잘 긷고, 아궁이에 불도 제법 잘 땝니다. 이젠 모든 게 익숙해졌습니다. 

일에만 익숙해진 게 아닙니다. 시댁의 모든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시부모님의 식성에도 익숙해지고, 시부모님의 성품에도 익숙해집니다. 시골 마을의 친척들도 익숙해졌습니다. 이젠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먼저 반갑게 인사하고 너스레를 떱니다. 이젠 완전히 그 집 식구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더 흘러 아이들이 시집 장가갈 때가 되면 오히려 시댁이 자기 집처럼 익숙합니다. 오랜만에 가는 친정이 오히려 더 어색합니다. 친정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이젠 친정엘 가도 옛날 같지 않습니다. 그 후로 그 여인이 중년을 넘기고 노년기를 거쳐 긴 세월의 마감할 곳도 친정이 아니라, 자기 집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평안을 원합니다. 그런데 평안은 어디서 느낄 수 있을까요? 평안은 익숙한 곳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낯선 곳이라면 불편합니다. 오래 있기 힘듭니다. 

외국 여행을 길게 하고 돌아올 때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외국에 가서 좋은 구경 많이 했습니다. 특별한 음식도 먹어 보았습니다. 좋은 호텔에서 잠도 잤습니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도 구경했습니다. 그러나 공항에 딱 내려서 왁자지껄한 한국말을 듣는 순간처럼 편안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말은 정말 대단합니다. 이젠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나라로 부상하게 되다보니, 많은 나라에서 일본어 대신 한국어를 배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어가 어렵다는 겁니다. 노랗다는 말도 한 가지가 아닙니다. <누렇다, 노르끼리하다. 노릇하다, 느르무레하다, 노르께하다, 노르스름하다.....> 특히 우리나라에 시집온 분들이 한국어 배우는 데 정말 힘이 든다고 합니다. 그러니 저나 여러분이나 대단한 사람들이지요. 그 어려운 한국말을 좔좔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대신 우리는 영어를 못하지만요...... 
어쨌든 공항에 내려 한국말을 듣는 순간 <아, 여기 내 나라에 왔구나...> 안도감이 밀려옵니다. 집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아랫목에 몸을 누이면 그 때야말로 최고급 호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아늑함이 찾아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익숙한 곳에 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 하나가 제기됩니다. 그것은 <익숙하기만 하면 다 좋은가> 하는 것입니다. 익숙하면 다 좋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무엇에 익숙한가> 하는 것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캐나다의 케이프 브레톤 섬에 큰 탄광이 있다고 합니다. 이 탄광은 바다 밑으로 수 킬로나 뻗어있는 엄청난 탄광입니다.  예전에 탄광에서는 작업을 위해서 말들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들을 일단 탄광에 데리고 들어가서 일을 시키면 다시는 탄광 밖으로 끌고 나오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말들은 탄광의 어둠에 익숙해져서 밖으로 나오는 순간 눈을 못 보는 소경이 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 탄 광속으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되는 말은 그 말이 늙거나 병들어서 일을 못 할 때까지 계속 바다 밑 어두운 땅속에서 일을 하고 살다가 거기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말들은 어둠에 익숙해지다 보니 빛 아래 나오면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익숙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좋은 것에 익숙하면 행복해지지만 나쁜 것에 익숙하면 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익숙해져야 할까요? 무엇보다 성도는 주님께 익숙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시집을 간 처녀와 같습니다. 처음엔 모든 것이 서툴지만 점차 주님께 익숙해져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주님께 익숙해지는 것을 가리켜 <자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5절 끝을 보면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했습니다. 모든 일에 주님처럼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1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충만한 모습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 나무도 잘 하시고, 우물물도 잘 긷고, 아궁이에 불도 잘 때는 신랑이라면, 신부인 우리도 주님처럼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께 익숙한 사람입니다. 익숙하니까 편안합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 마음도 편하고, 모든 게 다 편합니다. 이것은 평생을 함께 산 부부가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난 주님 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주님께 익숙해지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우선 우리는 <교회생활>에 익숙해야 합니다. 어려서 교회에 다녔던 분들은 비교적 쉽게 적응할 수 있습니다. 어려서 불렀던 찬송가가 생각나고, 들었던 말씀도 떠오르고, 예배가 어떻게 드려지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난생 처음 교회에 오신 분들은 모든 게 생소하고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낯설다고 한두 번 오다가 포기하면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익숙해지고, 교회가 내 집처럼 느껴질 날이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꾸준히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루 이틀에 판가름 나지 않습니다. 평생을 두고 꾸준히 해야 합니다. 새가족 여러분, 참고 잘 배우십시오. 잘 견디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교회 생활에 익숙해지고, 교회에 오는 시간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교회생활에 적응하기 힘든 것은 처음 믿는 분들만이 아닙니다.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오신 분들도 교회를 옮기면 매우 분위기가 생소하게 마련입니다.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찬송가를 사용하여 찬송하는데도 불구하고 생소합니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작년 9월 둘째 주일에 이웃 교회 교우님들이 수십 명 우리교회로 오셨습니다. 그 동안 매우 적응하기 힘드셨지요. 그러나 많이 익숙해져 가고 계신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완전히 익숙해지셔서 하나 되어 주님을 섬기게 되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교회생활에 익숙해지려면 <예배>에 익숙해야 합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면 예배자의 자세가 갖춰져야 합니다. 들어와 앞자리에 앉습니다. 마음을 정돈합니다. 자연스럽게 머리 숙여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릴 준비를 합니다. 성경책을 펴고, 찬송을 찾습니다. 그리고 받을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시간을 기다립니다. 구경 온 사람처럼 두리번거리거나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들어와 앉으면 자동으로 예배자세가 나와야 합니다. 예배에 익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예배에 빠져듭니다. 하나님을 깊이 바라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로 모읍니다. 세상의 복잡한 모든 일들은 내려놓습니다. 예배 모든 순서에 집중합니다. 온 마음을 쏟아 예배합니다. 반드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자 열망하면서 간절히 예배합니다. 결코 두리번거리면서 주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갈 때 마음에 기쁨이 넘칩니다. 하나님께 나왔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생활에도 익숙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시키는 통로입니다. 소리 높여 기도하든지, 깊은 묵상으로 기도하든지, 어떻게 기도하든지 상관없이 기도를 통해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부정한 마음이 사라지고 하늘의 정결하게 하시는 은혜가 임합니다. 부정적일 절망은 사라지고, <오, 주님!>하고 부르기만 해도 마음에 평화가 임합니다. 

어떤 때는 몇 시간이라도 기도합니다. 그런가 하면 중요한 일이 진행될 때, 그 현장에서 주님을 마음으로 부릅니다. 기도가 일상화됩니다. 매 순간이 기도의 순간이 됩니다. 주님이 자신과 함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작은 일 하나하나부터 큰일까지 모두 주님께 맡깁니다. 

성도는 <말씀>생활에도 익숙해야 합니다. 예배가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교양 강좌가 아닙니다. 귀를 즐겁게 하는 만담도 아닙니다. 설교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면 예배가 지루합니다. 성경말씀을 읽어서 전체적인 이해가 있으면 지루하지 않고 이해가 됩니다. 창세기를 읽은 사람은 목사가 아브라함을 이야기할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만 읽은 사람은 모세, 사무엘 등을 이야기하면 잘 모릅니다. 성경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깊은 뜻을 다 알겠습니까? 

그러나 말씀을 아는 사람은 목사가 한 구절을 이야기하면 그 다음 구절이 마음에 떠오릅니다. 요셉을 이야기하면 요셉처럼 팔려서 고난 받으신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한 구절의 의문점은 다른 구절에서 정답으로 연결되고, 한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말씀이 짝이 딱 맞고, 기막히게 연결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절묘한 해답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의 삶에 적용됩니다. 그 때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달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게 말씀에 익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말씀을 읽어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다음 주일부터 시작되는 신앙훈련에 반드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도는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도 익숙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님 중 한 분인 한석진 목사님께서 안동교회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안동교회는 지체 높은 양반들이 많이 모인 교회로서 양반의식을 깨뜨리는 게 큰 과제였습니다. 교회 안에서까지 양반 행세를 하니,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 때 안동교회의 양반의식을 깨뜨리는 데 크게 공헌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지체 높은 양반 출신인 박승봉 장로라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목사님의 의도에 전적으로 동감했습니다. 

어느 날 장덕창이란 교인의 모친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가난해서 남의 집 행랑채에 살고 있었고, 장례를 치르기에 힘이 들었습니다. 이 때 박 장로님은 목사님과 함께 손수 시신에 옷을 입히면서 장례를 잘 치르게 했습니다. 지체 높은 양반이 천한 백성에게 베푼 사랑은 장안의 화제 거리가 되었습니다. 외부대신을 지낸 바 있는 개화파 지도자 유길준도 이 일에 감동을 받고 안동교회 교인이 되었습니다. 

성도는 돕는 일에도 익숙해야 합니다. 섬기는 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야 합니다. 지갑을 여는 것도 익숙해야 합니다. 찾아가 위로하는 일에도 익숙해야 합니다. 
  
결국 성도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조금도 못마땅하지 않고, 조금도 불안하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주님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되면 더 이상 마귀에게 속지 않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에게까지 자라면 더 이상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확실한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 

앞에서 시골 총각과 결혼한 처녀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처녀가 시댁에 익숙하지 못하고 계속 겉돌면 남편과의 관계가 불편하고,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결혼생활이 흔들립니다. 그  때 유혹에 넘어지게 됩니다. 마귀가 그 마음을 흔듭니다. <넌 애초부터 시집을 잘못 왔어. 넌 옆집 홍길동과 결혼했어야 해. 홍길동은 집도 부자고, 얼마나 멋지냐? 그 시골 총각과 결혼한 게 네 평생의 실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어서 뛰쳐나와서 홍길동에게 가라!> 흔들리는 여인은 이런 시험에 넘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시댁에 익숙해진 여인은 남편에게도 익숙하고,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마귀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인이 시댁에 익숙해지고자 할 때 필요한 마음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사랑과 진실입니다. 15절을 보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을 새번역성경에서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라고 했고, 공동번역성경은 <도리어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라고 했습니다. 즉 사랑과 진리입니다. 사랑과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말하고 살면서>라고 했으니, 첫째는 말로 하는 것이고, 둘째는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인은 시집을 간 후 남편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리고 남편을 진정으로 대합니다. 그것을 말로도 표현하고, 자신의 삶을 통해서도 표현합니다. 결국 여인이 시댁에 익숙해지고자 노력하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익숙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멀면 계속 서툴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그것을 말과 삶으로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진정으로, 진실을 다하여 나아가십시오. 그것 역시 말과 삶으로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흐르다보면 어느 새 주님처럼 되어 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처럼 편한 분이 없게 됩니다. 주님만 생각해도 마음이 기쁩니다. 남편의 뒷모습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는 행복한 아내처럼 살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에게까지 자라가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설교 후에 부를 찬양이 너무도 좋습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은 멀고도 가까워>로 시작하는 찬양입니다. 그 끝에 보면 <고통을 나누며 기쁨을 나누며 주님과 함께 함께 걸어가면 나는 어느새 나는 어느새 주님을 닮아 주님을 닮아가 주님을 닮아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평생 주님만 바라보면서, 주님께 익숙한 성도로 자라가노라면, 주님을 닮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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