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공평과 의의 하나님 (사 32:1-8)

첨부 1


공평과 의의 하나님 (사 32:1-8)
    
2011년 첫 날 우리 교회가 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전교인 신구약 성경일독이 벌써 절반이 지났고 오늘8월 첫주 현재 이사야서를 읽는 중입니다.  매일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은혜를 체험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혹시 도중에 멈추신 분이나 이제 시작하는 분들도 우리 교회 성경일독 탁상달력 순서를 따라 열심히 말씀 묵상에 힘써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10:17) 하였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들을 때 좋은 믿음이 자라납니다.

이사야서는 예언서로 분류되며 예언서들 중에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신약성경에 가장 많이 인용이 되는 책입니다.   예수께서도 친히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시며 주전 8세기에 선포된 예언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자주 말씀하십니다(마13:14, 눅4:17 이하 등).   이사야는1장 첫 절에서 밝힌 것처럼, 남쪽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에 걸쳐 네 왕들의 시기에 유다 왕국을 비롯하여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들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회복에 관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웃시야와 요담이 다스리던 유다 왕국은 부국강병의 시대였습니다.  웃시야 임금은 영토를 확장하고 국경 지역에 견고한 성읍들을 세우며 주변국가들에 대한 지배를 확고하게 하였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을 견고하게 만들고 기이한 무기들로 성을 방어하였으며, 목축과 농사를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는 사업을 벌였습니다.  웃시야의 아들 요담 역시 부친의 뒤를 이어 국방을 든든히 하며 평화를 누리던 시대였습니다.  

요담의 뒤를 이은 아하스 임금 때는 강대국 앗수르 제국이 등장하면서 국제관계에 긴장감이 팽창하였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이 반앗수르 동맹을 맺고 유다 왕국에게도 동맹 가입을 강요하면서 유다 왕국은 순식간에 전쟁의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의 위협으로 두려워하는 아하스 임금에게 ‘임마누엘’의 징조를 보여주며 연기나는 부지깽이 같은 두 나라를 두려워 말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였습니다(사7:14)).  

그러나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도리어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하고 맙니다.   아하스가 두려워했던 아람과 이스라엘 동맹은 앗수르에게 참패하며 비참하게 끝이 났고 유다는 일단 위기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사자를 피하다 곰을 만난다는 말이 있지요(암5:19).  강력해진 앗수르는 유다 왕국을 위협하였고 아하스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앗수르에게 더 많은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유다 왕국은 졸지에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이런 관계는 아들 히스기야 왕 시대로 이어졌습니다.   

히스기야 임금이 초반에는 조공을 거부하며 앗수르에 강력하게 대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 왕 산헤립이 히스기야 14년에 유다 왕국을 침략하여 예루살렘만 겨우 남겨놓고 유다 전 지역을 짓밟았습니다.   궁지에 몰린 히스기야는 결국 조공을 바치기 위해 성전의 금은을 내놓아야 했고 성전 문과 기둥에 입힌 금까지 벗겨 바쳐야만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왕하18:13-16).  앗수르의 요구는 그정도에 그치지 않고 온갖 조롱과 멸시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비방하며 완전 항복을 강요하였습니다.    

이때 히스기야 임금이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나라를 어려움으로부터 건져냈던 유명한 기도가 어제 읽은 이사야 37장14절부터 20절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18만 5천 군사들을 밤사이에 시체로 만드셨고 산헤립은 그 즉시 유다를 떠나 앗수르로 돌아간 후 아들의 손에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상이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간단한 역사 배경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래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언제나 전쟁의 위기 속에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이 아니고는 소수 민족 이스라엘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고유한 역사와 신앙을 보존할 수 없는 지정학적인 특수 환경이었습니다.  웃시야와 요담 왕 시대에 평화와 풍요를 누렸던 유다 왕국은 앗수르와 바벨론이라는 초강대국들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었고 히스기야 시대에 국운은 이미 기울어질대로 기울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에 처한 유다에게 앗수르의 위협을 피하려고 애굽을 의지하지 말며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라 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이사야서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강대국의 군사적 도움이 아니라 먼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었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 왕국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 눈에 보이는 대제국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하려 하였으니 그들은 참으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눈 멀고 귀먹은 백성이었습니다.   이사야서의 메시지는 바로 이런 현실 상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1장 첫머리에서부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말씀이 쏟아집니다.  이사야의 눈에 보이는 유다의 형편은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1:5-6) 이라고 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사야의 눈에 보이는 유다의 참상은 곧 하나님께서 보시는 유다의 형편이었습니다.   소나 나귀도 제 주인을 아는데 이스라엘은 주인이며 부모가 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패역한 자식들이었고 고집이 센 짐승과 같이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깨닫지 못하며 눈이 멀었고 귀가 가리운 무지한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유황불로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책망하십니다.    비록 왕과 제사장과 관원들이 그리고 백성들이 부지런히 성전을 드나들며 수 많은 짐승을 불태워 제사를 열심히 드리고 있지만 그들의 제사는 헛되고 부질없는 행동에 불과하였습니다.   넘치는 제물과 수많은 제사는 하나님 보시기에 귀찮고 번거로운 행위일 뿐이며 그들은 다만 성전 마당만 밟고 가는 형식적인 종교인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헛된 제물을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 하셨고 그들이 아무리 기도하여도 그 기도를 듣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경건한 모양으로 제사드리는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그 손에 묻은 탐욕의 피, 억울한 자들의 피를 깨끗이 씻어야 했습니다.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의 부르짖음을 들어주고 과부의 억울함을 변호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나에게로 오라 나와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하십니다.   

나라가 평안하며 물질이 풍성하고 성전에서는 제사가 열심으로 드려질 때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며 회개하고 돌아오라 외쳤습니다.   아무 걱정이 없이 평안한 시기에 멸망을 선포하는 선지자의 말이 그들에게 헛된 소리로만 들렸습니다.   그들은 당장의 번영과 행복에 흠뻑 젖어 곧 다가올 심판의 참혹함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습니다.   도리어 평안을 깨뜨리는 선지자를 비웃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보는 것은 그들이 보는 것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오늘의 평안과 풍요로움을 보았지만 선지자는 그 거짓 평화와 풍요로움 뒷면에 감추어진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고 장차 다가올 두려운 심판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대하고 바라시는 것은 공평과 의로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진 자들의 평안과 높은 자들의 안락을 지키기 위해 가난하고 힘 없는 자들을 짓밟았습니다.  거짓 재판과 뇌물로 약자들을 억울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고혈을 짜내어 자신들의 배를 불리며 태평성대를 노래하였습니다.     겉으로는 평안이요 번영이었지만 속으로는 불법과 살인과 잔인한 핍박이었습니다.   그러고도 성전에 와서 많은 제물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도 좋아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 누구보다 더 잘 아는 것처럼 오해하는 착각과 교만으로 살던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던 유다 왕국의 정치 경제 종교 지도자들의 불신앙적인 행위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타오르게 하였습니다.   웃시야 임금과 요담 왕 시대에 누렸던 부국강병은 결국 거짓 평화였으며 아하스와 히스기야 임금에 이르면서 유다 왕국은 심판을 향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당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이 정해진 일이었습니다.   
   
이사야 1장은 이러한 배경 아래 선포된 하나님의 진노의 음성이었으며 이사야서 전체의 메시지를 요약하는 서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예고와 함께 다른 메시지는 심판 이후에 따라오는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용납하지 않으시며 심판하여 멸하시지만 긍휼과 자비로 용서하시고 남은 자들을 회복시키시며 전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십니다.   1장이 심판의 선언이라면 2장은 회복의 소망을 노래한 내용입니다.   이사야서 1장과 2장을 서론으로 보았을 때 전체 66장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 1-39장은 주로 심판에 관한 경고의 말씀, 후반부 40-66장은 회복과 위로에 관한 소망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심판 예고는 유다 왕국에만 국한하지 않고 이방 나라들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땅에만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 아니라 온 민족과 나라와 땅들 그리고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만민 중에 이스라엘을 택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고 그들을 통하여 만방에 하나님의 공평과 의로움을 나타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평과 의를 본받아 살아야 할 이스라엘이 도리어 불법과 살륙과 무자비함으로 약자들을 억압하고 불의를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이스라엘을 깨닫게 하시려고 주변 국가들을 동원하여 심판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잔악하게 핍박하며 괴롭게 하였던 주변 국가들도 심판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모압과 다메섹, 애굽과 해변 광야, 두로와 시돈, 앗수르와 아람 등 모든 민족들이 범죄한 이스라엘과 더불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약자들을 멸시하고 착취하는 불법한 세력들을 깨뜨리시고 이 땅에 정의와 의로움을 드러내십니다.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들으신 줄 압니다만 멸망을 앞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한 싹을 예고하셨습니다.  아하스도 아니고 히스기야 왕도 아닌 새로운 다윗의 후손을 통해 하나님의 진정한 공평과 의가 실현될 것을 알리셨습니다.   인류에게 가장 큰 희망이며 기쁨의 소식이 이사야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선포되었습니다.   곧 메시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것이며 그는 공평과 의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고 이루실 분이십니다.   이사야는 이처럼 장차 오실 메시야의 감격스런 희망의 소식을 두렵고 고통스런 심판의 메시지와 함께 선포하고 있습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은 더 이상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자리에서 연약한 새순처럼 돋아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썩은 둥치가 하나님의 진노의 칼에 한순간에 잘려나갔지만 그 잘라진 그루터기에서 한 싹이 돋아날 것이고 그 싹은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실 메시야를 소망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는 것처럼, 장차 한 왕이 나타나 그 나라를 의로 통치할 것이요 정치 지도자들이 공평으로 다스릴 것입니다.   공의로운 왕이 다스릴 때 세상의 바른 질서가 회복됩니다.   

이사야는 이런 나라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를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지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그 새끼들이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게 될 것이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기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고 합니다(사11:6-8).    

그런 세상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때 현실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온전히 고백하게 되면 온 세상이 평화의 왕국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바로 아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다는 것은 더 이상 피흘림이 없는 세상, 약육강식이 사라진 세상을 뜻합니다.   짐승들이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고 뛰놀며 어린이가 짐승의 새끼들과 함께 자라고 커서도 서로 해치고 상하는 일이 없으며 위협하고 무서워하지 않고 함께 사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회복된 그 나라는 더 이상 억울한 이들의 부르짖음이 없습니다.   무죄한 자의 피흘림이 없습니다.   높은 곳이 낮아지고 낮은 곳이 솟아 평평하게 되듯 새로운 왕이 공평과 의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의 공평과 의를 닮아 사는 사람들을 통하여 오늘 우리들 속에서 현실이 됩니다.    메시야의 오심을 믿고 그의 제자로 산다고 자부하는 기독교인들이 과연 하나님의 공평과 의를 따라 살고 있습니까?    역사를 통해 볼 때 정의라는 미명 아래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끔찍한 폭력과 불의는 비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음을 절대로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자비와 사랑에 바탕을 둔 하나님의 공평과 의를 우리의 것으로 인정하며 그것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현실이 되도록 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세상에 전하는 복음, 하나님나라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새로운 왕이 다스리는 그 나라의 정의는 사람의 외모와 몰래 바친 뇌물에 현혹되어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억울하게 만드는 타락한 정의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실천되는 나라입니다.   더 이상 보는 눈이 감기거나 듣는 귀가 닫히지 않을 것이며,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듣고 깨달아 하나님께 돌아오며 어눌한 혀가 풀려 말을 분명하게 할 것입니다.   다시는 어리석은 자를 존귀하다 치켜세우지 않고 사악한 자들을 옳다 아첨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계속하여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한 일을 하고 패역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평과 의를 따르는 고귀한 백성들은 고귀한 편에 서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봅니다.   그 사람이 가진 학위, 재물, 지위를 통해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월수입이 어느 정도이며 연봉을 얼마나 받는가, 어느 동네에 살고,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브랜드 가방을 들었는가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속사람을 보십니다.   하나님을 닮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그 속사람을 보십니다.    자신의 몸을 대속제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자기를 희생하고 섬기는 사람을 통해 그 나라를 세워가십니다.  

안식월 중에 한국에 머물며 주일마다  몇 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방문객으로 잠시 다녀온 서울의 교회들은 나름대로 열심으로 모이고 지역사회에서 좋은 평을 듣는 교회들이었습니다.   예배드리는 교인들의 몸가짐도 세련되어 보였고 예배도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질서있게 드려졌습니다.   제 눈에는 결코 작은 건물로 보이지 않았지만 교인수에 비해 비좁은 예배당에서 하루에 여러 차례 나누어 드리는 예배는 시작과 마칠 때 들어가고 나가는 교인들로 가득합니다.   한국교회의 열심을 느껴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대도시의 큰 교회들의 주일 풍경은 거의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주일마다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군중들의 모습 속에 한국교회의 저력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왜 한국교회가 갈수록 불신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을까?    이렇게 경건하게 보이는 예배자들이 예배당마다 가득한데 왜 우리 나라의 사회정의는 여전히 비참한 수준이고 내일에 대한 소망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수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예배당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 많은 예배와 성경공부 프로그램과 섬김과 봉사의 열심으로 친다면 우리 사회가 변하여도 벌써 몇 번씩 변화가 되었을텐데 왜 세상은 더 삭막하고 억울한 자들의 외침은 더욱 많아지며 교회와 기독교를 향한 세상의 눈초리는 이리도 싸늘할까?    우리 기독교인들끼리만 스스로 만족하고 부지런히 예배드리는 것으로 우리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 교회들을 기쁘게 바라보고 계실까?   이런 두려운 생각입니다.   

하나님께 원하시는 것은 천천의 수양과 번제가 아니라 공의를 구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치솟은 교회 건물이나 화려한 시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함께 따르고 행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와 그들의 삶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산 제물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며 그분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본받아 공평과 의의 길을 따릅니다.   자녀는 그 부모를 닮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나를 통해 하나님의 공평과 의가 이 땅에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고백, 사랑고백은 결국 내 주변에 있는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열매로 드러나야 합니다.   나의 이기심과 무례함과 불법한 행동으로 억울함을 당하고 실망하며 좌절하는 이웃은 없습니까?      

평강의 왕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의 몸이 찢기며 피흘리기까지 희생함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주님의 부서진 몸, 쏟아진 피를 생각하며 성찬식에 참여하는 교우 여러분, 그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나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그 나라 시민으로 살게 하심을 감사합시다.  주께서 주시는 치유의 은혜와 회복의 기쁨이 우리 가운데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 나의 이웃들이 하나님의 공평과 의를 맛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의 품으로 돌아와 새로운 희망 가운데 살게하는 이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