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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으로 내 인생의 주인 삼자 (요 14: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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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내 인생의 주인 삼자 (요 14:25-2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대표적인 선물이 3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성경, 그리고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은 눈으로 보이게 오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왜 오셨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 또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세상에 보이지 않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보이지 않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거룩한 영, 진리의 영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은 보이는 것 위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집을 지어도 외부 단장에만 열을 냅니다. 그 때문에 속이 빈약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도 내면보다 외모단장에 열을 냅니다. 사실 내면이 더 중요한 것인데 내면을 가꾸는 데는 무관심합니다. 외모는 생명이 짧습니다. 그러나 내면은 평생을 갑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법입니다. 

성령

성령은 보이지 않게 오셔서 보이지 않게 역사 하십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사역하셔서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서 곡해하기 쉽습니다. 모두가 성령이 보이지 않게 사역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령을 “하나님의 영”으로 소개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루아흐”라고 하고 신약성경에서는 헬라어로 “프뉴마”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호흡, 숨, 바람, 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프뉴마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함께 사역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이 프뉴마에 의해서 예수를 잉태하였습니다. 또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였다고 했는데 그것도 이 하나님의 “루아흐” 즉 하나님의 “프뉴마”가 비둘기 같이 내려오셨다는 말입니다. 또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뜨겁게 기도할 때 임하셨던 성령님도 바로 이 “프뉴마”의 성령님이십니다.

사역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성령이 임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이제 당신은 곧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제자들은 홀로 남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실 것”을 알리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 속에서 성령의 사역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가르치는 일”입니다. 성령은 진리를, 제자의 할일을, 또한 앞으로 될 일들을 가르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가리켜 가르치는 영이라고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홀로 남게 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신들의 미래와 사명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향해 성령이 너희를 가르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은 가르치시는 영이십니다. 

무지를 깨우치시고 진리를 알게 하시고 할 일을 알게 하시며 뜻을 깨우쳐 알게 하십니다. 처음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반드시 사도행전적인 기사와 이적이 일어납니다. 지금 중국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들이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복음이 처음 들어간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가르치고 깨우치게 하시는 사역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그랬습니다. 기사와 이적이 일어나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셔서 깨우쳐 알게 하시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바로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티오피아 내시가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가 귀국하는 길에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령이 빌립을 내시에게로 보내셨습니다. 빌립이 그 내시에게 “네가 읽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내시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알겠느냐”고 대답합니다. 

진리는 아무나 알고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있다고 성경의 말씀을 깨닫는 것도 아니고 무지하다고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의 일하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전 문화부 장관이었던 이어령씨가 딸이 고난 받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딸이 암에 걸리고 시력이 상실되었으며 팔팔하던 손자 아이가 죽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 고난 속에 살아가는 딸을 보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딸이 점점 회복되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씩 치유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어령씨가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대부분 이런 경우 예수님을 잘 믿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잡지의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이어령씨는 지금도 솔직히 잘 안 믿어진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쉽게 믿는 사람들이 부럽다고 말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렇게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성의 존재인 인간이 초자연적인 예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천국을 믿는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못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도 불사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흔쾌하게 믿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이 너희를 가르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면 제자들은 홀로 남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될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 성령께서 가르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후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얼마나 신나게 돌아다니며 부활과 십자가를 전합니까? 원래 베드로는 무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성령이 함께 하셨더니 베드로가 영감을 받아서 베드로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니 그가 가르침을 받고 할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생각나게 하시는 일”도 합니다. 우리의 기억력은 아주 보잘 것이 없습니다. 들어도 곧 잊어버립니다. 지난주일 설교내용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내용은 고사하고 제목조차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목회자 입장에서 보면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잊어버렸지만 걱정할 것 없는 것은 필요할 때가 되면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후에 제자들이 나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때로 고난의 자리에 처할 때가 올 것이지만 그때 “너희는 고난 받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하지 말라, 성령이 대답을 주시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보완”하는 일을 하십니다. 인간은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모두 무능하고 무지합니다. 3년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훈련받고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제자들은 실패를 거듭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무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두려워 도망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그런 제자들의 무지와 무능을 깨우치시고 보완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40장을 보면 보완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 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라”(이사야40장28-31절) 이것이 성령이 보완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신앙생활이 가능해집니다. 우리 모두는 제자들처럼 믿는다 하면서도 날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무능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신앙생활을 원활하게 유지하고 수월해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목회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이 성령의 힘입음 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목회 자체가 불가능하고 감당이 안 됩니다. 교회 성장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도 성령이 목회자를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목회자들이 이 성령이 하시는 것을 모르고 자신이 하려고 온갖 꾀를 쓰고 재주를 부리곤 합니다. 그러다가 한계에 부딪히고 의기소침하곤 합니다. 이는 목회가 뭔지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목회에는 반드시 성령의 힘입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는 참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 전과 후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 부활하신 후 성령이 강림하시고 나서 제자들은 일신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의 힘을 입음으로 제자들은 비로소 달라졌습니다. 그 후 제자들이 가는 길에 거침이 없었고 막힘이나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령의 함께 하심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거룩하신 영이신 성령의 힘을 반드시 힘입어야 합니다. 그 성령이 내게 임하시면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쳐 알게 하시는 은혜를 입습니다. 또한 내 인생을 주관하시고 내 앞길을 안내하시고 내가 가는 길을 이끄십니다. 그것이 내 힘이 아니고 성령의 힘입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후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 성령이 내 인생을 인도하신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의 “사고의 변화”를 유도하십니다. 성령은 때로 힘의 성령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때로 성령을 불로 바람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소리 없이 다가와 우리의 사고의 틀을 바꾸어 놓으시기도 합니다. 제자들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 전과 후에 사고의 틀이 완전히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부활 이전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때로 혼돈하고 헤매기도 하고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이후 성령을 받고 나서 제자들은 예수가 누구신지 정확하게 인식하였고 진정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거기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옛말에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아야 힘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진정으로 알게 된 후부터 주저함 없이 겁 없이 나아갔습니다. 정확하게 복음을 전달하고 전파하고 소개하고 알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증언을 듣고 3천 명, 5천 명씩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만나고 알고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신자들 중에는 예수를 잘 모르면서도 아는 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오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보지도 않고 아는 소리를 합니다. 그때 하는 말은 모두 자기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곡해를 하고 잘못된 신학을 말하고 잘못된 신앙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잘못된 신앙이나 신학이나 이단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또한 오래 믿은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를 만나지 못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대부분 이론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니까 내 생각을 주장하고 잘못된 주장을 펼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론의 신앙은 제주도에 가 보지도 않고 제주도를 안내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 사람이 또 더 우기고 고집을 부립니다. 성령은 체험해야 알 수 있습니다. 만남이 있어야 깊이 알게 되고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만나게 되면 그 성령은 내 판단, 내 생각, 내 주관, 내 이성을 주관하십니다. 그래서 내 인생관이 달라지고 내 생각이 달라지고 내 주관과 내 이성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내 사고의 틀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내가 정확하게 신앙고백을 하게 되고 복음의 핵심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역사와 회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평안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평안은 오늘 우리가 말하는 평안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사후에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게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 사후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핍박이 기다리고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제자들의 앞날에는 결국 죽음의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 사후 다락방에 숨은 것입니다. 다락방은 들어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이제 갈 곳이 다락방 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두려웠고 그 두려움 속에서 제자들은 숨을 곳이 필요했는데 그곳이 다락방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미래가 암담하고 앞날이 험난함을 알고 다급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금식기도 하였을 것이고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은 수고 없이 쉽게 그냥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다락방은 용광로와 같은 곳입니다. 용광로는 들어가면 다 녹습니다. 나의 형체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나는 곳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기대함과 같이 마침내 성령을 받습니다. 

제자들은 그날 비로소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복음을 전하였고 예수의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 안에서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주신 말씀이 “평안을 너희에게 주리니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이 평안은 안락한 환경이나 좋은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드러운 이부자리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평안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느껴지는 성령이 함께 하시는 평안입니다. 환경과 처지에서 주어지는 평안이 아니고 하늘이 주는 담대함의 평안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입니다.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이 주어질까요? 그것은 바로 의존함 입니다. 전적인 의존입니다. 나의 삶 전체를 주께 맡기고 위탁하고 의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의존이 없이는 성령의 가치를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그날 얼마나 자신들을 내어 놓았겠습니까. 너무 다급하였습니다. 전적 의존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내면을 비우는 일입니다. 내안의 인간적인 것들, 내가 세운 알량한 계획들, 내안의 더러운 죄 짐들을 다 내려놓고 비워야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주실 은혜를 채우려면 내 내면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내 인생을 성령께 완전히 의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후에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얼마나 몸부림을 쳤습니까? 그 몸부림은 다 내려놓음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전적으로 위탁함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성령 받을 준비를 완벽하게 하는 자기 비움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이런 몸부림이 있을 때 성령이 내 인생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그렇게 된 후에야 진정한 제자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성령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는 삶입니다. 이제 다 내려놓고 성령께 나를 위탁하십시다. 다 맡기고 다 내려놓고 전적으로 의지하십시다. 그러면 성령께서 내안에 내주하셔서 내 주인이 되실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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