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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 (창 2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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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창 28:10-22)


I. 인생역전

사형수들의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소에 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날도 전기의자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를 위해 목사님은 축복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죄수에게 마지막 소원이나 뭐 도와드릴 일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얼굴이 새파래진 죄수가 떨리는 입술로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 죽음이 너무 두렵습니다. 그러니 내가 편히 죽을 수 있도록 목사님께서 제 손을 꼭 잡아 주세요.”

도와 드릴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지 전기충격으로 죽는 사형수의 손을 잡아 줄 수야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야곱은 도망자가 되어 광야길을 홀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동행자도 도와줄 사람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욕심 많고 간사한 사람이었던 야곱은 어머니 몸에서 태어날 때부터 쌍둥이 형 에서의 발 뒤꿈치를 붙잡고 태어 납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야곱 “붙잡는다. 빼앗는다”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또한 성장하면서 언제나 기회를 엿보던 야곱은 형이 몹시도 시장한 틈을 이용해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빼앗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눈먼 아버지까지 속여 아버지가 장자 에서에게 주어야 할 축복을 가로채 버리고 맙니다. 

몇 번이고 속임 당한 에서는 동생을 죽이려고 한을 품고 기회를 엿보게 되지요. 에서의 분노로 인해 야곱은 정든 고향과 따뜻한 부모와 가정을 떠날 수 밖에 없는 도망자의 신세가 됩니다. 외삼촌이 살고 있는 하란으로 망명길을 떠나는 야곱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습니다. 해가 저물자 야곱은 피곤한 몸을 잠시나마 뉘우기 위해 루스 광야에서 모래를 침대 삼아 잠자리를 폅니다. 하늘을 이불 삼아 몸을 덮고,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판을 베개하여 머리를 기댑니다. 처량함과 서러움에 한 없이 흐르는 눈문을 닦으며 잠을 청하게 됩니다. 남을 속이고 쫓기는 사람이 갖는 불안감, 죄책감, 가정을 떠난 외로움 - 만감이 교차하는 바로 그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만감이 교차하는 그 밤, 절망의 끝자락에 내몰려있는 그 밤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28장은 벧엘에서 야곱에 베고 잤던 돌을 통해 야곱에게 일어난 변화를 말해 줍니다.    


Ⅱ. 세 가지 돌 

서울신학대학교 권혁승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오늘 본문에 세 종류의 돌이 나옵니다. 

첫째는 11절 - 길바닥에 굴러 다니는 한 돌을 취하여 베개로 삼은 돌입니다.

둘째는 10절 - 베개로 삼았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부은 기념비입니다

셋째 마지막 12절 - 자신이 세운 그 돌이 하나님의 집, 성전이 되리라는 꿈의 돌입니다


1) 첫째 11절에 나오는 돌베개는 절망의 돌입니다.

벧엘이 위치하고 있는 중앙산지는 돌이 많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농작물 경작에 방해가 될 정도로 돌이 많습니다. 또한 이곳에 있는 돌은 석회암 성분이 많기 때문에 건축 자재로 사용될 정도로 돌의 강도가 높습니다. 벧엘에서 야곱이 베개로 사용한 돌은 이곳에서 흔하게 굴러다니는 돌 중에 하나입니다.  잘 다음어진 돌이 아니라 제멋대로 생긴 자연 그대로의 돌입니다. 결코 편안한 잠을 청하기에 적합한 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돌침대를 상상하시면 안됩니다. 머리를 그 돌 위에 올려놓고 누웠지만 울퉁불퉁한 돌은 오히려 야곱의 머리를 아프게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돌에서 전해오는 냉기는 여행으로 피곤한 야곱의 온 몸으로 퍼져 나갑니다. 벧엘에서의 돌 베개는 곧 절망적 상황에 놓여 있는 야곱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절망적 상황 속에 있습니다. 더구나 하란으로 가는 그의 여행 길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는 피난 길이었다는 사실은 야곱을 더욱더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고 갔습니다. 즐거운 여행 길이 아니라 도피라는 불안감과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두려움이 몰려오는 고달픈 여행 길입니다. 사흘길쯤 100km를 달려왔지만 앞으로 600km 더 남아 있는 하란까지의 먼 여행 길은 야곱에게 커다란 중압감으로 다가 왔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모든 상황을 딱딱하고 거친 돌이 대변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머리를 불편하게 하는 이 돌은 야곱이 처한 상황과 그 마음의 절망과 고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2) 둘째는 기둥으로 세운 기념비돌입니다.(18절)

하나님은 몸과 마음이 지쳐 잠들어 버린 야곱에게 찾아가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빈들에서 잠들어 버린 야곱을 찾아가신 하나님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돌을 베개하고 자던 그 밤, 야곱은 참으로 놀라운 꿈을 꿉니다. 깊은 밤 갑자기 온 땅이 환해집니다. 밝은 빛으로 인해 사닥다리 하나가 산을 지나고 구름을 뚫어 하늘까지 높이 연결되어 모습이 보입니다. 그 사닥다리 위로 하늘의 사자들이 미끄러지듯 오르락 내리락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고, 그 위에서 우렁찬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3-15)

야곱이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하던 그 바램이 이루어지는 꿈을 꾼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이었다고 하면 이 간사한 사나이 야곱을 처음 만났을 때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네 이놈. 눈 먼 아버지, 못난 형을 속이고 어딜 도망가느냐?" 대화가 이렇게 이어져야 문맥이 자연스럽게 연결 됩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야곱을 만난 하나님의 제 일성은 축복의 메세지였습니다. 여기에 굳은 심령을 녹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야곱은 깨닫습니다.

'나 혼자인줄 알았는데, 여기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구나. 이 길이 고독한 나그네 길 인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길이요, 여기가 내 집이요, 여기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전이구나. 저주받은 나그네 길인 줄 알았는데 이 길조차 하나님의 섭리였구나.'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자 온 몸에 힘이 솟아 오릅니다. 돌베개가 황금보다 귀하게 보입니다. 야곱은 넘치는 감격과 은혜로 인해 베고 자던 돌을 ‘하나님의 집’의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둥’은 히브리어로‘마체바’(matsebah)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단순히 세워 놓은 돌‘에벤’(eben)이 아니라, 기념비로서의 돌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린 제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구별된 제단을 쌓고 그곳에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마침내 야곱은 루스라 불리던 광야의 땅을 하나님의 집“벧엘”이라 부릅니다. 

“벧엘”의 본래 이름은 루스입니다. 루스란 말은 분리라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야곱은 깨닫습니다. "나는 이제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구나. 내 형제 부모로부터 나는 이제는 분리된 존재이구나.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네. 나 혼자 가는 길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동행하고 여기 엎드린 이 곳이 하나님의 집 벧엘이었구나."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찬송이 절로 흘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집을 떠나 100km 정도를 이동했고, 광야에서 잠을 자던 야곱이 갑자기 기름을 어떻게 구했을까? 하는 의구심입니다.

야곱이 여행길에 가지고 있었던 기름은 감람유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감람유는 여러 가지 용도로 쓰였습니다. 감람유는 음식을 만들 때는 식용류, 피부에 바를 때는 최고의 화장품, 급할 때는 질병이나 상처에 바르는 약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종교적으로는 성전의 등불을 밝히는 기름이나 하나님의 직분자들 (왕이나 제사장 등)을 세울 때 사용하는 기름 부음에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감람유는 비상시에 상처에 바를 수 있는 비상약품 역할을 했기 때문에,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감람유는 필수적인 휴대품이었습니다. 누가복음서를 보면 강도 만났던 자를 도와주었던 선한 사라미아인이 주막으로 그를 데리고 가기 전에, 먼저 자기가 가지고 다니던 기름과 포도주로 응급적 치료를 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눅 10:34)

하란으로 이동하던 야곱도 비상약품인 감람유를 가지고 있었고 그 기름을 돌기둥 위에 부었습니다. 이것은 세운 돌을 거룩히 구별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와 동시에 아직까지 멀리 남아 있는 하란까지의 여행 길을 하나님께 위탁하는 믿음의 행동이기도 합니다. 


3) 셋째는 성전의 기초가 될 서원과 비전의 돌입니다. (22절)

야곱의 절망적 상황을 대변해 주었던 볼품없던 돌 베개가 똑바로 세워지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와 기도의 제단으로 바뀌었습니다. 고대 시대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 하나님의 것으로 거룩히 구별하여 드린다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야곱은 돌 기둥을 세우면서 그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제 그의 신앙이 기념비적 제단을 쌓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결단하는 신앙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야곱은 자신의 불확실한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놓고 서원의 기도를 드리면서 자신의 미래를 결단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 기도의 서두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이라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의 결단이 마치 조건부에 의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20절이 시작되는 서두에 접속사‘임(םא)’이 사용되어 있습니다. ‘임(םא)’은 조건을 나타내는 접속사로도 사용되지만, 동시에 강한 소망을 나타내는 불변사로 사용되어서 ‘~하시기를’, ‘~되시기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앞 뒤 본문의 맥락을 살펴볼 때 조건문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해 주시기를’이란 뜻을 지닌 소망의 불변사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적절합니다.

따라서 야곱이 자신이 신앙을 결단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서문은 조건부적인 의미 보다는, 이미 앞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내용들을 수용하는 적극적인 자세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결단하는 신앙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여호와께서 야곱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신앙고백(28:21), 둘째는 기둥으로 세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라는 비전,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의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는 내용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을 보았던 야곱의 생애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 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통해서, 자신이 베고 있었던 돌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차가운 절망의 돌이 기도의 거룩한 제단이 되었고, 하나님의 위대한 성전을 이루게 될 비전의 돌로 바뀌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던 절망의 돌이 이제는 위대한 미래의 소망으로 의미와 가치가 달라진 위대한 신앙고백의 돌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쓸모없는 돌멩이처럼 버려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돌멩이 같은 우리를 성전기둥으로 세우시고 성령의 기름을 부어 교회를 세우십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절망이 변하여 성전이 되는 이 엄청난 변화가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구체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 조상들을 통해 듣기만 하던 그 하나님을 이제는 내가 만나는 것입니다.

· 그리고 그토록 몸부림하던 그 꿈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 그토록 갈망하던 축복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 이것이 바로 절망의 돌을 성전 기둥으로 바꾸는 힘입니다.


Ⅲ. 에서

한편 야곱이 은혜를 받고 꿈을 꾸고 있는 이 시간 그의 형 에서는 무엇을 했겠습니까? 그는 분명히 장자의 명분과 아버지의 축복을 빼앗아 몰래 달아난 야곱을 생각하며 증오에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를 갈고 있었겠죠.

에서! 그는 주어진 축복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였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은혜를 받는 것 중요하지요. 새로운 꿈을 꾸는 것 귀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주신 은혜를 헤아리며 소중히 간직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꿈을 소중히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에서! 그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현실주의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의 축복은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으로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는 오늘 사냥한 짐승을 잡아서 갈비를 뜯고 포도주를 곁들여 불고기를 만들어 먹고 함포고복으로 배를 두드리며 잠자리에 들었고 또 잠에서 깨어나면 기계처럼 사냥을 나갔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즐거움이요 인생의 전부라 생각했습니다. 

그에겐 꿈이 없었습니다. 

이 땅의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조건을 잃어 버렸다 해도 아직도 꿈꿀 수 있는 사람은 아직도 많은 것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 비전이 있는 사람은 젊은이입니다. 꿈과 비전을 잃은 사람은 그가 누구든 늙은이입니다. 

에서! 그는 신령한 꿈이 없는 현대인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히 일만하고 돈벌어 집을 사고 좋은 반찬에 밥먹는게 고작 꿈이요. 밤이면 T.V.나 보다가 또 잠들고 먹고 자고 일하고 - 이것이 인생의 전부입니까? 이 땅에 당신이 태어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꿈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이웃을 유익하게 하는 꿈이 있습니다. 

에서를 보십시오. 

그는 축복을 동생에게 다 빼앗긴 후 아버지를 찾아가 찌꺼기 축복이라도 좋으니 남은 것이 있으면 달라고 아버지를 졸랐으나 아버지 이삭은 냉혹하게 거절하며 말합니다. 성경을 좀 혹독하게 해석하면 이런 뜻입니다. 

"자기에게 준 것도 지키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식! 큰 것을 소홀히 하는 미련한 자식! 이상도 꿈도 없이 오늘 만으로 만족하는 게으른 자식! 때가 지난 후에 후회하고 땅을 치는 쓸모 없는 자식! 복수심을 이기지 못하는 졸장부 같은 자식! 너에게 나눠줄 축복이 뭐가 있겠느냐? 넌 이제부터 네 주먹이나 믿고 살아라! 거친 땅 황무지나 파먹고 살아라! 너는 평생 네 동생 야곱을 섬기며 살게 될 것이다!"

에서는 그때에야 대성통곡을 하며 아버지의 침상을 물러 나옵니다. 

여러분. 때를 잃지 마십시오. 은혜주실 때 은혜받아야 합니다. 회개에도 때가 있습니다. 충성에도 때가 있습니다. 천하 만사에 때가 있습니다. 

주님 전에 나아와 꿈을 꾸십시오. 지금이야 말로 꿈을 꿔야 할 때입니다. 


Ⅳ. 야곱의 꿈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자는 잠을 통하여 희한한 꿈을 꾸었습니다. 
가슴이 설레이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흔 넘은 노총각이 꿈을 품고 열심히 기도했더니 드디어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첫째, 좋은 직장을 주십시요.

둘째, 가족과 살 수 있는 좋은 집을 주십시요.
- 두 가지 소원이 이루어 졌습니다. 

셋째, 인류역사상 최고의 여성을 주십시요.
- 뽕 하고 한 여인이 나타나는데 테레사 수녀가 나타났습니다. 

∙ 사람의 꿈과 하나님의 꿈은 다릅니다. 

∙ 하나님을 만나고 참된 꿈을 얻자 길바닥 돌멩이가 기념비가 되고 성전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꿈을 품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잠언 29장 18절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는 말씀이 있는데 KJV에서는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Where there is no Vison, the people Perish"「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달걀은 품어주지 않으면 절대로 병아리가 되지 못합니다. 오늘 꿈을 품지 않은 사람에게 내일의 성공은 없습니다. 

우리는 한 인간의 위대성을 꿈의 크기로 재어 볼 수 있습니다. 꿈이 작은 사람은 작은 사람입니다. 꿈이 큰 사람은 큰 사람입니다. 땅의 세계만 꿈꾸는 사람은 속물입니다. 영원과 종말과 하나님 나라를 꿈꿀 수 있는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마지막날에 성령을 받게 되면 젊은이들이 비전과 환상을 갖게 될 것이라고 늙은이도 꿈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지혜가 탁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다른 사람이 생각지도 못했던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개인과 가정 그리고 공동체나 교회나 민족을 축복하시려고 하실때에 먼저 꿈을 주십니다. 영롱하고 찬란한 꿈을 가슴에 심어주시고 그 꿈을 가슴에 안고 기도 할 때에 그 꿈을 통하여 꿈과 비전을 이루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꿈을 파는 곳입니다. 교회 강단은 꿈을 나눠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훌륭한 신학자 루돌프 보랜이라고 하는 사람은 "설교는 환상을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꿈을 꿀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 설교시간마다 꿈을 나누어 가시길 바랍니다. 

이 전에 올 때마다 절망 중에 찾아왔다가 희망의 꿈을 안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실패하여 주님앞에 찾아왔다가 성공하는 꿈을 안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병든 사람은 건강한 꿈을 꾸시길 바랍니다. 아들이 없는 사람은 사무엘같은 아들을 낳는 꿈을 꾸시길 바랍니다. 가정이 구원받는 꿈을 꾸시고 셀목장이 부흥되고 교회가 부흥되고 나라와 민족이 번영하는 꿈을 꾸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필요한대로 마음껏 꿈을 사가지고 가는 제단이 바로 이 제단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Ⅴ. 하늘 문을 여는 교회

월트 디즈니라고 하는 젊은이는 가난한 만화가였습니다. 집도 없이 예배당에서 기도하다 지하실에 내려가 만화를 그리곤 했습니다. 쥐새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득실거리는 쥐들과 함께 잠을 자는데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쥐를 저주하던 어느날 꿈을 꾸었습니다. 쥐들과 함께 친구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쥐를 소재로 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그는 돈 한푼 가지지 못한 무일푼으로 오렌지 카운티의 벌판에 꿈의 동산을 세우기로 작정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꿈 하나로 그는 디즈니 랜드를 세웠습니다. 

야곱에게 꿈을 준 돌베개는 하늘 문을 열었습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난 후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곳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늘의 문, 구원의 문, 축복의 문은 모두 돌베개 즉 교회안에서 예수를 통하여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꿈을 주는 곳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교회는 큰 꿈을 주는 한소망 교회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교회는 하늘 꿈을 주는 한소망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교회는 찾아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꿈을 한가득씩 안겨다 주는 한소망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우리 교회의 이름이기 이전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의 비전을 말하는 이름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하늘 문을 닫고 여는 열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성전에 와서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하늘 문을 여시고 응답하여 주십니다. 

실패했어도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께 오십시요. 용서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사죄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하늘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세상의 죄를 짓고 있다고 주님앞에 찾아왔다 할지라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나는 안돼. 내 남편은 안돼. 내 가족은 안돼.' 좌절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용서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예수여 날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이시간도 여러분을 구원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 지금 기도의 문이 닫히신 분이 계십니까? 이곳에 와서 응답받는 꿈을 꾸시길 바랍니다. 

· 사업의 문이 닫히고 직장의 문이 닫히셨습니까? 여기서 축복받는 꿈을 꾸십시오. 

· 행복의 문이 닫힐 때 슬퍼하거나 울지 말고 이 곳을 찾아 오십시오. 

· 앞길이 캄캄하고 암담할 때 절망하지 말고 이곳에 찾아와 꿈을 사가지고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 한나는 슬픔을 안고 돌베개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자식을 얻었습니다 태의 문이 열려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 히스기야는 죽음을 선고 받고 돌베개를 안고 기도하다가 생명을 연장받았습니다. 

· 이사야는 절망중 돌베개를 찾았을 때 숯불이 나타났고 역사를 이끌어 가는 사명을 받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예배하는 이 시간! 

바로 당신의 머리에 사닥다리가 있고 돌베개가 놓여져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 문을 여는 꿈꾸는 곳입니다.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왜 돌베개의 꿈을 기대하지 않습니까? 왜 꿈을 갖지 않습니까? 

우리 한소망교회는 행복한 신앙생활을 꿈꾸는 교회입니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를 만나 꿈을 꾸는 그 시간 끝이 납니다.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 '여기가 내 교회이구나. 여기 나를 위한 축복이 예비 되어 있었구나.' 꿈꾸는 그 시간 끝이 납니다. 

찬송은 성도를 영광스럽게 하는 꿈입니다. 기도는 닫힌 하늘 문을 여는 꿈입니다. 말씀은 성경의 말씀과 약속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꿈입니다. 헌금은 금생과 내생에 복을 받는 씨앗입니다. 축도는 나를 세상의 승리자로 파송하는 꿈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꿈을 꾸고 돌베개 세워 성전삼고 예배한 후 새로운 꿈을 꿉니다. "이제는 버림받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나는 승리자가 된다. 나는 부모, 형제, 고향으로부터 버림 받은 인생이 아니라 성공하고 돌아오기 위해 지금 떠나갈 뿐이다." 

창세기 28장 꿈 사건이후 29장 부터는 야곱이 꾼 꿈을 이루어 가는 정복자의 삶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맺는 말 

언제나 역사는 꿈꾸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미래는 꿈꾸는 사람들의 손에 맡겨지게 될 것입니다. 이 교회는 인류에게 큰 꿈을 주는 한소망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하늘 꿈을 알려주는 한소망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인류의 유일한 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한소망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한국의 소망, 한 민족의 소망이 되고자 하는 한소망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젊은이들, 어린이들에게 그 꿈을 한가득 심어주는 한소망 교회입니다. 꿈꾸는 교회, 여러분들과 더불어서 미래의 꿈을 펼쳐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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