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음의 친구되기 (삼상 20:1-42)

첨부 1


믿음의 친구되기 (삼상 20:1-42) 
  
오늘은 믿음의 친구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전도서에 보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 왜냐하면 둘이 함께 있고 둘이 함께 일할 때 더 좋은 열매를 얻는다 라고 했습니다. 오늘 다윗에게 믿음의 친구가 누구냐 할 때 요나단입니다. 정말 귀한 친구예요. 다윗에게 요나단은! 저는 오늘 이 본문을 다윗을 주인공으로 살펴보지 않고 요나단의 모습과 행동을 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본문에서 요나단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원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제목을 정했는데 ‘믿음의 친구 찾기‘ 라고 하지 않고 ’믿음의 친구 되기’ 로 정했어요. 누가 나의 믿음의 친구인가? 이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에게 믿음의 친구가 될 것인가 이걸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상황을 보면 다윗은 점점 위급해지고 급박해집니다. 사울의 손에 잡히게 될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다윗이 요나단과 극비에 만나 한 말 중에 가장 위급한 말이 이거예요. 4절 마지막 말입니다. ‘지금 나와 죽음 사이는 한발짝밖에 되지 않네! 다윗이 극심한 위태로움을 느낍니다. 

요나단은 이 어렵고 화급함 속에 있는 다윗에게 믿음의 친구가 되어줍니다. 20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다윗이 망명을 떠나는데 요나단과 다윗이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모릅니다.41절로 한번 가볼까요? 둘이 헤어지면서 둘이 끌어안고 웁니다. 다윗이 더 서럽게 웁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뭐냐 그럴 때 바로 이 관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결혼한 두사람이 이 관계가 되면 정말 좋겠다 생각합니다. 내가 그에게 믿음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같은 교회를 다니면 다 믿음의 친구가 되는가? 결혼하여 함께 살면 자동적으로 믿음의 친구가 되는가? 아닙니다. 

여러분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반이면 다 친구인가요? 말로는 제 친구예요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자주 만나는 사이라 하더라도 친구가 있고 동료가 있습니다. 직장동료를 생각해보세요. 동료는 매일 만납니다. 매일 같이 일합니다. 같이 회의하고 같이 밥도 먹습니다. 그러나 동료와 친구는 무엇이 다른지 아세요? 동료는 떨어져있으면 안봅니다. 친구는 떨어져 있어도 보고싶습니다. 

동료는 같이 있기 때문에 매일 만납니다만, 그 회사 그만두면 거의 안만납니다. 그러나 친구는 어때요? 멀리 떨어져있어도 보고싶고 만나고 싶어요. 물론 동료의 관계가 친구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부분 동료가 자동적으로 친구가 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친구란 어떤 수준인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잠언18장에 보면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그랬어요. 

부부가 20년 정도 믿음으로 살면 이 믿음의 친구 수준이 된다고 믿습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 지체들끼리 믿음으로 교제하다보면 이 믿음의 친구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믿음의 친구는 어떻게하면 만들어지는가?


첫째, 믿음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그의 어려움을 보고 그의 편에 서주는 것입니다.

오늘 1절부터 보면 다윗과 요나단이 좀 논쟁을 벌입니다. 요나단, 왜 늬네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죽이려고 하냐? 요나단이 입장이 난처하죠. 그렇지 않을거야, 왜 우리 아버지가 너를 죽이려고 하겠냐? 그래서 다윗이 4절 이 말을 합니다. 요나단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 말할까? 나와 죽음 사이가 지금 한발짝 상간이다! 요나단이 다윗의 얼굴표정을 보고 아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구나 깨닫습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억울한 일을 만났거나 누가 힘든 시간을 만났을 때, 우리가 그 상황을 당하는 사람이 느끼는 대로 정확히 느끼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왜 그래요? 서 있는 입장이 달라서 그래요. 다윗은 사울왕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것을 분명히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물이라 그래요. 그래서 누가 나를 찍어서 미워하면 금방 그 분위기가 몸으로 전달됩니다. 

요나단이 처음에는 다윗만큼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은 이거예요. 아니 설마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나쁜 짓을 할까? 아니 다윗이 무슨 죽을 짓을 했다고 그래? 이해가 가지 않는 거예요. 여러분 누가 내 당한 상황을 나만큼 알아주지 못할 때 너무 이상해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의 입장과 내 입장이 그만큼 달라요. 

그런데 요나단이 다윗에게 믿음의 친구인 증거는 뭔가? 정말 다윗이 당하고 있는 문제가 뭔지 알아보려고 결심을 한 것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믿음의 친구가 안되려면 대충 안부만 물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냥 간단한 위로 정도만 하면 됩니다. 요나단은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 사울왕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아버지의 의도를 확인합니다. 정말 다윗을 죽일 결심을 한 것인지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 의도가 확실하다면 다윗이 사울의 궁전을 떠나 탈출하도록 도울 것을 결심합니다. 함께 있어준다는 것은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 피할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리고나서 아버지 사울 앞에서 다윗이 당하는 고통의 편에 섭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엄청나게 욕을 얻어먹습니다. 30절을 봅니다. 패역무도한 계집의 자식아! 이건 사울이 너무나 화가 났다는 거예요. 자기 부인까지 들먹입니다. 사울이 볼 때는 요나단이 너무 멍청하고 상황파악을 못하는 겁니다. 저런 바보같은 자식!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데? 저는 생각도 없이 다윗의 편에 서? 

그런데 요나단의 생각은 다릅니다. 다윗이 지금 억울한 상황이다, 다윗이 지금 곤궁에 처해있다, 내가 다윗의 편에 서자! 이게 믿음의 친구예요. 누군가가 어려움에 처해있고 내가 그 사람과 지리적으로나 관계적으로 가까운 관계나 위치에 있게 되었을 때, 그때가 믿음의 친구가 되기에 최적의 상황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보고 이 사람의 고통에 함께 있기를 원하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맞습니다. 내가 왜 수많은 사람 중에서 지금 어려움에 빠진 이 사람의 친구일까? 왜 내가 이 사람 목장식구일까? 왜 이 사람이 우리 집에서 가까이 살게 되었을까? 

우리가 전도할 때 VIP에게 가장 좋은 전도의 태도는 뭔가? 이렇게 믿음의 친구가 되어주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당하고 있는 고통에 내가 함께 서보자! 지금 이 사람이 영적으로 고통 중에 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외부적 상황이 어떠냐가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 사람이 나보다 지위가 높은가? 연봉이 많은가? 집이 더 큰가 이게 문제가 아니예요. 그는 영혼이 지금 수렁에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그 사람에게 다가가든지 간에 그분이 느낀 것이, 아 이 사람이 지금 나와 함께 있어주는구나! 내가 힘든 이 상황에 이 사람이 나와 같이 있구나! 이 느낌이 들면 그가 마음문을 열게 됩니다. 또 대부분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택하시고 그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고 하실 때는 대부분 그 사람이 어떤 어려움 속에 빠집니다. 어려움에 빠지지 않고 일이 완벽하게 잘 되어가고 있는 판에, 아 내가 하나님앞에 나가야겠다, 이렇게까지 지혜로운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위급한 일을 만나고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고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그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찾는 마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이 낮아져 있는 그에게 와서 함께 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으로 인하여 복음에 마음을 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라고 했고, 한 지체가 고통을 받을 때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한다 이것이 믿음의 친구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의 친구가 되어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모를 때,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방황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길을 못찾고 어두움 속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하늘 영광을 버리고 우리 고통을 함께 하시려고 이땅에 오십니다. 우리는 지옥에 가게 되어있었어요. 죽음의 형벌 속에 있었어요. 그런데 주님이 내가 너의 고통을 대신 담당해줄게, 그러고 십자가 위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나의 고통을 함께 해준 정도가 아니라 그가 대신 고통을 져주신 것입니다. 내가 우리 주님의 그 사랑을 알고 깨닫고나면 이제 내 옆에 있는 그 사람 고통 나도 함께 있어주고싶다 이 정도 마음이 생겨요. 바나바라는 이름은 본래 본명이 아닙니다. 바나바는 격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그냥 사람들이 뭘 힘들어하고 누가 혼자 있는지 은사가 기가막힌 사람이예요. 특별히 힘든 사람을 찾아내어 함께 해주는 은사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나바가 한 일 중에 최고의 일은 사울이 바울 되기 전 다메섹에서 회심하고 난 이후에, 바울 편이 되어준 일입니다. 

그때 사울은 예수믿는 자를 잡아다 죽이고 가두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그 사울이 회심했다는 소문이 진정으로 믿겨지지 않았을 때, 바나바가 사울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다 듣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열두 사도들께로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렇게 회심했다, 내가 다 들어봤는데 진정한 회심이다, 말해줍니다. 


둘째, 믿음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내 유익보다 앞에 놓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깨달은 하나님의 뜻은 뭔가? 이스라엘 다음 왕은 내가 아니다 이겁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어 이 나라를 세우시려 하신다 이것입니다. 요나단이 이 문제를 가지고 한번도 고민해보지 않았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요나단의 고민을 기록하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확실히 정리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이 문제 가지고 오래 끌지 않아요. 내가 다윗보다 뭐가 못해서 왕이 되지 못해? 왜 다윗이야? 우리 아버지가 왕인데? 이 마음이 없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요나단은 다윗에게 믿음의 친구가 된 증거는 자기의 이해관계를 하나님의 뜻보다 먼저 놓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물려받을 수도 있는 왕위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는 다윗을 살려주고 도와주면 자기의 왕위는 물건너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기꺼이 그 희생을 감수합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둘 사이에 언약을 맺는 장면을 볼까요? 

11절을 봅니다. 16절까지 요나단이 다윗에게 자기 결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으로 반드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실 것을 진심으로 빕니다. 요나단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으로 자신의 생명과 자기 후손의 안전을 다윗에게 요청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선언이 나옵니다. 15절 16절, 다윗의 원수를 하나님께서 없애버리시리라, 다윗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시리라! 

여러분 이 말에 담긴 뜻을 파악하셨나요? 다윗의 원수는 지금 누굽니까? 사울입니다. 내 아버지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반역하고 있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 비록 내 아버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면 하나님이 없애시리라, 이 맹세를 울지 않고 했을 리가 없습니다. 다윗이 이 요나단의 맹세를 아무 생각없이 듣고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너무나 황망하고 너무나 미안한 언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가 압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울의 궁전에 보내 지도자의 정체성을 갖게 하십니다. 그리고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핍박의 훈련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면 사울의 궁전에서 다윗이 죽음의 위기에 몰릴 때 다윗을 죽음에서 탈출하게 하려면 누구를 사용할 것인가? 그래, 요나단이다! 이게 하나님이 정하신 뜻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에게 다윗을 그토록 좋게 보고 사랑하는 마음이 들도록 하십니다. 

다윗이 어려움에 빠지는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고 다윗이 어려움에서 누군가에게 도움받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그 일을 해낼 수 있고 할 마음이 있고, 유일한 자격과 능력이 되는 사람이 왕자 요나단입니다. 그런데 그 요나단이 자기 이해관계, 이해득실을 따져서 이 문제를 바라봤다면 어땠을까요? 왜 내가 다윗을 세워주고 난 역사의 뒤안으로 가야돼? 내가 봉이야? 이렇게 자기 유익을 앞세워 다윗을 세워줄 마음을 던져버렸다면 요나단은 바로 그 존귀한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을 기회를 던져버리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바로 이 복잡한 심리테스트에서 함정에 빠지지 않고 합격합니다. 이 거룩한 하나님의 일에 자기가 쓰임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꽉 붙잡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을 왕으로 세우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 지점이 우리가 오늘 고민하고 결단할 부분인 것을 아십니까? 누가 나에게 믿음의 친구가 될 것인가? 누가 자기 이해관계를 버리고 나를 세워주고 나를 이해해줄 친구로 찾아올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오늘 말씀을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렇게 가르치시니까, 어떤 사람이 칭찬들으려고 내 이웃이 누굽니까? 라고 물어요. 

그런데 그 질문을 주님이 들으실 때,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고 나를 그만큼 아껴줄 이웃을 찾으면 됩니까? 이런 태도예요. 그래서 주님이 강도 만난 사람 얘기를 합니다. 그 강도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는데 제사장이 그냥 지나갔다,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다,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쓰러진 사람을 찾아가 자기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비를 부담했다, 이 강도만난 자에게는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우리는 요나단과 다윗이 그렇게 믿음의 친구였다는 것을 들을 때 자연히 나한테 그렇게 잘해주는 친구는 누굴까? 난 그런 친구가 없네!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요나단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은 뭔가? 내가 누구에게 믿음의 친구가 되어줄 것인가 이것입니다. 

목장 안에서 목자가 목원들에게 믿음의 친구가 되기를 결심할 때, 내가 목장식구들을 먹이는데 오늘 얼마를 썼나 하나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하여 저들이 힘있게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확신이 들면, 그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내가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힘을 쏟는 것이 하나도 손해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목원 여러분이 목자와 목녀에게 믿음의 친구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정말 목장모임에 올 수 없는 상황인데도, 결사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하고싶은 일이 그 시간에 있는데, 내 이해관계를 떠나 영혼구원하여 제자삼는 주님의 뜻을 앞세워 그 일을 제끼고 달려오는 것입니다. 이게 목자 목녀한테는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몰라요. 목원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큼 목자에게 뿌듯한 일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 보다 목사에게 기쁜 일이 없어요. 

오늘 요나단은 다윗과 헤어지면서 많이 웁니다. 41절 보면 둘이 끌어안고 울었다 그랬어요. 다윗이 더 서럽게 울었다, 왜 그랬을까요? 요나단 이 친구의 사랑과 희생이 너무해서 그래요. 두 사람은 오늘 이후 만나지 못합니다. 요나단 정말 죽을 때까지 다윗이 너무 보고싶었을 거예요. 그러나 비록 만나보지 못했더라도 다윗에게 영원한 믿음의 친구는 요나단이었습니다. 

다윗의 고통을 보고 그 고통의 현에 온 몸으로 섰던 요나단입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하나님 뜻임을 알고 자기 모든 이해관계를 던진 

요나단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누군가에게 믿음의 친구로 한번 살아보십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