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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 대신 사람을 얻다 (삼하 2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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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대신 사람을 얻다 (삼하 23:13-17)


[수확을 시작할 때에, 블레셋 군대가 르바임 평원에 진을 친, 삼십인 특별부대 소속인 이 세 용사가 아둘람 동굴로 다윗을 찾아갔다. 그 때에 다윗은 산성 요새에 있었고, 블레셋 군대의 진은 베들레헴에 있었다. 다윗이 간절하게 소원을 말하였다.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나에게 길어다 주어, 내가 마실 수 있도록 해주겠느냐?” 그러자 그 세 용사가 블레셋 진을 뚫고 나가, 베들레헴의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바쳤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길어 온 물을 주님께 부어드리고 나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주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 그러면서 그는 물을 마시지 않았다. 이 세 용사가 바로 이런 일을 하였다.]

• 다윗의 용사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저는 다윗 왕의 일화를 중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살펴보려 합니다. 다윗은 여러모로 빼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인간적인 허물과 약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균형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은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닙니다. 헌신적으로 돕던 이들이 없었다면 그는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무엘하 23장 1-7절에서 다윗은 생애의 말년에 자신의 지나온 날을 돌아보며 자신이 이룬 모든 업적은 주님의 은총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만사에 아쉬움 없이 잘 갖추어 주시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어찌 나의 구원을 이루지 않으시며, 어찌 나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시랴?”(삼하23:5) 그는 이 믿음 하나로 살아왔다고 고백합니다. 필요할 때면 주님께서 영으로 일러주시고, 수렁에 빠져드는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때에는 반석이 되어 주시고, 모든 사람을 공의로 다스릴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 다음에는 다윗의 용사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을 읽다 보면 마치 삼국지의 영웅들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다윗의 휘하에 있던 장수들 가운데 우리에게 조금 낯설지만 최고의 장수로 손꼽히는 이들은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삼마입니다. 그들은 영웅의 풍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요셉밧세벳은 팔백 명과 싸워서 그들을 한꺼번에 죽였고, 엘르아살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이 모두 후퇴한 뒤에도 홀로 블레셋과 맞섰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군분투 했는지 나중에는 손이 굳어져서 칼자루를 건성으로 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삼마는 팥 밭 한가운데 버텨 선 채서 블레셋 군인들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고대의 승전비를 유심히 살펴보면 승전의 모든 공은 왕에게 돌리는 게 통례였습니다. 오직 왕만이 이름을 가진 전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영웅은 다윗이 아니라 이 장수들입니다. 물론 성경은 그 승전의 배후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지만, 다윗의 지도력에 대한 찬가조차 없습니다. 18절부터 39절까지는 다윗의 삼십인 특별부대에 속한 장수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는데, 그 마지막에는 다윗이 자신의 불륜을 은폐하기 위해 사지에 내몰았던 우리야의 이름도 등장합니다. 

늘 읽는 성경이지만 새삼 놀라웠습니다. 성경 기자는 왜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는 것일까요? 왕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고 있던 시기에 절대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요? 다윗은 물론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도 역시 하나님의 뜻에 종속된 존재일 뿐임을 성서 기자는 상기시키고 싶은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뜻은 왕이나 국가 이데올로기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일관된 메시지입니다.

• 주의 말씀은 영원하다

베를린에서 조금 떨어진 작센하우젠(Sachsenhausen)은 나찌의 수용소가 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1936년 나찌는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을 준비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유대인, 집시, 반체제인사들, 전과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수용소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나중에는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수용소에는 나찌 친위대가 운영하던 감옥도 있었습니다. 반체제인사들이 그곳에 수감되었습니다. 비좁은 독방의 창문에는 나무 가리개가 덮여 있어 수감자들이 빛을 볼 수 없도록 해놓았습니다. 감방 창문 바로 옆에는 고문대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수감자들은 동료들이 지르는 신음과 비명을 들으며 똑같은 아픔과 공포를 느꼈을 겁니다. 독방에는 그 방에 수감되어 있던 이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습니다. 죽 둘러보며 가다가 저는 문득 낯익은 이름과 얼굴과 만났습니다.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목사였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그는 독일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나찌가 등장하면서 애국주의의 광풍이 독일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을 때 그는 히틀러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가를 일찌감치 꿰뚫어보았습니다. 그는 1934년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바르멘에서 열린 회의에서 칼 바르트와 더불어 바르멘 신학 선언(Barmer Theologische Erklärung)을 이끌어낸 장본인입니다. 그 선언문은 6개조로 되어 있는데 제1조는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종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계시’라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속뜻은 히틀러를 맹종하는 것은 신앙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입니다. 

그 선언문을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이들의 모임이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입니다. 그들은 히틀러에 동조하는 독일 국가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이었습니다.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도 고백교회의 산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고백교회에 속한 교회와 목회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너무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추방, 투옥, 살해 위협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어느 때나 신앙을 올곧게 지키며 살려는 이들은 어려움을 겪게 마련입니다. 바르멘-부퍼탈(Barmen-Wuppertal)에는 고백교회운동을 기념하는 조그마한 조형물이 서 있습니다. 앞에는 히틀러를 향해 오른손을 들어 열렬히 인사하는 군중들이 보이고 뒷면에는 등을 돌린 채 성경을 펼쳐 읽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새겨진 조각입니다. 그 아래에 ‘주의 말씀은 영원하리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그 소수의 사람들이 독일의 양심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는 체제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다가 나찌 친위대의 감방에 유폐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고난과 역경도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자 하는 그의 양심을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독방에 걸린 그의 사진을 보는데 마치 이명처럼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뜻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 다윗이라는 사람

그런데 성경은 다윗이 하나님의 뜻에 종속된 사람임을 강조하지만 그의 인간적 덕성을 칭찬하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자기감정을 숨기지 않는 소탈한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선 것으로 보아 이 사건은 다윗이 절대왕권을 수립하기 훨씬 전의 일일 겁니다. 수확철은 언제나 전쟁의 시기였습니다. 수확물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곤 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군대가 베들레헴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적의 수중에 떨어진 고향이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나에게 길어다 주어, 내가 마실 수 있도록 해주겠느냐?” 하고 말합니다. 부하들의 충성심을 떠보려고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그냥 해본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삼십인 특별 부대에 속한 이들 가운데 세 명의 장수는 다윗의 그런 탄식을 명령으로 받아들이고는, 블레셋 진을 뚫고 나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바칩니다. 

보기 드문 충성이고 용기입니다. 죽기로 작정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을 통해 그들이 새 삶을 얻었기 때문일 겁니다. 성경은 그들이 사울에게 쫓겨 ‘아둘람 동굴’에 피신하고 있던 다윗을 찾아갔다고 말합니다. 사울은 왕으로 기름부름을 받았던 때의 첫 마음을 잃은 채 전제왕권을 수립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다윗은 잠재적인 적으로 분류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가 아둘람 굴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압제를 받는 사람들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삼상22:2)이 모두 다윗에게 몰려왔습니다. 다윗은 어려움에 처해 있던 그들을 세심한 사랑으로 돌보아 주었습니다. ‘뿌리 뽑힘’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연대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골육지친처럼 대했습니다. 그 사실을 몸으로 체험했기에 세 장수는 다윗을 위해 사지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 성례전적 상상력

다윗은 휘하 장수들이 떠온 물을 차마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피와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물 한 잔의 유혹 때문에 부하들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다윗은 아뜩해졌습니다. 다윗은 그 물을 주님께 부어드리면서 말합니다. “주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17) 

이 대목을 보면서 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제가 어찌 감히’라는 구절입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을 다윗 되게 한 마음입니다. 그는 부하들의 헌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살면 천국이고, 이 마음을 잃어버리면 지옥입니다. 다윗이 물을 땅에 부어 주님께 바치는 순간, 그 장수들의 가슴에 감동이 찾아들었을 것입니다. ‘아, 우리를 이렇게도 아끼시는구나!’ 그들을 묶었던 연대의 끈이 더욱 튼실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저는 연저지인吮疽之仁이라는 고사를 떠올리곤 합니다. 전국시대 초기에 위魏나라 장군 오기吳起는 문후文候의 명을 받아 진秦나라를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총사령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타지 않았습니다. 등에는 개인용 식량과 의복을 짊어지고 병사들과 똑같이 행군하고 바닥에서 잠을 잤습니다. 어느 날 등에 악성 종기가 나서 고생하는 병사를 보고는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 고쳐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인편에 듣게 된 병사의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이웃들을 보고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몇 해 전 그 애의 아버지도 전쟁터에 나갔는데, 등에 종기가 나자 오기 장군이 고름을 빨아내 치료해 준 적이 있었어요. 남편은 장군에게 깊은 은혜를 입었다며 앞장서서 싸우다가 죽고 말았지요. 그런데 이제는 아들이 장군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그 애도 장군을 위해 죽기 살기로 싸우다가 죽게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 내가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 어머니의 심정을 아시겠지요? 

이 대목에서 저는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윗 이야기를 마감하면서 성경 기자는 왜 다윗의 활동 초기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요? 꼭 소개되었어야 할 아름다운 이야기를 빼놓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요? 아니면 다윗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일화였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다윗이 인구조사를 명함으로써 주님의 진노를 사는 24장의 이야기는 감춰져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 첫 마음을 잃지 말라

저는 여기에도 역시 성서 기자의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하들에게 자기의 속내를 털어놓는 소탈한 다윗의 모습, 부하들이 목숨을 자기 생명처럼 소중히 여겨 그들이 떠온 물을 하나님께 부어드리는 다윗의 모습이야말로 이스라엘의 목자다운 모습임을 넌지시 일깨워주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뿐만 아니라 무릇 왕이 된 모든 이들에게 기대되는 모습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히브리어로 왕을 뜻하는 단어는 ‘멜렉Melek'입니다. 이 말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 ‘몰렉 Molek'입니다. 몰렉은 암몬 사람들이 섬겼던 국가신인데, 사람을 제물로 받곤 했습니다. 그런데 멜렉이 몰렉으로 인식될 때가 많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사람들을 핍박하고 착취하고 생명을 아끼지 않을 때 멜렉은 몰렉으로 변하고 맙니다. 

성경이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마감하면서 오늘의 본문을 삽입한 것은 왕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생명에 경중은 없다는 것, 모두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 지도자들은 그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성경은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아끼는 것이야말로 지도자의 덕목입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생명을 함부로 희생시키는 것은 어떤 대의명분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은 9.11 참사가 벌어진 지 1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세상은 이전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 되었습니다. 종교적 신념이 무엇이든, 이데올로기적 입장이 무엇이든,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평화와 갈등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생명과 평화의 길을 선택할 용기가 우리 속에 임하시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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