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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때'의 차이 (학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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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의 차이 (학 1:1-11) 

초대 교회 가운데 안디옥 교회라는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을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였다면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을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세계 선교에 앞장섰던 교회였습니다. 안디옥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한 가정에서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며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도들은 안디옥 교회에 사역자를 파송하기로 결정하고 바나바를 보냈습니다. 바나바는 다소라는 도시에 머물고 있던 바울을 찾아가서 그를 설득해 함께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안디옥에서 열정을 다해 목회를 했고, 교회는 놀랍게 성장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한참 힘을 받아 성장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사역자인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떼어 선교사로 파송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깜짝 놀랐고 당황했습니다. 

어려웠던 안디옥 교회가 이제 막 성장하며 안정되어 가고 있는데 성령께서 영적인 지도자인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떼어 선교사로 파송하라니 당황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명령에 ‘하나님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닌 것같습니다. 이제 안디옥교회가 막 성장하고 안정을 찾아가는데 바나바와 바울을 다른 곳으로 떠나 보낸다면 안디옥교회는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교회가 조금 더성장하고 안정되면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지 않으셔도 저희들이 알아서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그럴 때가 아닙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금식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명령이 자신들의 생각과는 다르지만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문제에 있어서 안디옥교회 성도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자기 교회의 상황을 중심으로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복음의 세계화를 중심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안디옥 성도들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때’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하나님은 ‘아니,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사 파송을 기점으로 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 품으시는 세계 선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구약 이사야서 55장 8-9절에서 하나님은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보통 ‘때’를 말하면 시계를 중심으로 한 시간적인 개념이 있습니다. 열차시간, 출근시간, 식사 시간 등과 같이 시계를 중심으로 하는 개념입니다. ‘때’의 또 다른 개념은 상황을 중심으로 하는 개념입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어떤 사람이 웃으면 ‘지금이 웃을 때입니까?’라고 말합니다. 전쟁터에서 ‘지금은 모두가 죽을 각오로 임해야 할 때입니다’라고 말하면 이 때는 전쟁의 심각한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황을 중심으로 한 ‘때’는 시계보다도 정확한 판단력과 통찰력을 필요로 합니다. 상황의 ‘때’에 대한 판단과 통찰력이 흐려져 자기중심적으로 결정하면 일을 그르칠 수가 있습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상황의 ‘때’를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큰 역사를 이뤘다면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에 대한 판단이 흐려져서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를 통해 ‘때’의 개념을 바르게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의 세계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가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꿈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고국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재건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멸망당하고 페르시아 왕인 고레스의 허락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갔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바벨론에서 죽고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그들의 2,3세의 후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부모님으로부터 들었던 고국에 대한 이야기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이스라엘 나라를 재건하고자 하는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감격과 함께 돌아온 고국의 현실은 비참했습니다. 성전과 성벽은 무너져 황폐해 있었습니다. 땅은 오래 동안 농사를 짓지 않아 잡목과 잡초로 뒤덮여 황무지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한숨 밖에 나오지 않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최소한 자신들의 가족이 머물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는 것과 당장에 먹고 살아야 하는 식량을 마련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는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고 다윗 왕이 다스리던 시대의 영화를 꿈꾸며 왔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꿈으로 끝나고 지금은 먹고 사는 문제, 생존의 문제가 더 급박했습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보다 자신들의 가족들이 들짐승과  차가운 밤이슬로부터 피할 수 있는 거처를 세우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제단을 쌓고 제물을 잡아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며 신앙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보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 더 급선무였습니다. 안식일에 거룩한 제사를 드리며 예배를 드리는 것도 좋겠지만 지금은 먹고 사는 일에 바빠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은 성전을 다시 재건할 때도, 제사를 위해 제물을 드리고 십일조를 드릴 때도, 안식일을 지키며 예배를 드릴 때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눈앞에 죽고 사는 생존의 문제가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그들의 생활을 탓할 수가 없었습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자리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거친 땅을 부지런히 개간해서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땅이 옥토가 되어 많은 수확을 거뒀습니다. 그들의 곡간에는 곡식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두 해 정도 가뭄이 들어도 크게 걱정하지 않고 먹고 살만큼 생활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허술하게 지었던 헛간과 같았던 집들도 이제는 좋은 목재를 구입해서 남부럽지 않은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생활이 어느 정도 여유롭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그렇게 다짐하며 꿈을 꾸었던 성전 재건과 제사를 드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며 어려운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은 아주 멀어졌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좋은 집을 장만하고, 먹고 살 수 있는 재산을 조금 더 쌓아 놓고, 자녀들이 다 성장하고, 노후에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기틀을 조금 더 마련한 후에 그 때에 성전을 재건하고, 예배도 제대로 드리고,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에게 ‘학개 선지자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대로 내버려 두면 저들이 죽어서 내 앞에 와서 고개도 못 들고 “하나님, 죄송해요” 라고 말할 때까지 아직 때가 아니라도 말할 것 같구나. 네가 저들에게 이미 때가 지났으니 돌아서라고  말하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 그들의 잘못된 ‘때’의 개념을 지적하며 돌아설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본문 2-5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은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며 헌신할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큰 집과 더 좋은 가구와 자녀들에게 더 좋은 것은 나눠줄 수 있은 상황이 되면 그때부터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헌신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지금은 아직 그 때가 아닙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아니다. 이제는 그 때가 되었다. 아니 때가 벌써 훨씬 지났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의 욕심과 더 좋은 환경을 만들고 싶어하는 욕심을 다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무리 수고해 보거라. 아무리 노력해 보거라 너희들의 그 욕심은 바닷물 같아서 갖고 가지면 더 가지고 싶어 하는 욕망에 빠져 그곳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바벨론의 정치적인 노예가 아닌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6절에서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또 9-10절에서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니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들이 돈을 더 벌기 위해 예배를 드릴 시간이 없고, 아직은 조금 더 큰 집을 사고 더 돈을 모아 놓아야 하기 때문에 십일조를 드릴 수 없고, 성전을 재건할 수도 없다고 말하는데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충족된 삶을 살고 있느냐? 너희들이 벌어들인 것만큼 쌓아 두고 있느냐? 도리어 상황이 더 어려워지고 삶의 자리가 더 힘들어 지지는 않았느냐? 그래 돈을 조금 더 모았더니 더 평안하더냐? 가정이 더 행복해지더냐? 너희 삶의 자리를 넓히며 아름답게 치장하는데 신경을 쓰면서 성전을 방치하지 말아라, 너희들이 먹을만큼 먹고, 입을만큼 입으면서 더 더 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를 소홀히 여기지 말아라. 생을 즐기는 곳에는 시간을 억지로 내어서라도 즐기면서 예배를 드리 일과 봉사하는 데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 말아라. 왜냐하면 나는 복의 주인이 되는 하나님이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시간과 물질은 남을 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과 물질은 가장 소중하게 느껴질 때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봉사이며 헌신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시간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귀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드리는 헌금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봉사와 헌신이 하나님께 감동이 되어야 합니다. 그 시간과 물질과 헌신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라는 ‘때’의 문제가 아닌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무엇보다도 우선순위로 여길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며 축복의 손을 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우리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기 시작하면 그 섬김 마저도 항상 불평과 원망이고, 힘들어 하고 아까워합니다. 그곳에는 진정한 하나님이 축복이 머물 수 없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와 핑계로 ‘하나님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라고 말하기 보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예, 하나님,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입니다’로 응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 흔들어 넘치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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