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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자유로..." (갈 5: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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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유로..." (갈 5:13-15)


'자유'란 인류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역사적으로 추구해 왔던 가장 고귀한 가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헤겔 같은 유명한 역사가는 세계사를 가리켜 '자유의식의 진보'라고 정의하기까지 했습니다.
실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외침은 이 땅에 태어나 살게 된 모든 사람의 의식 깊은 곳에 뿌리박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유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소중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귀한 자유에도 약점은 있습니다.
  
구소련의 작가 솔제니친은 그의 유명한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을 통하여 자유를 빼앗기고 사는 사람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후에 소련 당국으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고 미국에 와서 망명 생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자유 없는 사회에 살다가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에 와서 살게 되었던 솔제니친은,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달리 이 서구 사회에 대하여 큰 실망을 맛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언젠가 '자유롭게 살고 있지만 그 자유 안에서 방종하고 무분별한 이 서구 사회의 젊은이들을 볼 때 오히려 자유 없이 살고 있는 자기 민족을 생각할 때보다 더욱 큰 좌절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던 것입니다.
즉 솔제니친은 그처럼 좋은 자유이지만 그것이 남용되거나 오용될 때에는 방종과 무질서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체험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기독신자가 누리는 특별한 자유에 관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는 사실상 갈라디아서 전 장들을 통하여 맥맥이 흐르고 있는 주제인데, 이 자유 또한 결코 절제 없이 무분별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세속적인 자유의 경우와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신자 역시 자기가 누리게 된 자유의 성격이 무엇이며 그 자유 안에 있는 제한이 무엇이며 그 자유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발휘되어야 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만 이 자유를 제대로 향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 신자가 자신의 신앙생활 가운데서 누리는 자유란 세속적 의미의 자유와 어떻게 다른 것이겠습니까?
저는 오늘 이 시간 주어진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성도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란 과연 어떤 것인지를 세 가지로 나누어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자의 자유는 오로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자유입니다.

우리가 '기독신자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우선 이 사실부터 확실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13절 상반절에서 "13a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라고 사도 바울은 우리 신자들의 자유의 원천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You were called to freedom)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유를 위하여 무언가를 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유를 스스로 누리게 해 주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특히 '부르심을 입다'는 표현에 유의해야 합니다.
즉 이 자유란 사람이 스스로 노력하고 투쟁해서 얻은 자유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자유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불러 주심으로써 그 결과 우리가 저절로 누리게 된 자유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자리에 있었을 때에 하나님 편에서 먼저 그 주도권을 발휘하셔서 은혜를 통하여 우리를 택하여 소명해 주신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서 우리 스스로는 그 어떤 길로도 획득할 수 없었던 자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심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된 자유란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자유입니까?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하나님께로부터 죄 용서함 받기 위해 사람이 어떤 합당한 공로를 내놓아야만 했던 그 무거운 속박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우리 대신 죄값을 치르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얻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스스로 자유를 얻었다.'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너희를 부르셔서 너희로 하여금 자유롭게 만들어 주셨다.'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신자의 자유란 이처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우리에게 공짜로 주신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베풀어 주신 구속의 은혜를 뜨겁게 깨닫고 진심으로 고백하지 않고서는 이 신자의 자유란 것을 누리기는커녕 논할 수도 없음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생활이 사람에게 자유를 가져다주기보다는 속박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기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죄의 속박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죄의 값인 사망으로부터 해방시킨 이 놀라운 자유를 체험하지 못할 때 사람은 그런 오해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의 눈에 기독교란 사고의 자유, 행동의 자유, 시간과 물질을 마음대로 쓸 자유를 빼앗아가는 종교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죄로부터 해방된 구원의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격과 감사부터가 전혀 없으니 그런 사람에게 교회생활이란 '주일을 반드시 성수해야 하고 십일조를 반드시 떼어서 바쳐야만 하는 것'이 지극히 부담스러운 속박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비록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진짜 자유를 전혀 맛보지 못하고 있는 실로 부자유스러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불신자는 본질적으로 아직 죄의 무거운 멍에를 지고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 있는 기독신자'야말로 참된 자유란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무엇보다도 죄의 속박이 주는 무거운 고통으로부터 해방 받은 자유를 몸소 맛보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전에는 죄의 사슬에 매여 있다가 이제는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가 되어서 '주의 은혜 사슬 되사 주께 매인 바 된 자'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자인 것입니다.
인간이 투쟁을 통해 스스로 쟁취한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통하여 거저 주신 구원의 자유를 누릴 줄 알아야 사람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자의 자유는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오용되어서는 아니 될 자유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유를 온전히 누리고자 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원칙입니다.
바로 본문 13절 중간에 기록된 "13b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라는 경고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육체"라고 말하는 것은 꼭 신체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영적이 아닌 것'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것' 등을 가리켜 쓰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원죄의 본성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것은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사람에게 유전되어 내려 온 것입니다.
  
이 악한 본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 본위의 사고와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근본 원인입니다.
또한 "기회"라는 말은 원래 헬라어에서는 군대 용어로서 '공격 개시선' 혹은 '작전 기지' 따위를 의미하는 단어였는데, 그런 뜻이 조금 확대되어 '유리한 지점' 혹은 '기회' 등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단어를 이어서 생각해 보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의 자유를 자기의 '악한 본성'대로 살려고 하는 '좋은 기회'로 악용하기 쉽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원래부터 사람에게는 악한 생각과 행위를 따라 자기중심으로 살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성화의 완성에 이르기까지는 여전히 남아 있기 마련인데, 바로 그런 악한 본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마저도 죄짓는 기회로 악용하려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면 내 마음대로 죄를 좀 짓고 살아도 되지 않겠느냐?'하는 식으로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죄를 짓기 위한 '작전 기지'와 '절호의 기회'처럼 여기는, 실로 간교하기 짝이 없는 '악한 본성의 발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우리도 전에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딛 3:3)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처럼 '자유를 죄를 범하는 핑계로 삼는' 사람이라면 이미 자유자가 아니라 여전히 종으로 남아 있는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성도의 자유는 "죄로부터의(from sin)" 자유이지 결코 "죄를 향해 갈 수 있는(to sin)" 자유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자유는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아 그 하나님 앞에 마음대로 나아갈 수 있게 된 자유이지, 나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 속으로 마음대로 파묻힐 수 있는 자유를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자유란 '모든 것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자유는 우리의 당연한 '권리'로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운전면허 필기시험 교재에 보면 "운전은 권리(right)가 아니라 특권(privilege)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운전면허란 모든 사람에게 당연히 주어져야 할 '기본 권리'가 아니라, 교통법을 따르기로 약속하고 안전한 운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부여된 '특별 권리'이며, 따라서 그 법을 지키지 않거나 운전 능력이 떨어지게 되면 다시 박탈될 수도 있는 권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도로상에서 '제 마음대로' 달리라고 주어진 권리가 아니라 '정해진 법규 안에서만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것이 바로 운전면허가 그 면허소지자에게 주는 특별한 자유인 것입니다.

비단 운전면허뿐 아니라 다른 세속적 자유들 역시 '무제한의 자유'는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신 자유 역시 '권리'가 아니라 '특권'일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 기독신자의 자유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규범을 지키는 성도만이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유이지 결코 '자기 육체를 위한 기회'로 오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늘 잊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신자의 자유는 성도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발휘되어야만 하는 자유입니다.

신자의 자유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인 까닭에 자기 육체를 위해 쓰일 수 없는 것이라면 과연 그 자유는 무엇에 쓰라고 주어진 것이겠습니까? 
바로 본문 13절 하반절로부터 15절이 대답해 주기를 "13c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기록했습니다.

신자의 자유는 신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데에 그 전부가 집중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 "종노릇하라"는 말은 헬라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입니다.
즉 이 말은 '서로 봉사하라'나 '서로 도와주어라'는 정도의 뜻이 아니라, 그야말로 '상대편 앞에서 자신은 종이 되어서 섬겨라'는 말입니다.
신자에게 주어진 자유 때문에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는 더 이상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이제 사람 앞에는 더 이상 '사랑 없이는' 나아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살게 되면 그 사람은 참으로 "율법을 이룬"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있다고 확증하신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참된 이웃 사랑은 당연히 참된 하나님 사랑으로부터만 비롯될 수 있는 것이므로, 후자를 실행한 사람은 자연히 모든 율법을 이룬 자가 된다는 논리가 성립될 것입니다.

이처럼 '법' 안에 있는 참 뜻 즉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고, 법을 외우기만 하고 법의 조문만 내세우는 사람들은 자연히 그 법을 가지고 서로 싸울 수밖에 없게 되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갈라디아교회 내부에는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많은 분쟁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교회 안에 많이 생기게 되었을 때 그 안에서는 그야말로 "서로 물고 먹는" 싸움이 일어났던 것이었습니다. 
교인이라는 사람들까지 문자 그대로 짐승과 짐승이 서로 먹고 먹히기 위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그런 싸움을 싸우다가 '피차 멸망하게 될까 조심하라'고 경고했던 것이었습니다.

교회 내의 싸움은 대체로 그 교회 안에 스스로 법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잘 생기고 더 심각해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런 싸움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무엇이 옳으냐?'를 가리기 보다는 '누가 옳으냐?'라는 쟁점으로 바뀌기 십상입니다.
즉 그 논쟁의 이슈 그 자체보다는 그 논쟁하는 자들의 '자기'가 그 논쟁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고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싸움의 당사자들은 그것을 두고 자신의 '신앙양심 자유의 발로'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양심의 자유를 발휘하는 성도는 결코 그 자유를 피차 '물어뜯고 먹히는' 지경에 이르도록 사용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신자의 자유는 결코 '서로 싸우는 자유'가 아니라 오로지 '서로 섬기는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로 놀랍고도 오묘한 역설(paradox)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자유로워졌습니다.
더 이상 죄로 인하여 얽매이고 마귀 아래 종이 되어 고민할 필요는 없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신에 다른 성도와 이웃 앞에서는 오히려 '자유를 잃은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까닭에 이제 다른 사람 앞에서는 더 이상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고 오직 '사랑으로써만 섬겨야' 할 멍에에 묶이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신비하고도 고상한 자유이겠습니까?
세상의 자유에는 '남을 위해 섬겨야 하는 의무'란 결코 포함될 수 없습니다. 
법에 저촉되지만 않으면, 남을 해롭게 하지만 않으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의 자유는 '내 마음대로 살기 위한' 자유가 아니라 '마음껏 교회를 섬기고 힘을 다해 성도를 사랑하고 부지런히 이웃을 돕기 위한' 아주 특별한 자유인 것입니다.

죄수는 이웃에게 선한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부터가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주신 이유도 바로 그와 똑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전에 마귀에게 묶여 있던 속박에서 완전히 풀려나게 된 이 귀한 자유를 이제는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데에만 100퍼센트 사용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자유란 실로 고귀한 것이지만 그 자유의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이것처럼 사람을 망치게 하는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역시 '민주화 운동'을 통하여 지금은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소중한 자유가 지금은 공산주의자들까지도 마음대로 큰소리를 칠 뿐 아니라 법치국가의 질서까지 제멋대로 파괴하는 자유로 오용되고 있는, 실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우리가 목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외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유로운 줄 알지만 실제로는 속박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고의 자유, 언론의 자유, 행동의 자유, 생활의 자유, 사랑의 자유들을 목청 높이 외치고 있는 자들이 실제로는 그 자유라는 것 안에서 오히려 자기 자신의 구미와 욕구와 정욕의 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참된 자유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람의 진짜 자유는 오직 '예수 안'에서만 깨닫고 얻고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성경만 가르쳐 주는 실로 신비하고도 차원이 높고 완벽한 자유입니다.

사람들은 어디 '안'에 들어가면 곧 자유가 없어지는 것인 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기차를 타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는 사람은 어디나 자유로이 갈 수 있는 사람 같지만 사실상 그의 발걸음은 완전히 속박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해외여행의 설레는 가슴을 안고 비행기 표를 쥐고 있는 사람도 정작 비행기에 올라타기 전까지는 여전히 부자유스러운 사람인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차 안에, 배 안에, 비행기 안에만 들어가게 되면 더 이상 그것을 놓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니 그 안에서는 정말 마음 편안합니다.
이제 그 차나 배나 비행기에서 다시 내리지 않는 한, 그저 '그 안'에만 있으면 목적지까지 분명히 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까지 그 안에서 자든지 먹든지 책을 읽든지 영화를 보든지 정말 완벽하게 자유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안'에 완전히 들어가게만 되면 그와 똑같이 정말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도 아직도 완전한 자유를 맛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 예수님 '안'에 완전히 들어가지 않고 그 '가장자리'에서 어물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차 범퍼에 매달려 끌려가는 사람이나 배의 닻줄 따위를 붙잡고 끌려가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니 그 얼마나 부자유하겠습니까?
  
그런 교인에게는 주일성수나 십일조생활이 자기를 얽매어 놓는 속박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것을 정말 해야 하나 하지 말아도 되나 하고 고민하고 힘들어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은 예수님을 따라가기는 하는 것 같지만 아직 '예수님 안'에 완전히 들어가지는 못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예수님 안에, 그의 베푸신 크신 십자가의 사랑 안에 완전히 푹 빠져 들어온 사람은 정말이지 자유롭습니다.
부자유로운 사람에게는 어려운 선택처럼 보이는 일들이, 부자유로운 사람에게는 골치 아파 보이는 문제들이, 진정 예수님 안에 완전히 들어와 있는 사람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고, 매사가 그저 은혜롭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완전히 들어온' 신자는 '완전히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의 은혜로써 우리를 바로 이런 완벽한 자유를 누리도록 불러 주셨습니다.
이 자유 안에서 우리는 이제 자신의 죄로부터, 자신의 이기적인 정욕으로부터 해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자유를 이제 육체의 기회가 아니라 오직 교회와 성도와 이웃을 섬기는 일에만 발휘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실로 이 얼마나 놀랍고도 귀한 자유입니까?
이전에는 마귀의 감옥 안에 갇혀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슬에 매이게 되었고, 이전에는 자기 욕심에 스스로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는 오로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섬기는 종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하나님께로부터 바로 '이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게 된 줄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육체의 종노릇'하던 과거를 깨끗이 벗어버리고 오직 이 '예수 안에서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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