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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은 선택입니다 (마 7:13-14) - 좁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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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선택입니다 (마 7:13-14)

제가 첫 목회를 나갔을 때 일입니다. 교회에 승합차가 한 대 필요하겠다 생각되어 교육전도사 하던 교회의 한 집사님의 도움을 받아 중고 승합차(베스타)를 사게 되었습니다. 그 차를 가져온 날,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지금도 그 기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날 밤 잠이 안 왔습니다. 무엇을 소유한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몇 일 동안 마을 사람들이 이 차를 부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도 했습니다(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낡은 중고차였음). 그 차를 매일 세차도 하고 광을 냈습니다. 후에 그 차를 폐차시키고 소형차를 샀는데 그때도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지난 주중에 아이패드2를 부목사님들과 함께 장만했습니다. 이전에도 샀었는데, 다시 wifi와 3G가 다 되는 것으로 샀습니다. 새로운 기기를 사면 그것에 익숙해지는데 이제 오래 걸립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얻는다든지, 소유한다는 것은 기쁨이요,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 그런데 소유로 인한 행복은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으나 그것은 잠시라는 것과 또한 그 행복이 진정한 평안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후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소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행복을 원하기는 하지만 정작 행복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행복의 길을 알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 길을 선택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이런 현실은 각각 지식적인 면과 의지적인 면의 문제라 하겠습니다.  흔히들 그 무엇인가를 많이 소유하면 행복할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볼 때 사람은 그 무엇인가를 많이 소유했다고 해서 진정한 행복을 얻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물며 내가 소유하게 된 것이 정당한 방법으로 소유한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더욱 불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렇게 확신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소유에서가 아니라 내면의 깊은 평안에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부터 우리는 소유를 구하기보다는 평안을 구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평안이야말로 참 행복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남은 생애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13~14절)“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오늘 말씀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가장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누구든지 일단 주님 말씀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평안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좁은 문’, ‘좁은 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요10:9, 14:6).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살아갈 때에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음이 곧 평안이요, 행복이요, 영생입니다. 

어떤 분들의 간증입니다. 먼저는 심각한 부부 갈등으로 인해 이혼 직전까지 갔던 젊은 부부의 고백입니다. “왜 그렇게 싸웠는지 모르겠어요. 이제는 다 이해할 수 있고, 자족할 수 있어요. 요즈음 우린 행복해요”,  

또 사업상 몹시 어려워 파국 지경에 이른 한 사람은 “그렇게 어려워도 이상하게 마음이 평안합니다. 다른 믿지 않는 사람 같으면 자살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이 고통을 내가 받아야 한다면 받아야죠.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결국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죽음을 앞에 놓고 있는 시한부 환자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빨리 데려가시려나 봐요. 그렇다면 가야죠”, 

사실 우리 신앙인의 진가는 종말에 나타납니다. 마지막 임종 때에 그 사람의 신앙의 진면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죽음의 모습에는 무엇인가 메시지를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죽기 전에 동영상으로 최후의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 죽은 후 장례식을 진행할 때 그 동영상을 틀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무거운 분위기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김 장로님, 그 동안 참 고마웠습니다. 목회를 잘하도록 도와줘서 참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그런데 김 장로님 설교 시간에 하품 좀 하지 마세요”, 그 순간 조용하던 장례식장에 순간적으로 ‘와’ 폭소가 터졌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최 권사님, 그동안 참 고마웠고. 나를 위해서 불철주야로 기도해 주고 위로해 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 것 감사드립니다. 권사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을 것이오”하고 감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조객들에게 인사의 말씀도 합니다. “여러분, 나 먼저 갑니다. 부디 열심히 신앙 생활하시다가 이다음에 기쁘게 만납시다” 그러고는 손을 흔드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종말 모습입니까? 해학도 있고, 여유도 있고, 거기에 어떤 느낌을 주는 메시지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죽음은 모두 부정적인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죽음에 대해서 또 다른 느낌을 갖게 되고 신앙인의 멋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종말의 때가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즉, ‘좁은 문’에 들어선 자는 어떠한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 전능자이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처음이요 나중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신앙의 좁은 문으로 바로 들어서기만 하면 곧 놀랍게 변하여 절대 행복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들어서는 문이 좁다는 것입니다. 또 그 나아가는 길이 넓은 길이 아니라 처음부터 좁고 협착하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대체적으로 몇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좁은 길보다 넓은 길을 가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리입니다. 사람은 좀더 편안하고 쉽고 화려하게 살려고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려운 일 보다는 쉬운 일을 하려는 속성’도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3D 직종이라 해서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경향은 요즘 신세대들에게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힘든 일은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서비스업이나 술집에 들어가서 쉽게 일하며 편하게 살려고 합니다.  

또 사람에게는 ‘돌아가는 길보다 지름길을 가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원칙적인 길은 모두 돌아가는 길입니다. 보다 안전한 길은 모두 돌아가는 길입니다. 지름길은 편법입니다. 그 길을 가면 일시적으로는 쉽고 편리하지만 후에 가서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지름길이나 편법은 권장할 만한 길이 아닙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보기에 넓지 않은 길, 쉽지 않은 길, 지름길이 아니라 돌아가는 길, 그 길이 바로 좁은 문을 통과해서 가야하는 좁고 협착한 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태복음 5장에서 시작되는 산상수훈의 말씀에서 결론부분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인 13~14절부터 마태복음 끝까지의 말씀에는 세 가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두 개의 길, 두 개의 나무, 두 개의 기초에 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즉, 좁은 길과 넓은 길,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와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 반석 위에 세워진 집과 모래 위에 세워진 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들을 하심으로 산상수훈의 결론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들 중에서 오늘 말씀을 다시 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이 말씀에서 세 가지의 교훈을 생각해 봅니다. 

1.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시민으로서의 복된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이 말은 참된 길로 들어서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의롭다 함, 구원, 그리고 영생에 대하여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얻는다고 증거합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성경은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단순하며 간단한 말씀을 합니다.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원래 구원의 문은 아주 단순한 좁은 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단순한 사실이 지성인들의 상식과 이성, 합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너무 쉽고 단순하며 너무 유치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해가 되지 않으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들어가기 어려운 좁은 문이 된 것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도 구원의 진리가 너무 쉬워서 믿지 못하는 이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보잘 것 없는 지식의 교만을 던져 버리고 어린 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지 순례를 가서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님 탄생하신 곳에 성탄 교회가 세워져 있다죠? 그런데 그 교회는 창문이 없고 문은 한 개가 있는데 글자 그대로 좁은 문입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들어갈 수도 없고, 짐을 가지고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너무 좁아 단 한 사람만이, 그것도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감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2. 좁은 문은 좁은 길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문과 길에 관한 말씀입니다. 문으로 들어가야 길이 시작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서면, 좁은 길이 나옵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넓은 길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좁은 길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넓은 길에 대한 계속적인 유혹을 뿌리치고 계속해서 좁은 길에 굳게 서서 이 좁은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길을 걷는 동안 넓은 길의 삶 속에서 누렸던 습관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혀도 우리는 이 좁은 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신앙 생활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끊임없는 자기 극복의 훈련과 절제와 노력을 통해서 형성되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성화의 길이며, 경건의 길입니다. 

요즘의 시대, 즉 현대는 인스턴트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쉽게 성취하려고 하고, 행복도 쉽게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취와 행복이 정말 가능합니까? 그렇게 해서 얻은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참된 행복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모습은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말씀을 힘입어, 우리 자신의 계속적인 훈련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노력을 게을리 하고서는 생활할 수 없는 길이 신앙생활의 길입니다. 

유명한 음악가 루빈스타인은 말할 수 없이 많은 연습과 노력을 기울인 음악가입니다. 정말로 열심히 연습해서 그는 세계적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그가 무대에서 받은 각광과 영광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피나는 연습과 노력이 뒷받침되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루빈스타인은 종종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루만 연습을 거르면 내가 알고, 연습을 이틀을 거르면 내 친구가 알고, 연습을 사흘을 거르면 내 청중들이 안다”  연습과 훈련의 중요성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해야 하고 우리의 환경을 붙들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탐구하려는 애씀과 그리고 이 말씀을 날마다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려는 경건한 모습과 노력 속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며, 우리의 생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길은 좁은 것입니다. 


3. 그 문과 길의 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암시적인 교훈의 말씀을 놓치면 안됩니다. 주님은 두 개의 문이 있고, 두 개의 길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각각의 결과에 대한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표현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말임. “멸망”이라는 말은 사물의 좁아짐, 사물의 한계성, 모든 것의 갇힘 등을 암시함. 그 말은 소망이 결코 실현되지 않고 사람이 좁은 것 속에 갇혀 버린 그러한 생명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국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주 좁은 문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걷노라면, 계속해서 그 길이 넓어져서 결국에는 영원한 생명의 충만한 분량만큼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문을 통해서 들어가면, 처음에는 넓어서 가기가 아주 쉽지만 갈수록 그 길이 좁아져서 결국에는 멸망에 이르고 말 것이다” 

언젠가 (서대문지방) 교역자 목회계획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둘째날 낮에는 함께 산에 오르는 시간을 가졌는데 세미나에 참여한 분들 중에 반 수 정도가 목표한 곳까지 올라갔습니다. 끝까지 올라갔다 오면서 참 힘들게 땀흘리며 올라갔지만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이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로 행복감을 맛보았습니다. 정상 가까이 오를수록 펼쳐지는 산 아래의 모습이 장관이었고 단풍이 든 아름다운 모습은 땀흘려 올라간 사람만이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목표한 곳까지 올랐을 때의 그 성취감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한 자연 과학자가 ‘천잠나비’가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하는 과정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 나비는 번데기 안에서 꼭 바늘구명 만한 구멍을 하나 뚫어 그 틈으로 몸 전체가 나오기 위해 꼬박 한나절을 애썼습니다. 그렇게 애쓰고 애쓰면서 힘든 고통을 치른 후, 좁은 문을 통과하여 나비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든 이 과학자가 가위로 그 구멍을 조금 넓혀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나비는 쉽게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좁은 구멍으로 나온 나비는 영롱한 빛깔의 날개로 금방 팔랑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르는데, 넓은 구멍으로 쉽게 나온 나비는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그 무늬 빛깔도 곱지 않더랍니다. 그리곤 잠시 푸덕푸덕 날갯짓을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좁은 문의 신비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 모두는 안일과 불법과 거짓의 넓은 길을 버리고, 오히려 의와 경건과 진리의 좁은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 그 좁은 길을 걸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고통과 어려움의 길인 것 같지만 궁극적인 행복의 길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참된 행복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교훈입니다. 비록 좁은 문이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그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걸어가므로 종래에는 생명으로, 넓은 곳으로 인도되어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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