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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믿음에 거하라 (행 14: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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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믿음에 거하라 (행 14:20-28) 
 
 
오늘은 1차 선교여행의 돌아오는 길에서 있었던 일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죽도록 돌에 맞았던 바울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20b-21a). 가끔 힘겨운 순간은 잘 견뎌놓고서, 한숨 돌린 후에 믿음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한 결과가 이 모양인가?’ ‘바나바는 멀쩡한데 왜 나만 돌에 맞았을까?’ ‘하나님께서는 왜 내가 고통 받기 전에 막아 주시지 않으셨을까?’ 등의 회의적인 생각에 시달리며 고난 중에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비방의 말을 견디기가 힘겹지요. 특별히 징계 받을 만한 잘못 없이 받는 고난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무너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툴툴 털고 일어나 복음 전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자의 면류관이라 할 수 있는 많은 제자들을 붙여 주심으로써 그의 사역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환난을 겪으면서 점점 마음이 약해지고 믿음에 떠나는 사람들이 있지만, 어려움을 겪을수록 더욱 믿음이 견고해지고 하나님만 굳게 의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죽게 되었어도 그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뒤로 물러나지 않는 모습 속에서, 그를 강하게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손을 발견하게 만드는 사람들이지요. 교회사를 보면 복음은 이처럼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더욱 힘 있게 전파되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붙들어주심은 고난을 막아주는 형태로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큰 일 날 뻔했었는데 도와주셔서 위기를 모면케도 하시지만, 때로는 큰 일 났지만 강하게 붙들어 주기도 하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가는 길이 때로는 죽을 만큼 힘겨운 상황일지라도 묵묵히 걸어가야 할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붙들고 계시며, 머지않아 위로의 손길도 만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어야 하겠지요.

“더베” 동쪽에는 ‘길리기아의 문’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그 길로 가면 바울의 고향인 다소가 나오고, 해안으로 조금 내려가면 배를 타고 수월하게 안디옥에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일행은 지나왔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21b)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길은 멀고 험하고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전도자들을 변박하고 비방했던 곳이며, 순종치 않는 유대인들이 주민들을 선동하여 악감을 품게 했던 곳이고, 능욕하며 죽을 만큼 돌로 쳤던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택했던 이유가 22-23절에 나타나 있는데, 복음을 받은 자들을 굳게 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먼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22a)고 권면했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인 성도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견고하게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연약한 새순처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기 쉽고, 유혹에도 약합니다.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이지만 사도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핑계 삼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들의 믿음이 견고해지도록 도왔습니다. 이미 선포했던 복음을 해명하여 가르쳤겠지요. 1차전도 여행 후에 쓴 갈라디아서를 보면 이들 중에 속히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사람들이 생겼는데(갈 1:6), 그때는 서신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거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핑계로 자기 책임에 태만하지 않았지요.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강조합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견고해진다면 오직 자라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자라기까지 심고 물을 주는 자의 책임도 무시되지 않아야 합니다(고전 3:6). 제자들 역시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믿음에 거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내 욕심을 따라 살더라도 선택된 나는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실 것이라 생각한다면 성경을 오해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22b)고 권면했습니다. 이 말은 겪은 환난이 공로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권리를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반드시”(dei', 데이) 환난을 “통해서”(diav, 디아)라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만사가 잘 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환난”을 “반드시” 겪어야 한다는 말이 참 거북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4)고 하셨습니다.

본문은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환난을 겪을 것이며, 한두 번이 아닌 “많은 환난”이라는 사실만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서들에서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고 가르쳤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명하기도 했습니다(딤후 1:8b). 사도는 고난을 뺀 ‘값싼 복음’으로 사람들을 유혹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환난을 기꺼이 각오할 만큼 ‘값진 복음’이기에 고난 겪는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유독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b-27)고 고백했었지요. 하지만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딤후 1:12a)고 했습니다.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딤후 1:12b)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서도 출세하지 못했다고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믿음생활 중에 여러 가지 환난이 끊이지 않는다고 해서 고개 숙일 일도 아닙니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 성도에게 수치가 될 수 없습니다. 환난 때문에 복음이 확산되었고, 사도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옥중서신이 기록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그분의 지켜 주심을 확신하는 성도라면, 고난이 가져온 유익들을 생각하며 감사함이 마땅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 없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절한 고난이 있어야 이 땅에 것에 소망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사모하게 됩니다. 고난 중의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당한 이유를 낱낱이 아는 일도 아닙니다. 고난의 이유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어렴풋이 짐작되기도 하고, 욥처럼 끝내 그 이유를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성도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내가 믿는 분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의 지켜주심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묵묵히 그분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는 삶을 살 때,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의 가치를 드러내게 됩니다.

이렇게 권면한 후에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23)했습니다. 신약성경은 “장로들”을 “감독자”라 부르기도 합니다(20:17, 28; 딛1:5, 7). 따라서 이 장로들은 가르치는 직무를 맡은 장로, 곧 목회자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택했다’(ceirotonevw, 케이로토네오)는 단어는 거수나 투표로 임명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개척했지만, 초법적인 권위로 지목해서 임명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직분자를 선출하도록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나중에 목회서신에서 언급한 감독자의 자격을 따라 뽑도록 지도는 했을 것입니다(딤전 3:1-7; 딛 1:5-9). 뽑은 후에는 “금식 기도하며” 신중하게 주님께 그들을 맡겼습니다. 교회가 은혜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이후에, “비시디아” 지방을 거쳐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말씀을 전하고 “앗달리아”에서 배타고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가므로 1차 선교여행이 끝났습니다(24-25). 안디옥 교회는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26)이라 소개되는데, 선교 여행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마무리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들은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그분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한 후 함께 오랫동안 있었습니다(27-28).

전도자들은 선교여행 중에 많은 환난을 겪었으나,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고 고백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고는 자기들이 했지만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은 분명 하나님이셨습니다. 약 2년 간(46-48년)의 선교여행을 통해 전도자들과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구원 얻는 문을 여셨다는 확증을 얻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중에 더 놀라운 하나님의 뜻과 계획 깨달아가게 된 것이지요. 많은 고난들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시고 지켜 주심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힘겨운 삶을 살지라도 이 믿음에 거해야겠습니다. 흔들리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고 복음대로 사는 중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그분의 놀라운 뜻을 깨달아 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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