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분노의 자리에서 (삼상 25:32-42)

첨부 1


분노의 자리에서 (삼상 25:32-42)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위기의 대부분은 우리들 자신이 선택할 수 없이 찾아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비록 이런 인생의 위기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위기에 대한 반응은 우리가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는 말 그대로 위험한 것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만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최근세사에서 인류가 경험한 가장 끔직한 고통은 2차 대전 당시의 나치의 유대인 학살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나치의 비인간적 인간 학대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는 아마도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던 사람 가운데 오스트리아 빈 의과대학의 유명한 정신의학 교수인 빅터 프랭클린 박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 수감될 때 그가 연구하던 원고 뭉치를 옷 속에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가 써 내려가던 연구 원고는 그가 살아가는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수감되면서 옷을 벗기 우면서 그는 모든 원고를 빼앗기게 됩니다. 이제 그에게는 살아갈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 마음에 주체 할 수 없는 분노가 있지만, 그 거대한 세력 앞에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좌절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 누더기 옷을 걸쳐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종이 한 장이 만져졌습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기도문 형식으로 기록된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신6:4-5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이것을 보는 순간 여기서도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한다는 계시의 말씀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을 인간 연구의 전당으로 삼고 거기서도 인간의 행동을 관찰하며 그의 연구 원고를 새롭게 쓰는 기회로 삼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후 이런 그의 결심은 아우슈비츠의 모든 고난을 견디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는 종이조각들을 모아 틈틈이 그의 인간 연구를 새롭게 써내려가며 언젠가 수용소에서 나가는 날 온 세상을 상대로 그의 연구를 나누게 될 것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이 수용소에서의 생존자가 되어 그의 꿈을 펼치는 세계적인 의학자가 되어 인생의 의미야 말로 인간을 치유하고 살리는 가장 중요한 요인임을 밝힌 소위 ‘의미 요법’(로고 테라피)을 창안하여 인류의 정신의학에 기여하는 대 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위기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새로운 미래를 만나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은 계속된 다윗의 광야의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도 보셨지만, 그의 영적인 스승 사무엘의 죽음은 다윗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지주였고 영적으로 하나님처럼 의지했던 사람인데 이 영적인 지도자 사무엘이 죽고 나자 다윗은 바란 광야로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이 바란 광야는 다윗이 도망자로 살면서 피난을 간 중에 제일 멀리 있는 곳입니다. 당시에 사울 왕은 다윗을 시기하여 기회만 있으면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사무엘이 늘 걸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 선지자가 죽었으니 이제 사울의 핍박이 더 심해지리라는 생각에서 먼 곳으로 피신을 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충격적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사울 왕이 정략적으로 그와 결혼시켰던 공주 미갈을 다른 남자에게 재혼을 시켰습니다. 아내까지 빼앗겼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아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윗의 신세는 더할 나위 없이 처량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가장 우울하고 좌절감에 빠져있던 때였습니다. 정말 절망의 위기 속에 이젠 다시는 일어설 것 같지 않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3절 말씀에 보면 그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를 따라 나선 사람들이 600명가량 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여자들과 가족들까지 포함하면 아마 상당한 숫자가 될 것입니다. 이들 때문에 마냥 주저앉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들에게 가장 시급한 게, 먹는 문제입니다. 매일 매일 끼니마다 밥걱정을 해야 되고 많은 사람들을 책임지고 있는 다윗으로서는 걱정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지난 주 노숙자들이 모이는 등대 교회에서 추석 3일 부흥회를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 노숙자를 섬기는 사역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먹는 문제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365날 그들을 밥을 해 먹여야 하니 정부 지원이 없는 그 사역 얼마나 힘들고 피곤하겠습니까? 

다윗도 예외가 아닙니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쳐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다윗은 자기가 머무는 근방에 부자로 살고 있는 나발의 양떼와 염소들을 잘 돌보아 주면, 그로부터 음식과 필요한 일용품들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더욱이 인근에 있는 블레셋 사람들이 몰래 쳐들어와서 수많은 양떼와 가축들을 자주 약탈해 갔습니다. 그래서 나발의 많은 재산들을 누군가가 지켜줄 보호자가 필요한데. 다윗이 자원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발의 양떼와 염소를 지켜주니까 나발에게는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다윗은 군사들을 보내어 나발의 양떼와 염소 떼들을 매일 매일 안전하게 보호해주었습니다. 

여기 2-3절 보면 나발이라는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 나발. 이름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나발은 당시에 아주 부자였습니다. 양이 3천이요 염소가 1천이라면 상당한 부자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그가 '갈멜 족속'이라고 되어 있는데 원어를 보면 '갈렙'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발은 갈렙의 후손으로 조상의 재산을 상속받아 부자로 살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수15:54, 55; 14:14). 그러나 그는 그의 조상 갈렙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여러분 갈렙이 누구입니까? 12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을 정탐했을 때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있다고 긍정적인 보고를 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조상 갈렙의 용기와 담대한 신앙의 열정은 본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집안의 명예를 훼손하였으며, 자신에게도 명예가 되지 못했습니다. 나발이라는 이름의 뜻은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17절에도 보면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그랬는데 나발은 불량한 사람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나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아비가일'이라는 사람인데 그 이름의 뜻은 '기쁨을 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총명하고 용모도 아름다 여인이었습니다.그러니 이 두 부부는 얼마나 안 맞는 부부인가를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말하기를 "만일 성경이 이혼을 허락했다면 이 부부가 제일 먼저 헤어졌을 것이다" 그랬습니다. 그 정도로 잘 어울리지 않는 부부라는 것이죠. 

지금 다윗은 이 나발의 양떼와 염소를 지켜주게 됩니다. 다윗은 군사들을 보내어 나발의 양떼와 염소 떼들을 매일 매일 안전하게 보호해주었습니다. 그런 중에 나발이 양털을 깎는다는 말을 듣고 다윗은 이 경사스러운 날을 이용해서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목축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털 깎는 날은 잔치하는 날로 정하고 일종의 축제였습니다. 마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추수하는 날과도 같습니다. 이런 경사스런 날은 음식도 넉넉히 하고 지나가는 나그네까지 불러서 함께 식사를 하는 법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자기 부하를 보내어 겸손하게 음식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나발이 어떤 반응을 일으킵니까? 10-11절에 거절했을 뿐만이 아니라 다윗을 모욕하는 말을 퍼부으며 다윗의 병사를 쫓아냈습니다. ‘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다윗이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뇨?" 라는 말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아는데도 아주 업신여기는 말투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근일에 억지로 자기 주인에게서 떠나는 종이 많도다" 그랬는데, ‘이 말은 주인 밑에서 충성할 생각은 않고 주인을 떠나서 도망 다니는 놈들이 많은데 그 중에 한 놈이 다윗이다’ 그런 말입니다. 사울 왕을 떠나 제 멋대로 나돌아 다니는 배신자요, 망나니로 표현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다윗과 그의 일행들을 아주 업신여기는 말이었습니다. 
  
마땅히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다윗의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다윗은 분개하여 부하 사백 명에게 칼을 차게 하고 자신도 무장을 하고는 나발의 집을 향해 갔습니다. 22절 말씀에 보면, 다윗이 결심하기를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그러면서 나발의 집을 완전히 멸하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이제 나발의 목숨은 끊어진 거나 다름없고 그의 집은 풍지박산 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상황에서 누구나 그렇겠지만 다윗은 지금 이성을 잃었습니다. 참으로 위기일발의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이 누구입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자기 눈 앞에서도 살려준 사람입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하는 다윗에게 따라다니면서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를 향해서도 저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다면 그 모욕, 그 고통의 소리를 다 들었던 사람입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다윗은 긍휼의 사람입니다. 적장 아브넬의 죽음까지도 애도하는 사랑과 긍휼이 풍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왕이 되는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온 백성의 마음이 하나가 될 때까지 기다리며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다윗이 나발로 부터 거절과 모욕을 듣게 되자 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장 고통당하고 닮지 않으려고 하는 사울의 분노와 행동이 그 마음속에 찾아옵니다. 지금 그는 쫓기는 몸입니다.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함께 하는 600명의 군사의 생계를 책임져야 합니다. 나발로 인한 다윗의 분노는 나발의 집에 거하는 모든 남자를 다 죽이겠다고 맹세하게 합니다. 

이제 다윗의 분노는 광야에서 배운 거룩함을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기름부음 받은 자의 정체성도 잃어버렸습니다. 그가 받은 모욕과 멸시 그리고 피곤함과 분노만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거룩한 믿음은 이제 나발과 싸우는 타락한 모습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자기가 당한 것을 참지 못하고 분노를 토해내는 다윗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를 화해와 긍휼, 그리고 축복의 사람으로 만들어 오신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한꺼번에 잃어버릴 분노에 사로잡혀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인가에게 이런 모욕과 상처를 입었다면 어떻게 조치하겠습니까? 분노라는 감정은 참 무섭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가도 이것이 발전하면 어떤 무서운 죄를 지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분노의 상태를 마귀가 아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엡4:29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며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분노의 감정을 해결하지 않고 그냥 품고 있으면 마귀는 이것을 틈타 더 큰 죄를 짓게 합니다. 

가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하나님께 대해 화가 좀 났습니다. 그 후에는 동생을 미워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점점 발전해서 끝내는 자기 동생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 없었으나 분노를 그냥 갖고 있으니 살인하는 죄까지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감정이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정 가운데 좋은 점은 잘 살려나가야겠지만 잘못된 감정들, 특히 분노와 같은 것은 어느 정도의 선에서 절제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잠 16:32절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첫째로, 분노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애를 쓰는 사람도.... 이렇게 분노로 인하여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면... 오늘 우리도 얼마나 많이.... 분노로 인하여 실수하기 쉬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분노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과 달라서 굉장한 파괴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노는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한 사람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뉴욕 타임스 지에.... 보통 사람에 비해서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의 사망률이 20% 가량 높다는 듀크 의대 팀의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또 화를 내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도 큰 타격을 주는데, 권투선수의 강한 펀치를 맞는 것과 같은 심한 타격을 받는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속이 분노로 불타고 있으면 겉이 아무리 멀쩡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영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엡4:27절에 “분노하고 있을 때 마귀가 틈타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분노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마귀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노하고, 마음에 해결되지 않은 분노를 계속 품고 있으면, 찬송을 잃어버리고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기쁨을 잃어버려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가 없고 마귀가 일하는 기회가 되고 맙니다. 분노는 자신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염(傳染)이 됩니다. 분노하는 부모의 자녀는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분노하는 목사의 설교를 듣는 성도는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분노를 버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감정에 지배를 받게 되면, 우리 믿음의 자녀들은 성령을 근심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생각은 점점 굳어지고, 작동이 되지 않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여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자기 고집에만 빠져 있습니다. 또한 감정은 완전히 통제 불능의 상태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의지라는 것은 완전히 방어적이고 공격적입니다. 이럴 때 우리 안에 성령은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선한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 자기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을 보게 됩니다.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이 자기 집을 향하여 달려오는 다윗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방법과 시기를 잘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선물을 준비합니다. 잠언 21:14절에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뇌물이 아닙니다. 이 선물이 어떤 역할을 하는 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 이 여인은 자기남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는 일들을 남편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에게 선물을 들고 달려갑니다. 그는 즉시 '떡 이백 개, 술 두 부대, 요리한 양 다섯 마리, 볶은 밀 열 말, 건포도 백 뭉치, 말린 무화과 과자 이백 개를 서둘러 마련하여... 나귀에 실려 남편 몰래 시종들을 시켜서 다윗에게 보내고 자신은 조금 뒤쳐져서 다윗을 정식으로 마중하고자 길을 떠났습니다.아비가일은 곧,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벼르고 오는 다윗과 마주쳤습니다. 

그러자 아비가일이 나귀에게 급히 내려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겸손하게 탄원했습니다. 25절에 보면 "죄는 저에게 있습니다. 나리께서 보내신 사람을 제가 만나지 못해서 그리 된 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아비가일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참아 주십시오. 나발이라고 하는 인생은 그 이름처럼 미련한 인생입니다. 당신이 상대할 그런 가치 있는 인생이 못됩니다. 그를 처치한다는 것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분이 하실만한 일이 못됩니다. 당신이 누구십니까? 그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입은 자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원한을 풀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그런 더러움을 입지 마십시오. 당신의 원수는 하나님이 처치하실 것입니다. 여태 그런 믿음으로 살아오시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위해 싸우셔야지 이런 일로 싸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설득입니까? 그러면서 아비가일을 2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목숨은 하나님이 생명싸개 속에 안전히 싸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져버리실 것입니다..." 기분에 따라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대처하라는 겁니다. 친히 나서서 혈기를 따라 설치지 말고 하나님께 모두 맡겨버리고 하나님의 사람같이 처신하라는 겁니다. 

바로 이 아비가일의 말에 다윗은 감동을 먹습니다. 다윗은 지금 어리석은 자와의 전투를 준비하고 달려가는 중이었습니다. 분하고 억울한 것은 사실이지만, 또 충분히 그럴 수밖에 없는 정황이었지만 그러나 엔게디 광야에서 그가 가졌던 그 거룩한 영성은 잃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과 다른 점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발을 제 손으로 죽이겠다고 간다면 자기가 사울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다윗은 '제2의 사울'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어리석은 자가 많이 있습니다. 화나게 하고 분노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남일 수도 있지만 또 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화풀이하며 삽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영성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나발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다윗의 영성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를 상대해서 싸우는 것은 똑같이 어리석은 자가 될 뿐입니다. 우리는 때로 속 좁은 복수심에 매달려서 아름다운 삶, 풍요로운 영성을 상실하고 삽니다. 그래서 그 순간에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잃고 아까운 세월을 허송하며 삽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윗은 교훈합니다. 영성이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나발을 향한 다윗의 행동은 동기도, 명분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영성의 사람 다윗은 멈춥니다.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고 좇아다니던 사울을 죽일 기회를 만난 것도 어찌보면 정말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기회인 것처럼 절묘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을 분별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탁합니다. 자신이 가진 복수의 정당성보다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기름부름을 존귀히 여길 때 하나님은 점점 더 다윗을 높이 드셨던 겁니다. 

한 가지 사건을 보면서 세 가지 다른 모습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세 가지 속성과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발을 통해서는 어리석은 인생이 무엇인가? 그러한 삶의 근거를 두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삶의 모습을 만드는가를 보았습니다. 다윗을 통해서는 우리가 원만하고 좋은 그리스도인처럼 여겨질 때도 있지만 다윗 속에 있는 사울의 모습을 나타낼 때를 경계하며 재빨리 돌이킬 줄 아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아비가일을 통해서는 그 당시 영향력 없는 여성이었지만 다윗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일을 보여주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내게 주어진 일이나 사건 앞에 어떤 모습으로 늘 서오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은 선택하는 대로 결정됩니다. 여러분이 선택하는 모든 일에 주의 성령이 언제나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아비가일 같은 성령의 인도하심 받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여러분 자신들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아비가일처럼 주의 뜻을 증거하고 죄로 가는 그 영혼을 돌이켜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