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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마음, 요나의 마음 (욘 3:1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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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하나님의 마음, 요나의 마음
성 경 : 요나서3:10-4:11

오늘은 우리가 잘 아는 요나의 사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요나서를 읽으면서 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어떤 학생이 기차에서 요나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한 신사가 비웃듯이 물었습니다. “학생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삼일 후에 다시 나왔다는 그 얘기를 믿어요?” “그럼요.” 라고 확신 있게 대답하였습니다. 신사가 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그 터무니없는 얘기를 믿을 수 있나?” “자세한 것은 천국에 가서 요나에게 물어보지요”라고 했습니다. 우선 믿고서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천국에 가서 물어보면 된다는 믿음입니다. 신사가 또 물었습니다. “그 친구 요나가 지옥에 가 있으면 어떡하지?” “그럼, 아저씨가 물어보면 되겠네요.” 이런 기적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 지옥에 들어갈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옛말에 "열 번 찍어 아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끈질기게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미국 소매상 협회의 조사에 의하면 판매원(Salesman)의 48%가 한번 전화해보고는 포기하였습니다. 25%는 두 번 전화해 보고 포기하였고, 15%는 세 번 걸어보고 포기한다고 합니다. 즉 88%의 세일즈맨은 한통 내지 세통의 전화를 걸고 판매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12%의 세일즈맨이 더욱 끈질기게 전화를 하고 판매의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12%의 세일즈맨이 전체 판매량의 80%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한 물건을 판매하는데 있어서도 이러한대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한 영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자기 아들의 이름을 ‘악마’라고 지어놓고 호적에까지 올리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유별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1995년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술집을 경영하던 ‘사토’씨가 화제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유령형제를 곤경에서 구출해준다는 만화를 즐겨보다가 만화의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아들에게 ‘악마’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오래오래 기억해주기를 바라서 그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청 호적계 직원이 결사반대를 하고 나섰습니다.   "이런 이름은 사회 규범에도 맞지 않은 뿐더러 아이가 크면 조롱을 받게 될 수 있으니 반대한다"는 것이 시청관계자의 입장이었고 "내 아들의 이름을 아버지가 짓겠다는데 왜 간섭이냐?"가 사토씨의 주장이었습니다. 결국은 팽팽히 맞서다가 소송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심 법원은 '나쁘긴 하지만 아들의 이름을 지을 권리는 아버지에게 있다"고 사토시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시관계자도 끈질기게 상급법원에 항고장을 냈습니다. 뜻밖에 일이 확대되자 사토씨가 그만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남의 일인데도 발 벗고 나서서 만류하는 시청직원의 열성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하마터면 동네 아이들로부터 '악마야, 악마야' 소리를 들으며 자랄뻔한 아이를 시청직원의 열정이 구해내었습니다.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한 사람에게 끈질기게 손을 내어 밀어야 합니다. 

록펠러라는 분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한 때 미국 역사상에 최고 부자였던 록펠러가 52세 때에, 근육 무력증, 탈모증, 불면증, 위궤양, 등으로 인하여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막대기처럼 말라갔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자 그처럼 악착같이 모았던 재산도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의 삶을 바꾼 것은 누가복음 6: 38절의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록펠러는 당장 자신의 부를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엄청난 기부를 했지만, 그의 소유는 줄지가 않았고 놀랍게도 기부를 시작한지 불과 12개월이 됐을 때 그는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결국 록펠러는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으며 무려 98세까지 장수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준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나에게 복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실제로 주는 사람이 더 건강하고 행복하고, 장수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남에게 주는 사람이 고통과 아픔을 적게 느끼고,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며, 스트레스도 적고, 질병에도 덜 걸린다고 합니다. 금연이나 주 4회의 규칙적인 운동보다도 구제가 장수에 좋다고 합니다. 

미시간대 학자들은 5년 동안 400명의 노인 부부들을 조사한 후,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수명이 훨씬 더 길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연구 책임자인 브라운 교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킨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1999년 캘리포니아 대에서 2,0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와도 일치합니다. 이 연구에 의하면 2개 이상의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향후 5년간 죽을 확률이 놀랍게도 63%나 줄어든다고 합니다. 결국 남을 돕는 행위는 자기를 돕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돕는다거나 구제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으로 돌아온다고 하면,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우리에게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삶으로 되돌아옵니다. 전도하는 것은 다른 것에 비교할 수 없는 가장 놀라운 기적을 가져옵니다. 전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살릴 뿐 아니라, 자기 영혼을 살리는 원동력이 됩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는 사람에 비해 믿음이 빨리 성장할 수 있습니다. 선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생한 역사를 많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힘쓰는 사람은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과 하나님의 한없이 베푸시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조금의 상상력만 발휘하면서 이 성경을 읽어가노라면 하나님의 구속사의 위대하신 섭리를 깨달을 수 있고, 그것 때문에 감격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요나서를 통하여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요나서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요나는 불순종의 사람을 대표하고 있으며,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모나고, 다듬어지지 아니한 사람도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요나는 다시 순종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종도 기뻐서 하는 순종도 아니고, 억지로 순종하는 척 하고 사실은 불순종을 합리화하고 있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우리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들어서 하나님의 구속사의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다시금 고기뱃속에서 나온 요나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일어나라, 가라"고 하셨습니다. 요나는 이번에는 순종하고 니느웨로 갔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기는 해도 그리 시원치 않았습니다. 니느웨라는 도시는 아주 커서 한번 돌아보려면 3일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망해 죽었으면 좋을 나라를 위하여 3일씩이나 차분하게 다니면서 외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을 원치도 않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명령이 있으니, 단 하루만 외치고 다녔습니다. 회개하라는 외침보다는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일방적인 외침이었습니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사역에 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마지 못해서 외친 것입니다. 욘3:4에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했습니다. 

요나는 회개하라든지,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든지 차분히 외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요나는 하룻길을 다니면서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한에 맺힌 외침이었고, 고소하다 생각하면서 외치고 다닌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기한부 메시지는 요나의 외침과는 아주 다르게 들렸습니다. 멸망을 외치는 저주가 아니라, 긍휼과 사죄의 복음이었습니다. "40일 안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살리라"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40일이 지나면 무너진다는 말 속에 복음이 들어 있는 것을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요나는 아직까지 편협하고 배타적적인 애국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에 선포된 40일은 회개하고 돌아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심판과 멸망은 하나님의 본 뜻이 아닙니다. 예례미야도 하나님의 근본 원하시는 뜻을 깨달았습니다. (애3:32-33)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니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왕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은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습니다. 왕이 명령을 내려 누구든지 물조차 입에 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회개하는데 이렇게 철저히 회개하는 것을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죄인을 버리지 못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요나서는 "연민"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연민이라는 말이 한 번도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요나는 지금 니느웨의 멸망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요나는 성에서 나가서 동편의 높은 산에 올라가서 도성이 무너지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거기서 초막을 짓고 그늘 아래에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40일이 지나갔는데 니느웨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조바심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면서 따져 묻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연민의 정이 요나를 불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앗수르인들은 극도로 타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계 모든 민족에 행한 악을 생각하면 멸망 받아야 하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저지른 악에 대하여 쉽게 용서해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잔인하고 사악한 백성에 너무나 관대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생각은 요나도 처음부터 하나님은 용서하리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도망했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요나가 머물고 있던 초막에 박 넝쿨이 자라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어떤 성경에는 ‘아주까리’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중동의 날씨는 건조하기 때문에 그늘 밑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런 대로 지낼 만 하였습니다. 요나는 그 박 넝쿨 아래서 니느웨를 내려다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벌레를 보내셔서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셔서 말라죽게 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뜨거운 동풍을 보내셔서 요나로 하여금 더위에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 때 요나는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욘4: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요나는 참으로 무뢰한 선지자로 보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박넝쿨을 마르게 하였다고 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며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라고 달려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요나가 박 넝쿨이 말라 죽으므로 인하여 하나님에게 항변하였습니다. 하찮은 박 넝쿨이 죽었다고 아깝게 생각하고, 안타깝게 여긴다고 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니느웨의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에 대한 연민의 정이 왜 없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그 열정적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수사학적으로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11절에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라는 질문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아주 갑작스럽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한 학자들은 여호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며, 그 후에 있었던 요나의 사적 들이 있었을 터인데 손실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책을 끝맺고 있는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은 답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전체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수사학적인 질문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요나에게 대한 질문은 우리에게 답해보라고 주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대답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그냥 생각 없이 읽어 내려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묵상하고 응답해야 합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었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 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고 하셨습니다. 

미얀마(버마)에서 50년이란 긴 세월을 선교하다가 투옥되면서 일생 보낸 아도니람 저드슨이 미국 보스톤으로 돌아왔습니다. 일 만여 명의 군중들이 저드슨의 연설을 듣기 위하여 몰려왔습니다. 그는 엄청난 고난으로 인하여 너무나 허약해져 혼자 힘으로는 연단에 오를 수도 없었고 서 있을 기력도 없어 의자 앉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어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청중들이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날 21명의 청년들이 앞으로 나와 미얀마로 가겠다고, 저드슨을 대신하여 우리가 전도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연민의 애정으로 우리도 한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구원을 외치지 아니하려면 차라리 멸망이 라도 외쳐야 합니다. 듣고 구원받을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어린이들이 얼마나 많으며, 이제 주님 앞에 서야 하는 노인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널리 증거해서 죽어 가는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한 영혼을 위하여 가슴아파하시는 그 마음이 여러분의 가슴에도 있습니까? 하나님의 눈물이 여러분의 눈에도 흐르고 있습니까?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 나서는 목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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