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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딘가 다른 사람들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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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다른 사람들 (눅 19:1-10) 

드라마의 분위기와 품격은 등장인물들의 성격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작년에 <동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조선 19대 임금인 숙종 당시 장희빈을 둘러싼 궁궐 음모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숙종은 사람들의 예상을 깬 파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드라마에서 숙종은 근엄한 왕이 아닙니다. 하급 관리들과 길거리 주막에서 밥과 술을 먹습니다. 그런가 하면 일개 하녀와 친구처럼 지냅니다. 길거리에서 낄낄대면서 웃기도 합니다. 그래서 <깨방정 숙종, 코믹 숙종>이란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엄격하기만 하리라고 예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왕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열광했습니다.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을 파격이라고 부릅니다. 파격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고, 즐겁게 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언제나 예측 가능한 행동만 하는 사람,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평소 모습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 언제나 규범대로만 움직이는 사람은 재미가 없습니다. 종종 기대를 깨는 모습을 보일 때 본인도 즐겁고, 다른 사람도 즐겁습니다. 

그런데 이런 파격적 행동은 은혜를 받는 일에도 정말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소수의 특별한 사람만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는 어떤 사람이 받는 것일까요? 성경을 보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특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어딘가 다른 특별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찌 보면 바보 같고, 어찌 보면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자존심도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상한 파격적 태도들로 인하여 은혜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께 큰 은혜를 받은 몇 사람을 살펴보면서 은혜의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본문에서 <삭개오>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삭개오는 어떤 유형의 사람일까요? 삭개오는 큰 도시 여리고의 세리장, 즉 세무행정 최고책임자였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고위공무원이었습니다. 
고위공무원들에게 기대되는 태도는 어떤 것일까요? 저도 종종 고위공무원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공무원으로 오래 재직하는 분들에게서는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우선 만나면 명함을 건네줍니다. 차 한 잔을 나눕니다. 그 태도가 상당히 세련되고 부드럽습니다. 무슨 말이든지 잘 들어줄 것 같은 부드러움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뭔가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놓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공무원으로서 지켜야 할 규범과 자신의 책임에 대해 분명합니다. 고위공무원 특유의 분위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그렇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삭개오도 여리고성의 세무책임자로서 가볍게 행동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평소의 그는 근엄하고, 엄격했을 것입니다. 또 세금을 부과할 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서 천진난만한 순수한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삭개오는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는 평소에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과 특별한 말씀들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뵙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예수님께서 여리고성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길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예수님을 뵙고 싶은 마음으로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러나 길거리에 나가보니 예수님을 뵙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키가 작았고, 그의 앞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아무리 발뒤꿈치는 들어 예수님을 보려고 해도 사람들에 막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때 삭개오는 모든 사람에는 작은 충격을 주는 뜻밖의 행동을 합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주변에 있던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끙끙대면서 올라가는 그 모습이 사람들 보기에 우스웠을 것입니다.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여리고성의 세리장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 천진하고 순박한 아이 같은 모습에 빙그레 미소를 짓게 됩니다. 그에게 아직 이런 동심이 남아 있다니> 너무도 뜻밖입니다. 

여러분,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은혜를 얻은 것은 이 돌발적인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뒤꿈치를 들고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다가 포기했을 것입니다. 나무를 슬쩍 쳐다보고는 <체면이 있지. 어떻게 저기 올라가겠나? 또 날 멸시하는 많은 사람들이 날 얼마나 비웃겠어? 세리라는 것도 괴로운데, 키 작다는 것까지 놀림거리가 되겠어...>라고 하면서 그냥 집에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과감했습니다. 체면도 벗어던졌습니다. 어린 소년처럼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어떤 은혜를 받았습니까? 우선 그의 바램대로 예수님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삭개오의 파격적 행동은 예수님의 눈길을 끌었고, 예수님께서는 나무 아래 오셔서 그를 올려다보셨습니다. 삭개오만의 일방적인 시선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그를 마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고 멸시 당하던 세리의 집에 예수님께서 친히 가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가장 더러운 죄인처럼 취급했습니다. 동족의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는 그들을 증오했습니다. 아무도 세리의 집에 드나들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가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쑥덕대었습니다. 7절을 보면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의 나무에 올라가는 파격적 행동에 대하여 예수님도 그의 집에 직접 가시는 파격적 행동으로 화답하셨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하심으로써 삭개오의 가정이 구원을 받았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공개적으로 구원을 선포하신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삭개오는 가장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은혜를 받기 위해서라면 나무에라도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이 하지 않는 일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은혜는 평소와 다른 뜻밖의 행동을 통해 얻게 될 때가 많습니다. 평소처럼 점잖게 와서 앉아, 졸기도 하고, 습관처럼 해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 좀 더 특별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사람이 받아 누립니다. 체면만 지키면서, 뒷짐을 지고 가만히 있는 사람은 결코 은혜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삭개오처럼 은혜를 위해 행동할 수 있길 원합니다. 

그런가 하면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도 남들과는 좀 달랐습니다. 
우선 중풍병자를 메고 올 생각을 한 것부터가 다릅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가 있는 경우에는 의원에게 와 달라고 부탁드리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와서 고쳐 주십시오.>라고 부탁했어야 상식에 맞습니다. 아니면 가버나움의 백부장처럼 예수님께서 집에 오시는 것은 너무 죄송해서 사양하더라도 말씀이라도 해 주시길 요청했어야 합니다. 어쨌든 거동하지 못하는 중환자가 있다면 환자를 집에 두고 찾아오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환자를 떠메고 왔습니다. 어쩌면 환자를 위해 임시 침상을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를 받쳐 들고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게다가 압권은 그 다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집에 도착했을 때, 집에 사람이 너무 많아 들어갈 수 없었기에 그들은 지붕을 뚫고 환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은 <지붕 뚫고 하이킥>의 원조입니다. 이로 인해 상당한 경제적 손실도 감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멀쩡한 남의 집 지붕을 뚫다니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우리 같으면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여기까지 데리고 오지 않았나? 사람들이 너무 많고, 비켜 주지도 않으니 어쩌겠나? 다음 날 다시 오지...>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붕까지 뜯는 파격적 모습을 보였고, 그 결과 병자는 죄 용서도 받고, 건강도 회복하여 돌아가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붕이라도 뜯으실 수 있습니까? 은혜를 위해 손실을 감수하시겠습니까? 미친 사람이라는 조롱까지도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파격을 즐기시는 분입니다. 사랑을 위해 파격적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신 그 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일입니다. 이것보다 더 파격은 없습니다.하나님 당신께서 파격적 사랑을 베푸신 분이기에, 우리도 파격적인 열정과 행동으로 당신께 나오길 기다리십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하여 은혜를 얻게 되길 원합니다. 

그런가 하면 마태복음 15장 21절 이하를 보면 <가나안 여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도 예수님께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도 보통 사람과 달랐습니다. 한 마디로 그녀는 저돌적이었습니다.  
그녀의 저돌적인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그녀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흉악한 귀신에 사로잡혔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나와서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계속 따라오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자들이 참다못하여 여인을 보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평소와는 다른 냉정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계속 간청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모욕을 견디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 때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자존심이 상해서 돌아설 것입니다. <예수, 당신이 대단하면 대단했지, 날 이렇게까지 모욕할 수 있습니까? 차라리 내 딸이 저렇게 고통받다가 죽더라도 더 이상 구걸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돌아설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인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자존심, 체면, 다 버렸습니다. 끝까지 매달렸습니다. 심지어 개라고 해도 좋으니, 개가 먹는 부스러기라도 먹게 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받고야 말겠다, 그 전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녀 역시 보통 사람과는 달랐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길 원하신다면 가나안 여인처럼 매달리시길 바랍니다. 은혜를 받기 전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열심히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체면 따위에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자존심도 버리십시오. 환자가 의사 앞에서 무슨 자존심을 지키겠습니까? 의사 앞에서는 옷도 벗어야 합니다. 시키는 대로 다 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쓸데없는 자존심은 은혜를 받는 데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태도를 가지지 못하여 은혜에 이르지 못합니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도 자존심 때문에 은혜를 입지 못할 뻔 했던 사람입니다. 나아만은 당시 근동의 강국인 아람에서 왕의 신임을 독차지하고 있는 대장군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나병환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온 몸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을 겪던 중 그의 집에 붙잡혀 온 이스라엘 계집아이로부터 엘리사 선지자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왕의 친서까지 가지고 이스라엘을 찾았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무슨 수로 나병을 고친단 말인가, 분명히 구실을 잡아 우리를 침략하려는 계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했고,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가 어떻습니까? 나아만이 찾아왔을 때, 엘리사 선지자는 나와 보지도 않았습니다. 사환을 통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라>고 말만 전했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머리끝 까지 났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감히 얼굴도 비치지 않고, 사환을 통해 말만 전하다니, 또 환부에 손을 대고 기도하거나, 약이라도 발라줄 줄 알았더니 요단강에서 목욕을 하라고 하다니, 우리 아람에도 좋은 강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몸을 돌렸습니다. 

만약 그가 이대로 돌아갔다면 그는 병으로 고생하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하들이 말렸습니다. <병을 고치는 은혜를 입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일이라도 해야 할 텐데, 그냥 가면 어찌 하느냐>고 말렸습니다. 결국 그는 요단강에서 목욕을 했고,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은혜를 받는데는 저돌적으로 매달리는 열심만 필요할 뿐 자존심과 체면 따위는 필요없습니다. 결국 여인의 이러한 남다른 태도로 인해 여인의 딸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인의 집요한 믿음은 주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테스트에 합격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8절을 보면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사람들의 반대와 만류도 뿌리치고 끝까지 나서야 합니다. 마태복음 20장 29절 이하를 보면 여리고성의 시각장애인들이 고침 받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꾸짖으며 윽박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어떤 비난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더 크게, 더 간절하게 소리 질렀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0장 32절 이하를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할렐루야!  우리도 이런 은혜를 입게 되길 원합니다. 

이들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보통 사람과 달랐습니다. 작은 반대에만 부딪혀도 포기하는 연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반대에도 예수님께 나오는 일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어떤 불이익이 있어도, 어떤 불편이 있어도, 어떤 손실이 있어도 믿음의 길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결국 주님의 은혜란 받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 얼만큼 마음을 기울이고 계십니까? 얼마나 간절하십니까? 얼마나 전폭적으로 매달리십니까? 

어느 날 스코틀랜드의 목사이며 찬송가 작가인 <보나>가 꿈을 꾸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그의 신앙열심을 저울질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천사는 그의 열심을 달아보더니 그 열심을 분석해 보여주었습니다. <전체 100킬로 중에서 이기심 때문에 나타내는 열심이 14킬로, 파당적인 열심이 15킬로, 명예 때문에 나타내는 열심이 22킬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내는 열심이 23킬로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열심은 겨우 26킬로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향한 열심은 겨우 26킬로였고, 나머지 76킬로는 인간적 욕망에 근거한 열심이었던 셈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발만 담그고 있습니다. 깊은 은혜, 큰 은혜를 맛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무 조용해서 그렇습니다. 너무 점잖습니다. 너무 열정이 적습니다. 늘 하던 대로 할 뿐입니다. <그 사람은 늘 그렇지 뭐...내 그럴 줄 알았어...> 이런 말을 들으면 안 됩니다. <아, 그 분이 저럴 줄은 몰랐어. 정말 놀랐어. 저런 열정이 숨어 있다니, 저런 간절함이 남아 있다니, 저렇게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사모하다니, 정말 놀라워. 그러니 저렇게 큰 은혜를 받았지.....>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은혜의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은혜의 바다에 들어가십시오. 주님을 뜨겁게 앙모하십시오. 독수리처럼 하늘로 날아오르는 성도가 되십시오. 모두 은혜의 한복판에서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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