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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는 자의 심정으로 (롬 15: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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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자의 심정으로 (롬 15:30-33)

현대인에게 가장 큰 죄가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공부하지 않는 죄라고 합니다. 굳이 애써서 배우려고 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아도 얻어지는 편리한 것들만 찾아 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발달된 물질문명이 굳이 좀 깊이 공부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무언가에 매여서 공부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는 컴퓨터라고 하는 기계를 통해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가 있기 때문에 발로 뛰면서 연구하고, 땀 흘리며 찾아내는 수고는 미련한 것이 되어버렸고 클릭한번으로 족한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고 인간의 가치를 묻고 지혜를 얻는 그런 공부가 없어졌다는 것이 죄라고 합니다. 둘째는 실천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아는 것이 정말 많은데 아는 대로 행하질 않습니다. 부득이 하다는 말로, 인간은 약하다는 말로 변명하면서 그나마 가지고 있는 지식을 그대로 생활에 옮기지 않는 것입니다. 말은 많고, 비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데 비해서 행하는 것은 적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의지박약 자처럼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현대인의 특징적인 죄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의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르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서로 공유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는 이 지식의 최고봉은 나 혼자만의 전유물로 남기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업의 노하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혹 알려주려면 돈을 받고 팔겠다는 심보입니다. 대기업의 비밀이나, 제품의 앞서가는 기술을 몰래 빼내서 해외로 팔아먹는 산업스파이들이 그들 아니겠습니까? 이 속에는 “그 누구도 나를 뛰어넘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는 일등주의가 빚어낸 부작용과 “어차피 내가 최고가 될 수 없다면 너도 일등이 되어서는 안 된다.” 는 철저한 패배주의의식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이 이기주의에서 생겨난 것들입니다. 나만 잘 되면 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세상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합니까? 세상과 똑 같이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뭔가 달라도 달라야합니다.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미국에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과의 삶에 대해 비교연구를 해봤더니 그 모습이 확연히 구분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 봉사활동에 얼마나 참가하고 있는가하는 봉사 참가 지수를 조사해 봤더니 월등하게 차이가 나더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훨씬 더 많이 봉사활동에 참가하고 있었고, 두 번째는 포용력지수에서 기독교인이 압도적으로 앞서더라는 것입니다. 인종이 복잡한 나라이다 보니까 인종차별이 극심한 곳이 미국입니다. 

그런데 그 다양한 인종문제에 대한 포용력이 비 기독교인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았고, 또 가난한 자와 부한 자의 차이 속에 얼마나 넉넉하게 포용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도 그 지수가 훨씬 높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가정의 안정지수입니다. 워낙 이혼이 많은 나라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부모들의 이혼 문제에 대한 자식들의 불안이 덜하고, 아이들도 부모님의 뜻을 따라서 성실하게 잘 자라주는 가정 안정지수가 월등하게 기독교인들이 더 나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행복감 지수입니다. 베푸는 삶을 통해서 스스로의 행복을 얼마나 만끽하고 살아가는가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했는데 이 만족도가 60%라고 했습니다. 60%의 사람들이“우리는 행복합니다.”라고 생각하더라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이렇게 네 가지에 의해서 우리를 평가한다면 얼마의 지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봉사생활 얼마나 했습니까? 얼마나 너그러운 사람이 됐습니까? 가정은 얼마나 더 안정이 됐습니까? 여러분의 행복감은 어느 수준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인생을 받는 것보다는 주는 일에서 기쁨을 찾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행 20:35절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바울이 인용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여러분, 주는 자의 기쁨이 클까요? 받는 자의 기쁨이 클까요? 주는 자의 행복이 큽니까? 받는 자의 행복이 큽니까? 잘 모르시겠다면 줘 보세요. 베풀어 보세요. 줘보질 않았으니 알 수가 있나요.... 사람이 주는 행복의 진리를 터득하기 전까지는 영영 진정한 행복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숱한 진리가 있지만 이 진리만은 논리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터득할 수 있는 특별한 진리입니다. 

사람이 가장 진실해질 때가 죽기직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죽기 전에 가장 착해지고 가장 진실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살아 온 삶에 대해서 크게 뉘우치는 단계를 거치게 되면서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첫째가 살아가면서 베풀지 못한 삶에 대한 후회입니다.“좀 더 베풀 수 있었는데... 좀 더 줄 수 있었는데.... 내가 왜 주지 않았을까...좀 베풀어야할 때 주지도 못하고 모아 봐도 가지지도, 먹지도 못하고 가는 걸좀 더 좋은 일하면서 살았으면 좋았을 걸”하는 이것이 큰 첫째 후회입니다. 둘째가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랍니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쓸데없이 행동했던가?”가 그렇게 후회가 된다고 합니다. 세 번째가 행복에 대한 후회입니다. “좀 더 행복하게 살수도 있었는데, 좀 더 인생을 즐길 수 있었는데, 그렇게 싸우고 울고불고 할 필요가 없었는데 왜 그렇게 나 괴롭고, 남 괴롭히고 살아야 했던가!”하는 후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을 때 이러한 후회가 없도록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보십시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전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를 세웁니다. 그러는 가운데 바울은 로마교회를 한번 방문하고자 하는 계획을 가졌지만 사정이 있어서 로마교회를 한 번도 방문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로마교회 방문을 현재에도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자기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서 구제헌금을 전달해야하는 임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흉년이 들어서 기근과 로마의 정치적인 박해로 인해서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이방의 여러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헌금을 합니다. 그리고 이 헌금을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하는 일을 바울이 직접 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직접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사도 바울을 죽이겠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소위 말하는 열심당 정도의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복음전하는 것을 방해하며 심지어는 죽이겠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정말 바울을 죽이지 않으면 밥도 먹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위험한 곳입니다. 바울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마는 굳이 직접 그 곳으로 가겠다는 것은 정말 여러 이방교회가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섬기고자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를 그 마음을 담은 헌금을 가지고 직접 가서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섬김과 봉사의 마음, 지극한 사랑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고 싶은 마음이 바울에게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로 가고 싶은 마음은 깊은데 만일에 여차해서 못 가더라도 이 편지로 대신하고 싶어서 쓰게 된 편지가 로마서입니다. 

오늘 편지글에 나타나는 바울의 가장 절박한 바람이 무엇입니까? 31절 중반 절입니다.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하는 말씀입니다. 지금 헌금을 가지고 가는데 그 곳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이 헌금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받는 사람이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니요. 당시 예루살렘교회성도들은 굉장히 배타적이어서 다른 이방교회가 주는 헌금을 받지 않으려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성도들이 받을 수 있는 믿음이 될 수 있도록 로마교회에서도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것은 주는 자의 마음입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를 위해서 걱정하며 염려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냥“받기 싫으면 관둬라. 줘도 안 받으면 네만 손해지 뭐!”그러고 맙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진정성이 없습니다. 애초에 정말 주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줘보고 안 받겠다면 그만이라는 것은 주려는 게 아닙니다. 주는 자의 입장에서 먼저는 주는 자의 마음이 뜨거워야 됩니다. 던져주는 게 아닙니다. 억지로 주는 것도 아닙니다. 불가피해서 주는 것도, 자랑삼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주는 자의 마음입니다. 물질이 아니고 사랑을 주고, 희생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는 자의 행복이 먼저입니다. 

<걸리버 여행기>를 쓴 영국의 소설가[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가 어느 날 참으로 불성실한 하인을 데리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호텔에서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나기 위해 하인에게 잠들기 전에 구두를 닦아놓으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구두를 신으려는데 구두가 닦이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구두를 닦아 놓으라했는데 도대체 이게 뭐냐?”그랬더니 하인이 씩 웃으며 말합니다. “주인님, 어차피 조금만 가면 곧 더러워질 텐데 닦으면 뭐합니까?” 

[스위프트]는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않은 채 떠날 준비를 서두르고 하인과 함께 식당으로 내려가서 지배인에게 뭔가를 부탁하더니 자리에 와서 앉았고 이내[스위프트]의 식사가 나왔습니다. 그런데[스위프트]가 식사를 다 하도록 하인의 식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스위프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자, 이제 출발하자!”그럽니다. 그러자 하인이 다급하게“주인님, 저는 아직 밥을 먹지 못했는데요!”합니다. 그때[스위프트]가 웃으며 말합니다. “그까짓 아침밥 같은 거 먹지 않으면 어떠냐! 밥을 먹어도 어차피 조금 있으면 또 배가 고플 텐데!”했답니다. 자신의 직무도 모르는 불성실한 하인의 정신을 고치는 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는 것이 행복입니다. 봉사를 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반드시 주려하고, 받는 자의 마음까지 헤아리며 준비하는 주는 자의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무엇을 주더라도 진심으로, 봉사를 하더라도 마음으로부터 준비된 기꺼움으로 할 수 있어야합니다. 받으려고 하는 기도에서 이제는 주려는 기도, 베푸는 기도로 바뀌어야합니다. 바로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항상 주는 자의 심정으로 세상을 보고, 다른 사람을 보며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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