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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없는 상없고 상없는 일없다 (딤후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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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없는 상없고 상없는 일없다 (딤후 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놀고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단체도 없습니다.
일없는 상없습니다. 반대로 상없는 일도 없습니다. 일 잘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상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상 이야기
역사에는 특이한 상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몇 가지만 소개합니다.

페르샤 왕의 상

페르샤 왕은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상을 주었습니다. 용감하게 공로를 세우고 싸운 군사들을 앞에 세웁니다. 그리고 입을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벌리게 합니다. 그리고 벌린 것만큼 금으로 채워 넣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

로마 황제의 상

로마 황제는 전쟁터에서 이기고 돌아 온 병사들을 세웁니다. 그리고 한 명 한 명 조사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만큼 금을 주었습다. 어느 병사는 한 쪽 팔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금으로 팔뚝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느 군인은 다리가 한 쪽 없어졌습니다. 없어진 다리만큼 금으로 다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병사는 두 다리를 잃어버렸습니다. 황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상을 주다가 멈추어 서서 그 병사를 으스러져라 끼어 안았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상을 더 주고 싶어서 말했습니다.

“자네는 잠간 기다리게. 다른 상을 주어야 겠네.” 그 병사가 말했습니다.
“황제님 저는 황제님의 눈물을 받았습니다. 가장 큰 상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로마 황제도 잃어버린 것만큼 금으로 상을 주었습니다.

징기스칸의 상

징기스칸이 13세기 인구 200만명으로 수 백배나 큰 중국과 러시아와 동유럽을 점령한 비결이 있습니다. 징기스칸의 꿈이 있었습니다.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몽골 사람들이 정확한 정보를 주면 가장 탁월한 기마병들이 하루에도 수 십번 오고 가며 정보를 전달하여 주었습니다. 

그들이 하나가 되어 일사 불란하게 움직였기에 그런 대국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큰 대국을 이룬 후 자기를 생명을 걸고 도와준 이들을 모아 타르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타르탄들에게 다음과 같은 특권을 부여하였습니다.

1. 당신들은 언제든지 누구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내 집에 들어 올 수 있다.
2. 당신들은 전쟁이 끝나고 나면 노획물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먼저 골라 가질 수가 있다.
3. 당신들은 앞으로 세금이 면제된다.
4. 당신들은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지어도 9번까지 용서받을 수 있다.
5. 당신들은 이 나라안에서는 가지고 싶은 땅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6. 당신들의 이러한 권리는 앞으로 4대까지 이어 줄 수가 있다.

그렇습니다. 일없는 상은 없습니다. 상없는 일도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상을 주시는 것일가요?
본문으로 들어 갑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사형당할 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비장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관제란 제사를 드릴 때 포도주를 붓는 제사를 말합니다. 전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사의 마지막 순서입니다. 축도로 예배를 마치듯이 관제로 제사를 마치게 됩니다. 이제 인생의 마지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사형당할 날이 가까웠음을 알았습니다.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이렇게 말할 때에 바울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찹하였을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은 자기 일생을 돌아보면서 선한 싸움을 싸운 일생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고나>라고 되어 있는 데 이는 격투기 선수들이 혼신을 다 하여 싸우는 모습을 그리는 말입니다. 로마 원형 경지장은 2000년전에 세워진 운동장입니다. 그런데 5만명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그 운동장 가운데 사자같은 맹수와 사형수를 싸움을 시킵니다. 그러면 사자밥이 되느냐 살아남느냐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맹수와 싸워서 이기면 살려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을 건 결사적인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5만명의 군중들은 그런 실제적이고 잔인한 싸움을 보면서 즐겼습니다. 이 때 사형수는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라 그야말로 필사적인 싸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에서 지냈으니까 이런 경기를 보았거나 들어서 알고 있거나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생각하며 감옥에서 자기는 선한 싸움을 일생 싸워 왔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 상이 있을가요?

1. 잘 싸우는 사람에게 상이 있습니다.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평생을 잘 싸운 바울은 하늘 나라에 가면 분명히 의의 면류관이라는 좋은 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서성옥 아버지를 장례를 얼마 전에 치루었습니다. 아버지가 유공자입니다. 백마고지 전투가 치열할 때였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백마 고지 주인이 바뀔 정도였습니다. 공산군이 백마 고지를 점령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용감하게 혼자 폭탄을 안고 숨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폭탄을 던졌습니다. 전멸시켰습니다. 화랑 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매달 정부에서 연금으로 포상하고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군악대가 동원되었습니다.
부러울 정도였습니다.
잘 싸우면 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공산당과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와의 싸움을 잘 싸웠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상대는 자기입니다. 내 주인이 내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작가 최 인호와 김수한 추기경이 이런 대화를 나눈 이야기가 잡지에 실렸습니다.
추기경이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긴 여행이 무엇인지 아세요?”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자 김 추기경은 손을 들어 머리부터 가슴까지 만지면서 말했습니다.

“바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지요. 나 역시 평생 이 짧은 것처럼 보이는 여행을 떠났지만 아직도 도착하기엔 멀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자기반성과 회개를 통해 조금씩 조금씩 우리 마음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하느님께 나아가고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과오가 있다 하더라도 그나마 종교인들이 소금 역할을 해줌으로써 이 나라가 굳건히 지탱될 수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최 인호가 다시 물었습니다.
“추억은 자주 떠올리십니까?”
김 추기경이 대답하였습니다.

“추억이야 낡은 옷과 같아서 떠올릴 필요가 없지요. 그보다도 내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남은 생 동안 하느님께 얼마나 더 가까이 갈 수 있을까 그것이 걱정이예요. 이 죄 많은 죄인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받아 주실까 모르겠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용서해주시는 분이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부끄럽지 않은 영혼으로 서고 싶은데 그것이 걱정이에요. 나같이 죄 많은 죄인을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실까 걱정이 됩니다. 그것이 요즘의 소망이에요. 나이와 함께 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도 잘 받아들일 만큼 하느님께 모든 것을 위탁하는 것, 그것이 요즘의 간절한 기도제목이지요. 다 하나님께 맡기고 살지요.”

마귀와의 싸움에서도 승리하였음을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싸움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2-13)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싸워 가는 것입니다.
어느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인생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이다.”
영국 제임스는 말했습니다.
“인생은 전쟁이다. 연극에서 가짜로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우주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진짜 싸움이다.”

로마이 쎄네카는 말했습니다.
“산다는 것은 군인이 되는 것이다.”
잘 싸우면 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없는 상없고 상없는 일없습니다.

2. 잘 마치는 사람에게 상이 있습니다.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바울은 자기 할 일을 잘 마쳤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고>라는 말은 목표가 분명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산 정상에 오르려는 이는 정상에 도착하면 <다 왔다>라고 말합니다.
목표가 없으면 마침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 마쳤는 지 못 맞쳤는 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은 반드시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목표가 분명하였습니다. 온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목표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바울은 이방인의 선교사로서 최종 목표가 있었습니다. 로마에 복음을 심는 것입니다. 당시 온 세계를 지배한 나라가 로마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온 세계를 지배하기 위하여 온 세계를 향하여 길을 닦았습니다.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복음이 그 길을 타고 온 세계를 향하여 뻗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의 생각은 그대로 맞았습니다.

로마 복음화는 온 세계 복음화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복음을 심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바울을 실고 로마로 가는 배는 유럽을 실고 가는 배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할 일을 다 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할 일을 마치고 하나님께 가는 행복감을 맛보고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장로님 아들이 미국에서 오랫동안 공부를 하였습니다. 박사 학위를 두 개나 받았습니다. 한국 모 대학 교수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개강을 앞두고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췌장암이었습니다. 발견 3개월 만에 하나님앞으로 가면서 마지막 말을 하였습니다. 생생가하게 기억합니다.
“아! 억울해!”
이렇게 마치지 못 하고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소망을 말했습니다.

스코트란드에 가면 개 무덤이 관광지로 하나 있다고 합니다. 무덤에 비석까지 있습니다. 제목은 <충견비>입니다. 무덤의 주인이 개를 길렀습니다. 사랑하여 주었습니다. 죽었습니다.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개도 무덤까지 따라 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 집으로 돌아 왔는 데 개만은 그대로 무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끌어 와도 도로 무덤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사람들이 개엑 무덤까지 먹을 것을 날라다 주었습니다. 그 개는 14년 동안 무덤을 지키다가 죽었습니다.

죽기까지 자기 할 일을 마치고 죽은 개 이야기입니다. 바울 사도도 할 일을 다 마쳤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없는 상없고 상없는 일없습니다.

3. 지키는 사람에게 상이 있습니다.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는 오직 한 길을 걸어 왔다는 것입니다. 믿음 하나 지키려고 지금까지 헐벗고 굶주리고 매맞고 고생을 하여 왔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하여도, 상황이 어떻게 바뀌어도 믿음을 지키고 죽기까지 걸어가는 삶은 아름다운 삶입니다.

날치라는 고기가 있습니다.
날치는 수면 위로 뛰어올라 가슴과 배의 지느러미를 펴서 공중을 활주하는 물고기입니다. 놀랄 이야기입니다. 한번 나르는 데 4. 5KM를 날기도 합니다. 어떤 때에 그런 힘이 생기는 것인가요? 두 경우에 그렇게 멀리 나른답니다. 하나는 다른 큰 물고기가 잡아 먹으려고 따라 올 때 그런 능력이 나옵니다. 또 한 경우가 있습니다. 즐거울 때 떼를 지어 자유롭게 공중을 비행하며 그렇게 멀리 나른다고 합니다.

캘리포니아 말리브에 있는 페퍼다임 대학교 졸업식에 나는 가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이가 꼭 와 달라고 초청하여 일부러 갔었습니다. 그 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천명 학생들이 학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평균연령이 40세 가까웠습니다. 고령의 졸업자 가운데 67세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는 10명의 자녀와 27명의 손자 손녀를 가진 할머니였습니다. 그 할머니가 학사 학위를 받으려고 단상에 올라 갔습니다. 환호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드디어 해내셨군요.”
“할머니, 잘하셨어요. 드디어 성공하셨어요.” 
졸업식이 끝났습니다. 그 할머니는 자기 목사님을 만나 격정에 못 이겨 눈물을 흘리면서 목사님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나에게 만약 믿음을 심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내가 좌절할 때마다 나에게 새 힘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시작하자마자 포기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환란과 어려움이 있어도 믿음을 굳게 지켜 왔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느 63살된 할머니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면서 목사님을 붙들고 말했습니다. 43년 전이었습니다. 상점에서 물건을 파는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10,000원을 주머니에 넣고 집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10,000원이 평생 자기를 누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 10,000원을 드릴 터이니 그 분을 찾아서 갚아 주십시오.”
목사님이 그 돈을 받자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내가 평생 믿음을 지켜왔는 데 그 것 하나 지키지 못 한 것같습니다. 이제야 마음이 시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이 그리 쉬운일이 아닙니다. 믿음을 지킨 이에게 의의 면류관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 성한씨의 <비비도>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동인 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무대가 영국입니다. 기독교가 부패하여 종교 재판이 성행할 때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비비도는 재봉직공이었습니다. 그는 성실하게 신앙생활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이단 재판에 회부되어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는 이였습니다. 황태자 헨리가 나타나서 비비도의 마음을 바꾸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비도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다고 다짐합니다.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바싹 마른 장작 위에 비비도를 묶어 올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 때 헨리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불을 꺼라.”
다급하게 불을 끈 후 헨리가 말했습니다.
“나는 오늘까지 양심이라는 것은 비겁한 놈들의 겉치장이요 정의는 권력의 버섯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런 것들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것을 내눈으로 보았다. 네가 무섭구나!”
그리고 풀어 주었습니다.
믿음을 지킨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직 전도만을 위하여 일생을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사형당하기 직전에 이렇게 고백하고 죽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미국 남북 전쟁이 치열할 때였습니다. 프레드릭스버그 전투가 가장 치열하였습니다. 양편이 치열하게 싸우다 보니 가운데 부상자들이 즐비하였습니다. 쌍방은 일단 뒤로 후퇴하였습니다. 그 때 북군 병사 한 명이 가운데로 막 달려 나왔습니다.

남군 지휘관은 사격을 명령하였습니다. 총을 겨누는 데 그는 물 병을 가지고 와서 부상병들에게 돌아가며 정신없이 물을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북군이거나 남군이거나 관계없었습니다.
적이거니 아군이거나 모두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사격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상병을 데려가기 위하여 1시간 휴전이 선언되었습니다.
남군 지휘관이 용감한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대 이름은 무엇인가?”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내 이름은 크리스챤입니다.”
일없는 상없고 상없는 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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