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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루살렘 교회회의 (행 15: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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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교회회의 (행 15:1-34) 
 
 
15장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교의 한 분파 같은 특성을 완전히 탈피합니다. 보편 교회의 확실한 기초를 놓은 예루살렘 교회회의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4절은 예루살렘에서 교회회의가 열린 배경을 설명합니다. 정체 모를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 안디옥 형제들에게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가르쳤습니다(1).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 가진 상태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며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비로소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이었지요. 이 일로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2a). “다툼” (stavsi", 스타시스)은 ‘반란’으로도 번역될 만큼 격렬한 저항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토록 강하게 반응한 것은 지금껏 바울과 바나바가 전했던 복음을 근본적으로 뒤엎어버리는 소위 ‘다른 복음’을 말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갈 1:8).

안디옥 형제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몇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했습니다(2b). 정말 이들의 가르침이 예루살렘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인지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의 전송을 받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베니게와 사마리아”를 지나면서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반응했습니다(3).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4)을 말했을 때는 다른 반응이 일어납니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했지요. “이방인에게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5). 이들은 외식하며 대적했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한 성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구원이란 선택받은 유대인이면서 믿음을 가진 자들이 받는 것이 당연한 것같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면 이제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개종시켜야 마땅하다고 여겼지요. 다툼과 변론은 안디옥 교회에서 발생했지만, 문제의 근원은 예루살렘 교회 안에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동안 유대인들끼리만 모여 있었을 때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지만, 복음이 이방세계로 전파되는 구속사의 진행과정에서 문제점이 드러났지요.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였습니다(6). 예루살렘 교회로서는 이제까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고민한 적도 없었던 문제였기에 “많은 변론”이 오갔습니다(7a). 그 후 베드로는 그들 모두가 분명히 알면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건을 예로 들어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7b-9).

예루살렘 교회는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곁에 있는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10장). 그때도 베드로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과 식사교제를 한 것이 문제가 되어 한바탕 소란했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고 함께 고백했었습니다(11:2-3, 17-18).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별되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이미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10)고 반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속하셔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있음을 알면서도 음식이 부족하고 물도 부족하다고 불평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고전 10:9a)한 사건으로 기록합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오직 믿음’을 통해 이방인을 인도하심을 인정하고서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면 하나님께 불평하는 일이지요. ‘왜 우리는 죽어라고 고생하며 율법을 지키다가 겨우 구원을 맛보았는데, 이방인들은 실컷 죄 가운데 지내다가 쉽게 믿고 구원 얻습니까?’라는 마음 깊은 곳의 불평이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됩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도록 유혹하며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 했을 때 주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마 4:7)는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아닌데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무작정 일을 벌여놓은 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리라 기대하는 것 또한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임을 알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도무지 질수 없었던 율법의 저주의 멍에로부터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도 아닌데 율법의 멍에를 매려고 열정을 내고 제자들의 목에 두려고 힘쓰면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대한다면 이 또한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오랜 관행으로 행해온 종교적 습관 속에도 하나님을 시험하는 무서운 문제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깊이 헤아리고 확인하는 것 없이, 일단 사업을 벌여놓으면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뒷수습해주실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하는 것 역시 스스로를 멸망케 할 무서운 태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구속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충분히 살피지 않거나, 정확히 분별하여 적용치 못하는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게도 됩니다. 교회에 다툼과 많은 변론이 생기면 성도에게는 큰 아픔과 슬픔이 되지만, 성령님께서는 이를 통해 감추어져 있던 문제를 발각 당하게 하시고 제거하셔서 교회로 하여금 한 단계 성숙하도록 이끄시기도 하심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결론적으로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11)고 선언했습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받습니다. 이점에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행위로 따지면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조차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의 수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덧입어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주 조금이나마 다른 사람보다 의롭게 살았기에 구원 얻었던 것처럼 주장하거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안식일을 지키든 유월절을 지키든 특정한 종교적 의식을 반드시 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무서운 죄가 됨을 명심해야겠습니다.

베드로의 설교 이후에는 무리들이 침묵하면서 바나바와 바울이 증언하는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들었습니다(12).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믿음의 문의 여셨는지를 들었을 것이고, 베드로가 경험했던 일이 이방인의 도시들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14:27).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 할례 받는 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려면, 바나바와 바울의 사역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고넬료 사건까지 전체를 부정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를 통해 이루어 오신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역주행하는 일이어서,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하나님을 시험했던 태도와 같아집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13)는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14)을 말한 “시므온” 베드로의 경험이 예로부터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주의 말씀”(15, 18)과도 일치함을 증언합니다. 아모스 9:11-12절의 내용을 인용한 말씀 중에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는 구절을 헤아려 보면, 주님께서 다시 일으키실 사람들 중에 포함된 이방인들은 ‘개종한 이방인들’이 아닌 그냥 “이방인들”입니다(16-17). 이방인으로 존재하면서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지요. 야고보는 개종하지 않은 상태의 이방인 성도를 유대인 성도와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19)라는 말은 구원을 위해 믿음 외에 어떤 종교적 행위를 더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20)을 권한 까닭은 매 안식일마다 모세의 율법을 듣는 유대인들의 신앙 양심에 거리끼지 않도록 존중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21). 명령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형성된 독특한 종교 문화 전통을 가진 유대인 성도들과의 원만한 교제를 위해서 민감한 그들의 양심이 가책을 받아 실족하는 일이 없도록 성숙된 처신을 해 주기를 바란 것이지요. 형제의 양심까지도 배려하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아름다운 태도이기 때문입니다(고전 8:13).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는 “유다와 실라” 편으로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결정된 내용을 편지로 보냈습니다(22-23). 안디옥 교회에 다툼을 일으켰던 사람들은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24)한 자들로 정죄했고, 바나바와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25)로 인정했으며, “성령과 우리”는 언급한 네 가지 권고 외에 다른 어떤 짐도 지우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고 판단했음을 알렸습니다(28). 안디옥의 형제들은 편지를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했고, 유다와 실라는 형제들을 권면하여 굳게 했습니다(31-32).

구원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나 차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공로로 덧붙이려는 사상이나 태도는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무서운 사단의 유혹인 것을 알고 맹렬히 물리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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