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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삼상 26: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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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삼상 26:18-25)


순창에 ‘돌 시인’이라고 불리는 박진식 시인이 있습니다. 왜 그분을 돌 시인이라고 부르냐 하면 그의 온 몸이 돌처럼 굳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는 7살 때부터 ‘부갑상선 기능 항진증에 의한 각피 석회화증’이란 희귀병에 걸렸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몸 안에서 칼슘이 너무 과다하게 분비되어 몸이 돌처럼 굳어진다고 합니다. 그런 끔찍한 병으로 인해 그는 9살  때부터는 거의 누워 지내야 했습니다. 13살 때부터는 몸에 축적된 석회가 관절에 엉켜 붙었고, 체내 욕창으로 몸은 계속 부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석회가 몸을 뚫고 나와 피부 곳곳이 터지면서 생살이 빨간 젤리처럼 핏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25살 때에는 극심한 통증과 함께 폐와 심장까지 석회화가 진행되어 몸의 30%가 마네킹처럼 굳어버렸습니다. 

한 번은 그의 어머니가 쇠꼬챙이로 몸 안의 석회를 긁어내다가 쇠꼬챙이가 휘기도 했습니다.그런 그는 죽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냥 죽기에는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는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자기 삶을 긍정하며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그런 질병과 고통 가운데서도 그는 영어와 한문을 공부했고, 많은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시를 쓰기 시작했고, 굳어버린 양손에 볼펜을 끼워 그것으로 컴퓨터 자판을 치면서 마침내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라는 제목의 자서전적인 책과 함께 여러 권의 시집과 에세이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라는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살기 힘들어 절망하신 분이 있다면 제 이야기를 읽고 부디 힘을 내십시오. 저는 꿈꿀 수만 있어도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참담한 현실에 처했어도 살아 있는 한 꿈을 버리진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꿈꿀 수만 있어도 행복한 인생입니다. ‘꿈꿀 수만 있어도 행복한 인생’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의 삶은 참 고달픈 인생을 살아갑니다. 다윗에게서 광야 생활은 아마 엄청난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젊었을 때부터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들을 수없이 지나쳐 왔습니다. 오랜 시간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면서 인생의 밑바닥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그는 어린 소년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입니다.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싸움터에서 그가 세운 전공으로 모든 이스라엘 앞에 추앙을 받던 영웅이었습니다. 너무 특출해 버리니까 왕으로부터 질투를 받아서 한 순간에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연단하기 위해서 주신 한 때의 괴로움이었는데 그 한때라는 것이 수십 년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의 연속된 삶속에서도 주저앉거나 절망의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10년 가까이 걸린 다윗의 도망자 시절, 수많은 긴박한 일들이 많았지만, 역시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은 두 번이나 사울 왕을 죽일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해 버린 일입니다. 7-9절에 보면 창 한 번, 칼 한 번에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라며 함께한 부하가 다윗을 부추겼습니다. 7-9절을 보겠습니다.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혔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참 쉽지 않은 결단이 아닙니까? 지난번 엔게디 동굴에서도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철호의 찬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살려 주었는데 이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합니까? 오히려 사울은 자기 생명을 살려준 다윗에게 감사는 못할 망정 미친개처럼 달려들지 않습니까? 사울이 얼마나 잔인한지 아십니까? 다윗에게 시집을 간 딸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상식밖의 비정한 사람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훈련된 군사 3000명을 모집하여 전국을 이잡듯 뒤지는 모습은 사람이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구나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 잔인한 사울을 죽일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아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 이런 일이 생기면 누구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하고 생각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눈 한번 쓱 감고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여기에 대해 누가 욕을 하거나 돌을 던지겠습니까?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결단을 합니다. 잠을 자고 있는 사울의 머리 곁에 있던 창과 물병을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아마 열이 받치고 기가 차서 기절할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런 행동을 하는 다윗을 이해를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이게 도대체 다윗이 제정신입니까? 여기 보세요. 다윗은 사울을 가리가리 찢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두 번이나 살려 주었습니다. 이제 이만하면 한번 소리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야! 당신 그렇게 살면 안돼!!” “내가 이처럼 너를 살려 주었는데 한번만 더 그러면 이젠 참지 않어!!” 하고 소리를 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19-20절에 보시면 청컨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인자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날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붙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그런즉 청컨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로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무슨 말입니까? “만약 당신이 나를 죽이려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당신의 칼에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당신의 욕망이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 앞에 벼룩같은 존재입니다.” 라며 오히려 애원을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빌고 있습니다. 오늘 이 모습을 보면서 누가 다윗을 손가락질 하겠습니까? 누가 바보라고 비웃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한 신앙인의 모습이고 정말 겸손하고 아름다운 지도자의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옛 성품과 고집들을 다 꺽으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다듬어 가십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신영복씨가 쓴 ‘처음처럼’이란 책을 보면, 바다에 대한 글이 나옵니다. “바다는 모든 시냇물을 받아들인다. 바다는 세상에서 제일 큰물이다, 그런데 또한 세상에서 제일 낮은 물이다. 큰물이 되는 길은 가장 낮은 물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다가 큰 이유는 낮아졌기에 그 엄청난 물을 수용하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의 자녀도 낮아져야 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 울다시피 애원하는 다윗의 외침 앞에 사울이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21절을 보세요.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다윗의 거룩한 용서는 사악한 적의 마음에도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얼마나 근사한 모습입니까? 물론 그렇게 갔다가도 금세 군사를 몰고 다윗을 잡으러 돌아오는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원수 앞에서도, 냉혹하리만큼 자기를 통제하며 언약을 붙잡고 결코 상황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힘든 세월 속에서도 다윗이 이 같은 결정으로 자신을 이기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관성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내 인생의 모든 것 되신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시선입니다. 나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그 비전을 가슴에 품고 그것을 향해 살았기에 어떤 고난 어떤 형편 속에서도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자세를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 

철야 예배 때 말씀을 드렸지만, 내려놓음의 이용규 선교사가 또 책을 한권 내게 되었습니다. 한 때 내려놓음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이 내려놓음이라는 말이 자기 비움이라는 말입니다. 이용규 선교사님이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쓰신 후에 그 2편으로 『더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쓰신 후에 선교사님이 많은 곳에 강사로 초빙되어 가시게 되었습니다. 가는 곳마다에서 종종 듣는 이야기가 ‘선교사님의 책을 읽고 내려놓기로 했습니다’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떤 사람은 ‘부자 되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청년은 ‘서울대학교 가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 가운데는 부자가 될 가능성이 없으니까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내려놓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서울대학교 갈 실력이 안 되니까 서울대학교 안 가겠다고 선언하면서 서울대학교를 내려놓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려놓는 것과 포기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내려놓는다는 것,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먼저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서울대학교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서울대학교에 갈 충분한 실력을 쌓았고 갈 능력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른 곳에 쓰신다면 서울대학교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 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서울대학교 갈 능력도 없으면서 서울대학교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내려놓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울대학교에 못가는 것이든지, 아니면 서울대학교에 갈 수 없으니까 가고 싶은 생각을 포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10억을 벌 수 있는 가능성이 없으니까 ‘나는 10억을 내려놓았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내려놓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진짜 내려놓는 것은 ‘10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를 위해 쓰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에 기쁨으로 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비워야 할 것 중에 가장 먼저인 것은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라는 것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만족해하며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열심히 한 것만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금식하면서 자신이 금식했노라고 자랑하고 싶어서 일부러 허약하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기도 많이 한다는 것을 알리고 자랑하고 싶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손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남들을 많이 도와주었지만, 도와주면서 자신이 이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그게 모두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가 무서운 것은 자신이 한 것을 자랑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큼 하지 못한 사람을 업신여긴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여러분, 열심히 봉사하시고 열심히 신앙생활하십시오. 

그러나 자기 의에 사로잡히진 마십시오. 우리는 겸손하게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교인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한 후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누가복음 17:10)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신앙적인 자기 의도 없습니다. 포기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의 삶을 열심을 다해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 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의를 만들지 않겠다고 열심을 포기하는 것은 게으르고 나태한 종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 때에도 그렇고,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일할 때에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고 모든 일에 열심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꼭 잊지 마십시다. 그 열심이 나의 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심히 한 후에는 열심히 했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과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고, 그게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만 비우면 우리의 삶은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실망하고, 짜증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내 마음을 비우기만 하면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실망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열심히 일한 후에 칭찬을 기대하기 때문에, 기대한 만큼의 칭찬이 되돌아오지 않으면 실망하고 섭섭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칭찬을 기대하지 않으면 칭찬해 주는 이 하나 없어도 섭섭하지 않습니다. 내가 선을 베풀고 나서 그것을 되받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가 나에게 되갚아 주지 않으면 마음에 미움과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런 마음을 비워버리면 그가 은혜를 잊는다 해도 미울 것도 없고 원망스럽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에게 하나님의 비전이 가슴 안에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29:18절의 말씀을 통하여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여기서 ‘묵시’라는 말이 곧 비전이요, 꿈입니다. '방자히 행한다'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거망동'을 의미합니다. 꿈이 없으면 인간이 경고 망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비전이란, 꿈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비전을 가진 사람의 시선은 오늘을 뛰어넘어 언제나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먼 곳에 시선이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거기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꿈이 없는 인간은 방자해집니다. 꿈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자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항상 목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삶은 방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꿈이 없으면 목회자이든, 교인이든, 어떤 인간이든 방자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꿈을 가졌다, 가지지 않았다 하는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결과는 이처럼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한 노숙자가 베고 자던 가방을 도둑을 맞았습니다. 경찰에 신고를 했고 수사 끝에 가방을 가져간 범인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방 안에는 1000만원이라는 돈이 그것도 현찰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경찰이 어떻게 생각을 하겠습니까? 돈의 출처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은 이 사람을 추궁했고 이 노숙자는 경찰 조사에서 "부모님으로부터 수십억원 대의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경찰도 처음에는 이 사실을 믿기 힘들었습니다. 재력가인 이 사람이 노숙생활을 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에서 입니다. 하지만 이 노숙자 명의의 계좌를 확인한 결과, 실제 50억 원 가량이 입금돼 있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처럼 재력가인 이 사람이 노숙생활을 한 까닭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그가 노숙을 한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이 사람은 삶에 대한 의지와 목표가 없어 노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노숙자인 이 사람은 젊은 시절 부모님의 재산을 물려받은 뒤 한때 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실패했고 현재 이렇다 할 직업이 없는 상태"라며 "더 이상 돈을 벌 이유도 없고, 삶에 대해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도 못해 지난해부터 노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할머니는 김밥을 싸서 번 이 만원으로 초코파이를 사가지고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에게 주며 행복해 느끼는데 왜 저 사람은 큰돈을 가지고도 삶이 공허합니까? 삶의 목표와 방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죄와 허물로부터 벗어나 부활의 능력을 입은 이 땅의 희망둥이 들입니다.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자기 의’와 욕심을 비워버린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비우면 단순해지고, 그 때 우리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가득 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비우면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비우면 바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비우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비워야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비워야 하늘의 은혜를 가득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비워야 하늘을 품을 수 있습니다. /비워야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비움은 결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비움을 연습해야 합니다. 내 손에 들고 있는 작은 것부터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내려놓음으로 찾아온 기쁨을 알 때에만 더욱 큰 것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비움에 채워지는 하늘의 풍요가 있음을 경험할 때에만 더욱 많은 것을 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우면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비우면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비우면 예수님으로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들이 모여야 살맛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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