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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와 소명 (레 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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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소명 (레 7:13)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 희생과 함께 그 예물에 드리되”(레 7:13) 

I. 본문해설 

본문은 지난주에 이어 화목제의 감사제에 올릴 제물로 유교병을 기록하고 있다. 유교병은 누룩을 넣고 만든 떡이다. 지난주에는 무교병을 감사의 재물로 올린 것을 해석하면서 누룩이 없는 떡을 아버지 앞에 바친 것은 거짓과 꾸밈이 없는 순수한 신앙을 예표 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렇다고 유교병이 의미하는 바가 거짓되고 외식되고 더러운 어떤 것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이러한 모순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누룩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전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II. 감사로 드릴 유교병 

A. 누룩 있는 떡 

신약 성경에는 15번 누룩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 중 13번은 부정적인 의미이며 2번은 긍정적인 의미이다. 먼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누룩은 크게 세 가지로 사용된다. 첫째는 거짓된 교훈이며 둘째는 진실 되지 못한 외식이다. 셋째는 부도덕한 악행이다. 넷째가 바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용례인데, 바로 복음의 영향력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이 되었다. 

어렸을 때 할머니께서 가끔 해주시던 빵이 있다. 시장에 가셔서 술약인 이스트를 사오신다. 밀가루와 함께 미지근한 물에 이스트를 타서 녹이고 물과 함께 그 밀가루를 반죽한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면 신기하게도 커다란 양푼 가득히 부풀어 오른다. 

B. 은혜에 대한 감사 

이 부풀어 오르는 밀가루를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고 한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술약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과 세상에 영향을 주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바지 해야 한다. 이것을 예표하는 것이 유교병이며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로 유교병을 드린 것이다. 그리고 이 유교병은 제사를 드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은 내가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하여 좋은 가나안 땅으로 너희들을 들어가게 하여 이 모든 것을 유업으로 누리게 만들어 주었으니, 이제 너희들은 새 사람, 새 백성이 되어 하나님 모르는 열방의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켜라. 마치 한 줌 밖에 안되는 누룩이 서 말의 가루를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여라. 너희는 소수지만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는 표인 것이다. 그리고 신약 시대가 되어서 예수를 통해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라고 하나님께서 이 화목제의 제사 위에 유교병을 올려놓게 하신 것이다. 

1. 하나님 나라와 소명 

여기서 구원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소명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 신앙을 자기에게 맞게끔 재해석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쉐퍼란 사상가는 “현대에 있어서 최고의 우상은 개인적인 풍요와 평안이다”라고 말했다. 이 지적은 뼈에 새길 정도로 사실이다. 왜냐하면 현대 사상이 심각하게 침투했기 때문이다. 현대 사상이란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고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무가치한 것이라고 하는 모든 도덕적인 기초를 허물어 버리고 부인해 버린 가운데 태어난 것이다. 

절대 가치를 잃어버린 현대 정신이 기독교 속에 스며들어서 성경과는 상관이 없는 형태의 신앙을 만든다. 그것이 아주 흉한 모습으로 오늘날 등장한 것이 번영신학이다. 예수 믿으면 무조건 복 받고 부자가 된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종교에 의지해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변형된 신앙은 순수한 술약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시대를 무엇이든지 규정해 보라고 내게 물으면 변질된 누룩의 시대라고 말하고 싶다. 누룩인지 알고 가루에 집어넣었더니 알고 보니 곰팡이 균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정직한 줄 알고 고용해 보니 뇌물 받고 탈세하고 온갖 부정부패의 더러운 일들을 자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곰팡이들을 사회 구석구석에서 볼 수 있다. 나라가 번영해 가면서 여기저기서 터지는 부정부패의 사건들과 사회적 명망이 있는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실망스러운 추문들 속에는 반드시 기독교 곰팡이들이 존재했다. 왜냐하면 누룩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죄를 짓고 부도덕하게 살면서도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자기도 한 사람의 피해자라고 하는 마니교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합당한 삶이 아니다. 그리고 오히려 성경은 그런 삶을 살면서도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진정한 참회와 돌이킴이 없는 신자의 삶은 그 사람이 신자가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2. 복음의 영향력 

기독교 역사를 관찰해 볼 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어디 있었는지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로 역사의 흐름에 따라 치우쳐 왔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의 본질이 인간의 지성에 있다고 믿어 지식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지성주의를 택했다. 그러나 지성주의를 택해도 삶으로써 윤리의 열매를 드러내지 못한 지성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참 본질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교리와 신학, 사상은 중요하지 않고 오직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하는 은혜주의를 택했다. 그래서 종교적인 체험을 추구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사상과 윤리로부터 단절된 은혜주의는 개인적인 만족을 위한 자기만족적인 영성으로 소비되거나 신비주의로 흘러갔다. 

또한 신앙의 본질은 의지에 있다고 믿으면서 사람들을 윤리적인 사람으로 내몰았던 윤리주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 셋 중 어느 것을 신앙의 본질로 알고 추구했던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모두 사라졌다. 잠깐 나타나는 반짝이는 불빛처럼, 참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보여주는 누룩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지는 못하였다. 

참된 기독교의 영성은 참으로 아는 것과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힘에 의해 떼어놓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형태의 신앙이다. 그것이 사상의 힘이고 은혜의 힘이고 윤리의 힘이다. 우리가 해야 할 시급한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또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대화하며 그들이 어둠 속에 있다가 빛을 발견하는 것 같은 효과를 누리게 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 믿는 누룩과 같은 사람들 속에 섞여 사는 가루와 같은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은 빛 자체이신 당신 자신께로부터 반사된 빛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성경이 어떤 것인지,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지, 나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이 돌이킬 수 없는 짧은 인생의 길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이 정신 줄 놓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17세기에 영국 키더민스터에서 목회하시던 청교도 가운데 리처드 벡스터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셨다. 그 분이 쓴 책 가운데 "Mother's Catechism"이라는 책이 있다. ‘어머니의 교리 문답’이라는 책이다. 어린 아이가 어렸을 때 엄마 무릎에 앉아 교리를 배우는 것이다. 그것은 엄마가 질문하고 아기가 대답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는 60-70페이지 이상 되는 책이다. 

그 교리문답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가야 우리 교리문답 배우자.” 아가가 대답한다. “엄마, 그게 뭐예요?” 다시 엄마가 대답한다. “이것은 성경 말씀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를 알려주는 하나님 말씀이란다” 그러자 아이가 묻는다. “엄마 다른 사람들은 그거 안 배우는데 나는 왜 그거 배워야 되요? ” 엄마가 대답한다. “얘야, 신경 쓸 필요 없다. 그 사람들은 다 짐승이란다. 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것을 배워야 한단다” 라고 말한다. 

아기들이 이것저것 궁금해 하는 나이가 됐을 때가 교리를 가르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가르칠 수 없는 것이며 두 번째는 알아도 자산이 그렇게 안 살기 때문에 양심이 아이에게 그것을 가르치라고 허락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자녀를 키우는 사람들은 짐승 하나를 사육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무엇인가 인간으로서, 기독교인으로서 살아야 할 기본적인 노선으로부터 심각하게 이탈한 체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신앙의 껍질만을 유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도, 은혜를 받아도, 기도를 해도 심지어 윤리적인 삶을 살아도 모두 자기만족과 평판을 위한 것이고, 자기의 행복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추구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진정한 누룩으로서의 삶이 아니다. 우리가 거듭나고 회개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지은 우리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혀 주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랑의 마음과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정신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울러 넣어주신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누룩으로서 누룩이 되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나서 정말 행복한 때를 되새겨 보면 지식의 밝은 빛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복음의 영향력을 많이 미치던 은혜의 시기일 것이다. 더욱이 이 세상은 순수한 가루가 아니다. 거기에는 이미 누룩이 아닌 것들이 퍼져 들어가서 곰팡이를 퍼뜨리고 있는 시대이다. 우리들은 가루를 발효시켜 부풀어 오르는 반죽이 되는 동시에 교회 안에 있는 곰팡이들과 더불어 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변화된 사람이 되어 참된 지식의 빛 아래서 참 사람다운 윤리적인 생활을 위해서 헌신하며 살도록 부르신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돌이킬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은혜를, 올바른 길을 걸어가며 분투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힘을 주셔서 가던 길을 걸어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화목제의 감사제 위에 유교병을 올려 하나님께 드렸던 이유이다. 

C. 희생제사와 함께 

이 유교병도 무교병과 마찬가지로 희생 제사 위에 드렸으니 이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고난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에 새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거룩한 고난을 기억하면서 온 마음을 다해 온 힘을 다해 우리가 한 줌의 순전한 누룩으로 가루와 같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우리의 구원의 소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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