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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열매(3) : 평화 (갈 5: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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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3) : 평화 (갈 5:22-24)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4)

성령의 세 번째 열매는 평화입니다. 헬라어로는 ‘에이레네’인데 성경에서는 ‘화평’, ‘평화’, ‘평강’, ‘평안’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에서는 각각의 단어들이 주는 느낌들이 약간씩 다릅니다. ‘평강’이나 ‘평안’으로 번역하면 마음이나 심리적인 안정의 의미가 강합니다. ‘화평’으로 번역할 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화목한 것을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평화’로 번역하면 전쟁의 반대이거나 사회적으로 조화로운 상태를 의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의 세 번째 열매인 ‘에이레네’는 실은 이 모두를 다 의미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에이레네’와 일치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샬롬’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인사를 할 때 “샬롬”하고 말을 건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힘들고 고단했기에 이 ‘샬롬’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전쟁 없고 평화로운 상태가 샬롬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가 화평한 것이 샬롬입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것이 육신의 샬롬이고, 근심과 두려움이 없고 마음이 평안한 것이 정신적 샬롬입니다. 지난 시간에 묵상한 사랑과 기쁨의 열매와 더불어 평화의 열매는 가히 신앙인들을 규정하는 대표적인 품성들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평화는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십자가는 평화의 상징이며 우리가 어떻게 평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로마서 5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10절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성경에서는 원수가 되었다고까지 말씀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지성소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또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고 서로를 화목케 합니다. 에베소서 말씀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2-16) 

이방인과 유대인은 서로 원수 된 관계였습니다. 서로 정죄하고 심지어 서로 악수나 식사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아래서 이방인과 유대인은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 민족과 신분의 경계를 넘어 교회 안에서는 모두가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 하나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또한 평화가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주님이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던 때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이었습니다. 배신과 죽음과 근심과 두려움이 지배하던 때에 예수님은 오히려 평화를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우리 안에 평화의 영으로 오신 성령님께서 이를 가능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이 모두가 다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평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나던 날 밤 허다한 천군천사들이 이렇게 찬양을 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우리가 받은 복음은 평화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이웃과, 내 자신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이 평화를 주셨습니다. 평화의 주님은 우리들 또한 세상에 나가 평화의 사람들로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자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불편하게 하고 원수가 되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2) 우리는 그래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며 죄를 지었을 때는 곧 바로 회개하고 이에서 떠나야 합니다. 죄를 지으면 부끄럽습니다. 죄를 지으면 두렵습니다. 자꾸 하나님을 피하게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저질렀던 아담은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하며 하나님을 피했습니다.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려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분께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야 우리 마음에 평화가 주어집니다. 우리 마음에 먼저 평화가 주어지지 않고는 다른 사람과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상처와 쓴 뿌리를 하나씩 치유해 가야 합니다. 이것들이 우리를 얼마나 자주 넘어지게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그릇된 욕망들이 작용하지 않도록 제어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불화의 마귀가 우리 마음과 인생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우리 자신의 가난함과 연약함을 고백함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물은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고 모이듯이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사람의 마음 가운데로 하나님은 흘러 들어오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시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셔야만 우리에게 평화가 주어집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으로 만족하기까지는 안식이 없습니다.


마음의 평화

현대인들은 많은 일들과 생각으로 그 마음이 평안하지 않습니다. 내 자신을 들여다보십시오. 내 마음은 호수같이 잔잔합니까? 아니면 거친 파도처럼 출렁대고 있습니까? 

옛 사막 수도사들의 일화입니다. 세 친구 수도승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자가 좋아 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한 친구는 “평화를 만드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에 감동을 받아 갈등하고 반목하는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일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또 다른 친구는 병자들을 고치고 돌보는 일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친구는 그저 광야에 가서 조용히 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자기 길을 찾아 흩어졌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를 심는 일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몹시 절망에 빠져 두 번째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 역시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쳐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광야로 간 세 번째 친구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는 사막에 암자를 짓고 조용히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두 친구는 자기들이 겪었던 일들을 하소연하며 이 암자에서 홀로 사는 동안 얻은 것이 뭐냐고 세 번째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그릇에 물을 따르면서 그 안을 들여다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안에는 혼탁한 물이 출렁이고 있었기에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이제 다시 그릇 안을 보게!” 그릇 안을 다시 들여다 본 두 친구는 물이 고요해지고 맑아져 그 위에 자기들의 얼굴이 비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세 번째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머무는 이는 불안과 혼란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네. 그러나 내적 고요를 지키며 사막에 거한다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될 것일세.”

우리 마음에 평화가 없는 이유는 혼자 있는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세상의 소리와 염려가 우리 마음을 흔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과 TV를 통해서 우리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소리들이 들어옵니다. 이제는 어디든 인터넷과 연결되어 있기에 혼자 있는 시간은 더 줄어들었습니다. 여기에 요즘은 스마트폰이란 것이 생겨 걸어 다니면서도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립니다. 지하철이나 식당에 가면 사람들이 옆 사람은 신경쓰지 않고 부지런히 스마트폰 화면을 쓸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가 즉각적인 소통을 위해서는 좋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 마음은 더 여유를 잃고 있습니다. 가끔은 핸드폰이나 TV가 없고, 인터넷이 끊긴 세상을 상상해 봅니다. 그냥 평상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며 상상에 빠지던 때가 더 평화로웠던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는 얼마나 많은 소리가 있고 광풍들이 부는지 모릅니다. 성경에서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 규정하는 것들입니다. 경쟁과 권력과 명예와 인정이라는 세상의 소리, 정치의 바람, 쾌락의 바람에 노출될수록 이것들은 더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바깥의 여러 문제로 시달린다면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가끔은 이것들을 과감히 끊어버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겉에서 부는 바람이 아니라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평화를 찾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 큰 광풍이 불어서 배에 물이 차고 파선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잠든 예수님을 깨워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하자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마44:39)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면 평화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잠들어 계시고 바람과 파도만이 친다면 우리는 흔들리고 불안할 것입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우리 영혼 위에 울리길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평화를 얻습니다.


이웃과 누리는 평화

평화는 이웃과의 진정한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들의 만남은 매우 피상적인 만남들입니다. 내 자신의 마음의 공간을 열어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인사하고 웃고 있을 뿐입니다. 내 공간과 시간을 파고드는 것을 도무지 용납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웃을 대할 때도 경쟁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를 따지고 있으면 우리에게 평화가 없습니다. 현대인들이 외로운 이유는 이런 진정한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향하여 마음을 여는 사람에게 축복이 주어집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낯선 손님을 정성껏 대하고 음식을 내어 주었을 때 복을 받고 자녀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생면부지의 사람이었지만 강도만난 사람을 위해서 하루를 허비하고 자신의 재물을 내어놓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성경에 기록된 위대한 선행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엠마오로가 던 두 제자는 자기와 함께 한 낯선 사람과 마음을 열고 대화하고 함께 식사까지 했을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결국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헨리 나우웬 이라는 분은 『상처받은 치유자』란 책을 쓰고 하바드와 예일 대학 교수를 지낸 현대의 대표적 영성가입니다. 이 분이 노년에 대학교수 자리를 버리고 캐나다 토론토의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라는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이 공동체는 6명의 장애인과 4명의 봉사자가 함께 사는 공동체입니다. 이곳에서 나우웬은 아담 이란 장애인을 돌봅니다. 아담은 지체 장애에 정신 장애 청년이었습니다. 간질 발작도 일으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나우웬이 하는 일은 밥을 떠먹여 주고, 옷을 입히고, 이를 닦아 주고, 목욕을 시키는 일들을 합니다. 아담은 전적으로 무력하고 연약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아담이 나우웬에게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부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우웬이 아담 부모에게 “아담이 당신에게 해준 일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그의 부모는 “그 애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었지요. 우리의 평안의 아들이지요”

이 평화는 어떻게 주어진 것일까요? 무엇보다 아담이라는 장애아 청년의 시간에 맞추다 보니 삶의 속도가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담이라는 한 사람만 바라보기 때문에 마음이 단순해졌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무기력하여 그를 바라볼 때 모든 이해관계나 경계심이 풀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담 한 사람만 온전히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긴장하고 경계하며 바쁘게 살아왔습니까? 온전한 평화는 온전한 만남 가운데 있습니다. 

인도 콜카타의 성녀 마더 테레사를 만났던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이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얼마나 피상적이며, 또 딴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까? 평화는 온전한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 곧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영어로 compassion인데 이는 com(함께)와 passion(고통)의 합성어입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데서부터, 마음을 나누는 데서부터 평화는 시작이 됩니다.


평화의 사람들

한국사회는 폭력이 만연합니다. 분단과 전쟁으로 말미암아 큰 폭력을 경험한 후 일상적인 폭력은 둔감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군사 문화가 여전히 사회에도 만연합니다. 직장과 대학가에도 구타와 같은 폭력이 있습니다. 가정에도 학교에도 폭력이 있습니다. 술 문화도 매우 거칩니다. 폭탄주가 무엇입니까? 언론이나 정치권의 언어폭력은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인격 살해 수준의 말을 하고 진실을 왜곡합니다. 인터넷의 폭력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여기에 빠른 성장을 추구하다보니 사람을 도구화하며 독하게 몰아세웠습니다. 경쟁 사회에서 서로를 적대시하는 태도를 배우다 보니 인격적인 만남은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장은 경쟁과 긴장으로 스트레스 쌓이는 곳이지 만남과 사랑과 기쁨과 감사와 기대가 있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말이나 사회 분위기가 평화로운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남북한 간에도 전쟁과 갈등이 없고 평화로운 땅을 이루어야 합니다. 계층 간에 갈등이 없고, 종교나 이념으로 인해 혼란스럽지 않은 평화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우리의 기도 제목입니다. 신앙인들은 무엇보다 평화를 만드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얼마나 평화를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이들은 평화를 사랑해서 폭력과 살인이 만연한 군대를 기피하기도 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병역거부로 순교자가 된 사람 중에 테베사의 막시밀리아누스가 있습니다. 군인 가정 출신인 그는 295년 입대를 강요받았지만 “기독교인으로서 남을 해칠 수 없다”며 거부하다 21살의 꽃다운 나이에 순교했습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기독교의 평화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법정에조차 가지 않으려는 평화의 아들이 어찌 전투에 참여하겠는가. 자기 자신에게 가해진 불공평한 가해조차 보복하려 하지 않는 이가 어찌 족쇄, 감옥, 고문, 처벌과 관계를 맺겠는가. 예수 이외의 그 누구를 위해 보초를 서겠는가.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생명의 진영에서 어두움의 진영으로 간다는 것 자체는 이미 죄악이다”

절대적인 평화주의를 지지하여 군대를 거부했던 것은 여호와증인의 전통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정신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스님들이 군대를 가는 것입니다. 미물이라도 죽일 수 없어 육식을 금하는 스님들이 어떻게 총을 들 수 있습니까? 남북분단 상황이라 할지라도 불교의 절대적 신념과는 상반된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이런 평화주의는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이후 세속 권력과 결탁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유태인을 탄압하고 이단들을 배척하고 야만인들을 멸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공연히 성전, 곧 의로운 전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십자군 전쟁이라는 가장 폭력적인 형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군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필요악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필요할지라도 교회는 폭력을 지지할 수 없습니다. 십자군이나 성전 개념은 구약의 개념들입니다. 우리는 신약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신약 시대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희생하는 것입니다. 폭력보다는 자기희생과 사랑과 낮아짐을 통하여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에 대한 분명한 신념과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헨리 나우웬은 “평화 만들기는 모든 기독교인의 전적인 사명이다. 평화 만들기는 모든 기독교적 임무 중 가장 우선순위이다.”고 말합니다. 실제 그는 이를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1965년에 마틴 루터 킹이 이끄는 평화행진에 참여하였습니다. 19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 연설에 나섰고, 핵잠수함 기지를 찾아가 평화미사를 올렸습니다. 1980년대에는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의 콘트라 전쟁에 반대하여 니카라과 국경에서 열린 평화행진에 참여했습니다. 1991년에는 걸프전쟁 전야에 워싱턴에서 반전 연설을 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한국에서 활동했다면 아마 ‘친북좌파, 반미주의자’로 몰렸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머릿속에만 있고, 행동 없이 은혜 받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평화로 가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끔 평화가 무력해 보이며 폭력의 유혹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중에 <인 어 베러 월드>가 있습니다. 덴마크 영화로 금년도 골든그로브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모두 석권한 영화입니다. 주제는 복수와 용서입니다. 주인공 안톤은 아프리카 난민 캠프에서 무료 봉사를 하는 인도주의적 의사입니다. 안톤은 평화에 대한 신념이 매우 투철해서 임산부의 배를 가르며 내기를 하는 악랄한 반군 지도자마저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치료를 해줍니다. 문제는 본국에 있는 자기 아들에게서 발생합니다. 아들 엘리아스는 천성이 착해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맞아도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엘리아스에게도 변화가 생깁니다. 크리스티안이라는 한 친구가 전학 오게 되는데, 크리스티안은 자기 엄마를 뇌종양으로 먼저 보낸 상처투성이 아이입니다. 이 소년은 자기를 괴롭히는 자에게 아주 무서울 정도로 독하게 복수해서 아무도 자기를 건들지 못하게 합니다. 크리스티안은 엘리아스를 괴롭히던 덩치 큰 아이에게 아주 심한 복수로 보복합니다. 둘은 이렇게 해서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 안톤이 이 아이들과 산책을 나갔다 어느 불한당과 마주쳤습니다. 아이들의 사소한 다툼이 어른들이 다툼으로 번졌습니다. 이 불한당은 안톤의 뺨을 때리지만 안톤은 이에 대항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복수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보이자 안톤은 비폭력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 불한당의 가게에 가서 사과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불한당은 사과는커녕 이번에도 뺨을 여러 대 때립니다. 그러자 안톤은 “저 사람은 졌다. 폭력 밖에 쓸 수 없는 취급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며 돌아옵니다. 

그러나 두 아이는 아버지의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두 소년은 직접 복수하기로 결심합니다. 사제 폭탄을 만들어서 이 불한당의 차를 폭파시키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수로 대신 엘리아스가 중상을 당하고 맙니다. 이 때문에 괴로워한 크리스티안은 자살을 시도하지만 미수에 그칩니다. 한편 평화주의자 안톤 또한 위기에 봉착합니다. 고쳐주었던 반군지도자가 반군들의 폭력으로 배가 갈려 죽어간 여자 아이를 보며 조소하는 장면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이 모습에 화가 난 안톤은 이 반군지도자를 밖으로 쫓아내 버립니다. 그러자 이 반군지도자는 사람들에 의해 몰매를 맞고 죽고 맙니다. 안톤은 자기의 평화주의적 이상이 깨진 것에 고통스러워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평화의 이상이 실현하기 어려운 과제임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복수와 폭력의 결과는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폭력의 결과 엘리아스는 중상을 당하고 크리스찬은 죽음의 위기에 몰렸습니다. 불한당은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반군지도자는 자신의 인간성은 파괴되었고, 늘 자신의 2인자가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불안감을 느껴야 했으며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평화의 길은 이처럼 어렵지만 그래도 평화에 대한 이상을 굳건히 부여잡는 사람들이 있기에 최소한도 인간 사회가 극단적인 악으로 치닫지는 않았습니다.

평화의 길은 어렵지만 포기할 수 없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본질이 바로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우리 인간 사회의 문제들에 던져주신 해결책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공감입니다. 십자가는 불의와 폭력에 대한 항거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가진 연약함과 폭력성에 대한 하나님의 이해입니다. 십자가는 비폭력과 희생으로 어떻게 평화를 이룰 수 있는가 보여준 주님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평화를 경험하였습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들이 세상에 나아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지막 날 우리가 주님께 드리고,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우리 인격의 열매는 이 평화의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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