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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빚진 자가 되어 (롬 1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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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빚진 자가 되어 (롬 13:8-10)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인 1984년, 파키스탄에서 40세의 한 젊은 한국인 선교사님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우리 교단 총회가 파송한 정선균 선교사님입니다. 정선균 선교사님은 전남 고흥 ‘거금도’라는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주 어렵게 공부를 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정식 중학교도 다니지 못했고, 여수의 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성경 야학교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성실함과 신실한 믿음을 옆에서 지켜보던 교인들이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의 도움으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고, 결국 목사가 되어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공부를 할 수 없었지만 주변 여러 사람들의 사랑의 손길을 통해서 공부를 하게 되었기에, 그는 늘 사랑에 빚진 마음을 갖게 되었고, 빚진 마음으로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방글라데시에 이어 파키스탄에서 선교사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파키스탄에서 신학교를 세우고 14개의 교회를 세우는 등 열성적으로 주님께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헌신의 결과는 그에게 건강의 악화를 가져왔고, 결국 B형 간염으로 인해 40세의 젊은 나이에 머나먼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가난 때문에 무던히도 고생을 했고, 장성해서는 부귀영화 한 번 누려보지 못하고 사랑에 빚진 자로 살다가 40세의 젊은 나이에 조국의 땅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이국의 땅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정 선교사님에게서만 보여 지는 삶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생명을 바쳐 헌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국땅에 가서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며 고생을 자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부귀영화 누리고픈 욕망을 스스로 거부하고 낮고 천한 자리에서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시대에도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들이 왜 안락하고 평안한 삶을 그런 고생을 자처하며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모두 파키스탄에서 40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의 길을 간 정성균 선교사님과 같이 스스로를 ‘사랑에 빚진 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빚진 자의 마음이 그들로 하여금 안락한 길을 내려놓고 고생의 길도 마다하지 않고 기쁘게 그 길을 가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하여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 모두 빚진 자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빚진 자입니다. 그럼 우리는 누구에게 어떤 빚을 졌습니까? 그건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 빚진 자입니다. 평생을 갚아도 값을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의 빚을 우리는 하나님께 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생명의 빚을 졌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지옥이 예약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을 맞바꾸어,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 은혜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이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생명의 빚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그 생명의 빚을 너무 자주 잊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우리가 생명 얻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는 의당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의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얻은 이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잊기 때문에 사랑과 생명의 빚진 자라는 사실을 망각하며 삽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꾸어 얻은 귀한 생명인데, 우리는 그 귀중함을 잊고 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영생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입니다. 천하를 다 준다 해도 자기의 생명과 바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그 귀한 생명에 하나님께서 영생을 선물로 주셔서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만도 귀한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을 선물로 주셔서 영원한 생명이 되었으니,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이 영원한 생명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이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귀한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때에 우리는 얼마의 값을 지불했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를 하나님께 내놓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때에는 우리에게 무엇 하나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시고, 누구든지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그 귀한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을 희생하시고 주시면서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우리가 어떤 값을 지불하고 영생을 얻었으면 우리는 빚진 자가 아닙니다. 정당하게 값을 지불하고 얻은 것은 빚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값을 지불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거져 주셨기 때문에 빚진 자입니다.
  
우리가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물건 값을 지불하고 물건을 가져오면 우리는 그 가게에 빚을 진 것이 아닙니다. 값을 다 주었기 때문에 빚이 없습니다. 그런데 물건은 가져왔는데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가게에 빚을 진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가게 주인이 돈을 안 받겠다고 해도 은혜의 빚을 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빚을 진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거져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빚은 진 것입니다.

그것을 마태복음 18장에서 이렇게 비유로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임금님께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그 돈은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 입니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노동자가 20년 동안 꼬박 벌어서 한 푼도 쓰지 않아야 모을 수 있는 돈이 한 단란트입니다. 그런데 그는 한 단란트의 빚을 진 것이 아니라 일만 단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20만년 동안 벌어야 갚을 수 있는 돈을 빚진 것입니다. 아이들이 하는 말로 죽어다 깨어나도 갚을 수 없는 돈입니다.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돈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이 꼭 그와 같습니다. 죽어다 깨어나도 갚을 수 없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사랑의 빚을 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 그 어마어마한 빚을 하나님 당신에게 갚으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 빚진 마음을 가졌다면 그 빚진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이렇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이것일세.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찬송가 314장 1절) 여러분, 진심으로 이 찬송을 부르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지금보다 더욱 사랑한다고 찬양했는데, 어떻게 더 사랑하시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형제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내 이웃을 더욱 넓은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내 주변의 형제를 사랑합니다. 그 형제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줄만큼 사랑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 중의 한 명인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선교사님이 그런 분 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1885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선교활동을 하던 아펜젤러 선교사님이 1902년 6월 11일 호남지역을 선교하기 위해서 군산항에 도착할 즈음, 선교사님이 타고 가던 배와 다른 배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 충돌사고로 이화학당에 다니던 여학생 두 명이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 아펜젤러 선교사님은 그 여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고, 결국 한국 최초의 선교사였던 아펜젤러 선교사님은 마흔 넷의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당시 미국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며 이렇게 말 했다고 합니다. “아펜젤러는 총명하고 잘 생긴 사람이다. 미국에서 얼마든지 장래가 보장된 사람이었다. 그가 낙후된 한국에서 죽은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왜 장래가 보장된 총명한 미국의 젊은이가 박해를 받는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해야 했고, 여학생을 구하려다 귀중한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불모지인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한 것도, 그리고 마흔 넷의 젊은 나이에 바다에 빠진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것도 다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게 만들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다에 빠진 여학생을 구하려다 자신의 목숨을 잃는 순교의 자리에 서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빚진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게 하나님께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는 사람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채권자형으로 사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채무자형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채권자형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아이들 가운데도 부모님이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는 생각하지 않고, 부모님이 자신을 낳았으니 길러주시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지 부모님을 졸라서라도 얻어내려고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자라다보니 나중에는 자신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다고 부모님을 살해하는 경우까지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을 기를 때에 부모가 자식에게 해 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식들이 부모님의 은혜를 알도록 해줘야 합니다. 

채권자형으로 사는 사람은 직장생활을 할 때에도 직장이 자신을 먹여 살려줄 책임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신이 수고한 것도 있지만, 자신이 일한 것에 대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채권자의 마음으로 직장생활을 하면 많은 문제가 야기 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노사문제가 잘 풀려지지 않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채권자형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들이 모두 채권자의 마음으로 직장생활을 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회사로부터 더 많은 돈을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하는 대신 투쟁을 해서라도 더 받으려고 합니다. 자신을 뽑아 일하게 해 준 것에 대한 감사는 다 잊어버리고 받아야할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채권자형으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언제나 불평 속에서 살아갑니다. 채권자형의 자식은 부모님이 자신에게 충분히 베풀어 주지 못한다고 불평합니다. 채권자형의 마음으로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수고한 것에 미치지 못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평이 생겨나고 불만이 마음속에 가득 차게 됩니다. 거기에는 기쁨이나 고마움이 없습니다.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가 없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채권자형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도에 무조건 응답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에 응답해 주시되 꼭 자신이 요구한대로 응답해 주셔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섬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으면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여러분, 채권자형으로 인생을 살지 마십시다.

채권자형과는 반대로 채무자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채무자형의 사람은 ‘나는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께도 빚을 지고 있고, 친구들에게 빚을 지고 있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교회에 다녀도 교회와 교우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으로 다니고, 하나님 앞에서도 늘 빚진 사람처럼 - 빚을 갚는 심정으로 살아갑니다. 직장을 다녀도 빚진 마음으로 일하면 일하게 해 준 것에 감사하고, 더 열심히 섬기지 못해 미안하고, 그런 자신을 계속해서 일하게 해 준 것에 감사하며 직장생활하게 됩니다.
  
그래서 채무자형으로 사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자신이 더 베풀지 못하고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해서 늘 안타까울 뿐입니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이나 교회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미안할 뿐이고 감사할 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유형에 속한 사람입니까? 채권자형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채무자형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채무자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신앙인입니다.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기에 그 크신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부모님께서 내가 기대한 것만큼 내게 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모님의 한없는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 아니면 누가 당신을 구제하겠어. 나에게 고맙게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당신이 나 같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결혼해 주었으니 감사할 뿐이지요. 당신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 평생 장가도 못 갔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해야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이구요.

여러분, 아직도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지 못해서 뭔가에 갈급해 하며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채권자형의 사람은 아직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고, 칭찬 받고 싶어 합니다. 허전한 마음을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채무자형의 사람은 작은 것으로도 마음이 가득 채워집니다. 그래서 감사하게 됩니다. 작은 것에도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무엇인지를 기쁘게 고민하며 삽니다. 형제들과 이웃에게 더 베풀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으로 삽니다. 그게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그게 복 받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받을 때보다 줄 때에 더 행복합니다. 채권자형의 사람은 사랑을 베풀 때에 느끼는 그 진한 감동을 알지 못합니다.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에 욕구불만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들과 갈등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런 마음 때문입니다.

개미에게는 위가 두 개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식을 저축해 두었다가 배고픈 다른 개미에게 나눠주기 위해서 저장해 두는 곳입니다. 서로가 배가 고픈 다른 개미에게 나눠줄 위를 하나씩 갖고 있기 때문에, 개미 중에서는 굶어 죽는 놈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모두 사랑에 빚진 자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 사랑에 목말라하는 사람이 없어질 것입니다. 세상 살기가 힘들어서 자살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상처받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사랑에 빚진 자로 살아가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가정 식구들에게 빚진 자로 살면 가정이 깨어지는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빚진 마음으로 그 빚을 갚으며 살아가면 내가 있는 그곳이 천국이 될 것입니다. 내가 있는 가정이 천국이요, 사랑에 빚진 자로 살아가는 내가 있는 내 직장이 천국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에 빚진 자로 살면 우리 교회는 전주에서 - 아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소문나게 될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이 빚진 자로 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지역이 사랑으로 가득한 곳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은행에 빚을 졌는데 갚지 않으면 빚을 갚으라고 계속해서 독촉장이 날아옵니다. 갚지 않으면 안 됩니다. 파산신청을 하지 않는 이상 빚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행에 빚을 지면 어떻게 해서든지 갚으려고 합니다. 빚은 그만큼 우리에게 부담을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로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행처럼 우리에게 빚을 갚지 않으면 신용불량자를 만들겠다고 독촉하지는 않으십니다. 은행처럼 재산을 압류하겠다고 협박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수록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을 끌어안고 있으면서 아무런 부담 없이 안일하게 생활한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무감각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성이 살아 있고 신앙이 살아 있다면 사랑에 빚진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부담감 때문에 지금보다 좀 더 열심히 사랑하며 섬기며 살아가기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빚진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내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구약성경 아가서에 보면,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병이 날 지경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아가서 5:8) 진정한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픈 열망 때문에 병이 날 지경이 되어야 합니다. 내 형제와 이웃에게 그 사랑을 베풀지 못해서 병이 날 지경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사랑에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면 내 가정, 내 직장, 우리 교회, 내가 있는 그 자리가 천국으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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