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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보는 것은 (삼상 16: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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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보는 것은 (삼상 16:6-13)


노숙자 생활을 하는 50억 자산가가 있다하여 세간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인천 중부경찰서에 따르면 노숙자 A씨(52)는 인천시내 공원과 회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중 가방을 도난당하고 경찰에 신고하였답니다. 그런데 찾은 가방 속에 500만원 금장시계와 현금 천만원이 들어 있음을 수상히 여긴 경찰이 조사하는 가운데 50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노숙자 생활을 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론에 자신이 공개되어 앞으로 노숙자 생활이 쉽지 않게 되었다고 항의를 하였답니다. 

젊은 시절에 부모로부터 부동산을 상속받아 50억의 자산가가 된 그는 천만원이 넘는 이자로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숙자 생활을 택하였습니다. 이유는 호텔이나 여관은 감옥과도 같아 편히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공원에서 돈 가방을 베개 삼아 잠자는 것이 더 좋았다고 말합니다. 정기적으로 받는 은행이자를 가방 속에서 넣고 다니다가 꺼내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밝혔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그의 모습이 자유를 추구하는 기인(奇人)과도 같았다고 전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되겠다는 묘한 교훈을 남기는 사건입니다.

중국의 여불위(呂不韋)는 사람을 판단하는 육험론(六驗論)을 말합니다. 사람을 등용할 때 여섯 가지를 시험해 보는 방법으로 기준을 삼는다는 이론입니다.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 외모나 재능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지식, 경험, 기술, 재력을 가지고 함부로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됨입니다. 사람됨이 잘못되면 재능이나 지식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불위는 여섯 가지 기준을 말합니다. 

첫째, 사람이 즐거울 때 얼마나 즐거워하는가? 둘째는 기쁠 때 얼마나 그것을 자제할 수 있느냐? 셋째, 괴로울 때 얼마나 참아내는가? 넷째로, 두려울 때 얼마나 대범할 수 있는가? 다섯째로, 슬플 때 얼마나 스스로 삭일 수 있느냐? 여섯째로, 화가 났을 때 얼마나 개의치 않을 수 있는가? 자극을 주고서 그 자극에 동물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일수록 쓸모없는 사람이요, 그 자극을 자제하는 사람일수록 쓸모 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만이 거물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을 잡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상황은 이새의 집에서 이루어진 장면입니다. 사울 왕을 버리신 하나님께서 사무엘로 하여금 이새의 아들 중에서 기름 부을 왕을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사무엘은 장자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고 말씀하시며 들에서 양을 치는 막내 다윗을 택하라고 명하십니다. 용모와 신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신 결과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마음에 맞는 자로 여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믿음을 보느니라

미국 켄터키주 살렘 (Salem)에 있는 광산에서 바위가 무너져 내려 5명의 광부가 갱 속에 갇히는 끔직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네 명의 광부는 작업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고, 다른 한 명은 갱이 무너질 위험에 있으니 빨리 나오라고 전갈을 주려고 들어가다가 모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갱 속에는 빛도, 물도, 양식도 없었습니다. 죽음에 처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찬송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들의 찬송과 기도는 계속 되었습니다. 53시간이 지난 주일 아침, 그들은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구조된 광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계속 기도했습니다. 앉아 있을 힘이 없어지자 누워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찬송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했을 때 멀리서 빛이 비춰오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갱 속에서 발견된 그들의 모자에 적혀있는 글귀였습니다. “우리를 발견했을 때에 우리 몸이 이미 시체가 되어 있더라도 슬퍼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구원받아 하늘나라에 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믿음, 그 중심의 믿음을 하나님이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식이나 경력, 학벌, 혈통이나 가문 따위를 보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십니다. 

사무엘상 17장 37절입니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위기를 만날 때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위기 때 일수록 더욱 빛나야 합니다. 

혹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겉모양만 믿음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변 사람들이 볼 때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보이나 알맹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위기를 만났을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예수께서 중풍병이 든 친구를 들것에 메고 와서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리던 이들에게 보신 것도 믿음이었으며 그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하인의 병을 고쳐주셨으며,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낫을 것이라고 믿었던 혈루증 걸린 여인도 그 믿음을 보시고 치료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중심의 믿음을 보시고 시작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겸손을 보느니라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는 배움도 부족하고 다리를 저는 장애의 몸을 가지고 있었으나 수도사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여러 번 수도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번번이 수도원으로부터 거절되었습니다. 마침내 48세에 겨우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실망을 하게 됩니다. 수도원에서 그에게 시킨 일은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찮은 일상 가운데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겸손함으로 낮아진 로렌스는 하나님과 대화하기 시작했으며 대화의 내용을 편지로 수도원 원장과 주고받았습니다. 그 내용이 훗날 ‘하나님의 임재 연습’ (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 이라는 책이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아픔을 겪는 동안 로렌스는 놀랍도록 주님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를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변했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가 식당에서 그릇을 닦고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이 그의 일상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로렌스는 경건함으로 엄숙함으로 정성을 다하여 그릇을 하나하나 닦고 있었다. 그리고 주어진 임무를 마치고 부엌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로렌스의 모습을 보았을 때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마침내 자기를 거절한 수도원의 원장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절입니다.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하나님은 사울이 겸손할 때에 왕으로 세웠지만 교만하였기에 버리시고 왕이 될 사람을 찾아 기름을 부으라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십니다. 사울 왕이 실패한 원인도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형들이 사무엘을 만나려가는 그 순간에도 양떼를 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않으면 겸손할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다. 내가 잘나서, 나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자랑하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30절에서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했습니다. 도리어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겸손을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용모와 신장이 아니라 그 중심에 겸손이 있는 가를 먼저 보십니다. 언제나 겸손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사랑을 보느니라

흑인 인권 운동가 넬슨 만델라(Nelson R. Mandela)는 백인 정부의 핍박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44세에 징역을 언도받고 27년 동안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젊음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기에 고통과 원한이 마음에 사무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델라는 72세에 감옥에서 나와 대통령이 된 후에도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서와 화해를 선언하고 흑백 인종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나라를 만드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자신을 괴롭힌 백인들에 대하여 증오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원수 갚는 일 또한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중심에 사랑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에 사랑이 있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사랑이 중심에 있을 때 평강이 임할 것입니다. 또한 중심에 사랑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사무엘상 30장 24절입니다.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다윗은 자신과 함께 한 군사들을 사랑하였습니다. 600명의 군사와 함께 출격하였는데 200명의 군사가 브솔 시내에 이르자 탈진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시내에 머물게 하고 400명의 군사와 함께 잃었던 아내와 아이들을 구출하고 전리품을 챙겨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브솔 시내에 이르자 전투에 참가한 400명의 군사들은 쉬고 있는 200명을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아 전리품 나누기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니 차별하거나 불평하지 말라고 합니다. 중심에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다윗이기에 하나님은 마음에 합한 자로 여기시고 도우셨습니다. 또한 다윗은 사울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식탁에서 자신과 함께 먹도록 하는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중심에 사랑이 있었기에 하나님이 다윗을 들어 쓰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중심에 사랑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강아지와 고양이는 애완동물입니다. 그러나 둘은 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고양이는 열 번 잘해 주다가 한 번 서운하게 하면 그것만 기억하고 주인을 멀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강아지는 열 번 서운하게 하다가도 한 번 잘해주면 그 한 번을 기억하고 주인을 따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아지가 고양이보다 더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열 가지 좋은 일이 있다가 한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것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고양이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아지처럼 한 가지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생각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후자와 같은 사람들을 더욱 더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복음서에 보니까 예수께서도 나다나엘의 중심을 보시고, 베드로의 중심을 보시고, 바울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부디 중심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낮아지는 겸손으로, 어떤 형편에서도 사랑을 나타냄으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여김 받아 언제나 쓰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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