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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론은 사랑입니다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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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사랑입니다 (눅 10:)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눅10:25-37)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눅10장 25-37절 말씀으로 ‘결론은 사랑입니다’ 이러한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이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위로와 은혜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기를 원합니다.   한번 따라 하시길 바랍니다. 
‘결론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한 주간 평안이 잘 지내셨는지요? 풍성한 가을 속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넘치지도 아니하고 모자람이 없는 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의 생활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성도 늘 풍성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성경본문 말씀이 기록된 누가복음은 의사인 ‘누가’가 기록한 성경입니다. 특징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마태복음이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말하고,  마가복음이 ‘종으로 오신 예수님’이고,   요한복음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말한다면 누가 복음은 ‘사람이신 예수님’ 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특히 힘들어하고 피곤해 하시거나, 눈물을 흘리시거나, 고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자주 보여집니다.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예수’ 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힘들고 어려울 때 누가복음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나와 똑 같은 ‘인간예수’ 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대화입니다. 주제는 영생(永生)입니다. 성도님 여러분은 ‘영생’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당연히 있지요.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영생을 누립니다.    ‘믿음’이 정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계속 말씀을 하십니다.  율법교사가 묻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율법교사는 영생을 얻는 것이 대하여 이미 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행함입니다. 이 율법교사는 영생을 ‘행함’으로 얻는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고정관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결론도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입니다. ‘이와 같이 하라.’ 즉 행함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성도여러분,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야 영생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이 아닌 행함으로 영생을 받는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율법교사의 대화는 이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 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질문자체를 시작한 것이 자기가 잘난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목수출신의 예수님이 갖가지 기적을 행하시지만... 율법의 지식에 관해서는 나보다 모를 것이다. 나는 정규과정을 마치고 공인 자격증을 획득한 율법교사가 아닌가! 제대로 배우지 못한 목수출신이 율법에 정통한 나보다야 더 많이 알겠느냐?  그러면 한번 질문을 던져보자.  가장 중요한 진리인 ‘영생(永生)’에 대해서 물어보자. 어떻게 대답하는가 들어보고   틀리면 내가 잘 가르쳐줘야지’ 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만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예수님은 그가 가장  자신이 있어 하는 율법으로 질문을 하십니다. 율법이 곧 구약성경,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것이 답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율법교사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역시 ‘행위’로 영생을 얻는다고 대답을 합니다.  어떤 ‘행위’로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까? ‘사랑愛’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다만 대충 사랑하면 안 되고,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해야, 그 정도로 사랑해야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절대 거짓말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나를 믿으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  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왜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 하십니까?   구약에서는 율법이 정답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 구원을 받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성도여러분, 구약의 결론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데... 어떤 행함인가요? ‘사랑愛’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 하고,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본질이요 율법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롬2;13)“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을 듣기만 하면, 참 좋은 말씀이야 하고 듣기만 하면, 영생이 아니라 地獄입니다. 율법대로 행하여야 의인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이 그 율법을 다 지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우리는 죄에 빠져서 율법을 행함으로는 도저히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안 되는 구나. 나는 죄인이구나’ 하는 것만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敬虔)하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절망(絶望)을 합니다. 내 속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내 속에는 ‘이기심’만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아는 사람들의 절망입니다.
 
하지만 이제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포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롬3;21-22)“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의를 소유합니다.  믿으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율법교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은 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진리를 모릅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사랑하라’ 입니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 하고,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본질이요 율법의 본질입니다.
 
그러면 성도여러분, 신약에서는 사랑은 안 해도 됩니까?  신약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면... 사랑은 안 해도 되고, 사랑은 잊어버려도 됩니까?  오직 믿음 믿음 하면 끝입니까? 
 
본문을 계속 보면 그 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웃이 이웃이지 다른 이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율법교사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아마도 옆집에 사는 사람을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의 옆집에는 로마사람이 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이 사람은 옆집에 사는 이웃이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누가 내 이웃인가’ 를 분명하게 하고 싶어 합니다. 비록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한 질문이지만 이 질문은 우리에게 참 도움이 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누가 내 이웃입니까?  우리 예수님께서는 참 이웃이 누구인지를,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할 내 이웃, 나를 영생을 얻게 해 줄 수 있는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질문을 드립니다. 강도 만난 자에게 이웃은 누구입니까?  사랑을 베푼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사람들이란 본래 이스라엘 민족인데 다른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혼혈입니다. 정통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혼혈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 보다 더 싫어하고, 더 더럽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강도 만난자의 참 이웃은 자기를 보고 그냥 지나간 제사장도 아니요, 레위인도 아닙니다. 자기에게 사랑을 베푼 바로 그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참 이웃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제사장, 레위인은 내가 어려울 때 나의 어려움을 보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 사람들은 제사장이고 레위인이지만 나의 이웃은 아닙니다. 나를 도와주고 살려준 사마리아 사람이 나의 이웃입니다. 

그러면 강도만나서 죽어가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나我’ 입니다. 내가 강도를 만나 다 죽어가는 주인공입니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당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는 곳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하나님이 임하시는 시온소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에 거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기쁨과 평강으로 살 수 있는 곳이며, 평화와 행복이 있는 곳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반면에 여리고는 세상의 향락을 의미하는 곳입니다.  실제로 여리고는 비옥한 땅이 있는 곳으로 산물이 풍성합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일이 풍성해지면 다음으로 발달되는 것이 바로 향락 문화입니다. 사치하고 방탕하며 음란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여행자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며 살아야 하는데 향락의 도시를 향해 내려 간 것입니다. 그는 여리고로 내려가다 중간에서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강도는 누구를 상징하는 것일까요? 마귀입니다. 나는 마귀를 만나 매 맞고 죽어가는 희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들의 영혼이 강도 만난 자들입니다. 가룟 유다도 마귀에게 강도당한 사람의 대표자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빼앗아 가고자 노리는 강도들이 우굴거리고 있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어려운 일들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물질을 노리는 강도들 보다 더 무서운 강도가 있습니다. 영혼을 강도질하는 이단(異端)들입니다. 지금 이단이 얼마나 가득합니까?  영적인 것은 한번 강도당하게 되면 다시 회복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영적인 것을 빼앗아 가는 강도를 만나지 않도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선한 사마리아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 입니다. 강도 만난 나를 살려주시고 끝까지 돌보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나의 참 이웃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사랑은 받은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듯이 이제는 우리가 가서 다른 강도 만난 사람들을 돌보아 주라는 말씀입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셨으니 예수님이 나의 이웃이 되어주신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주어라 하십니다.  즉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사랑은 말씀 하지 않으시고 이웃사랑만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사랑은 이웃사랑으로 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올 한해 이제까지 내가 행한 이웃사랑을 적어보십시오. 그것이 곧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정도입니다. 하나님사랑은 헌금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사랑으로 측정이 됩니다. 아멘인가요?   그러면 성도여러분, 이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 해야 합니다.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롬8;3-4)“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8-9, 13)“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이 말씀들을 다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3절)‘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하나님은 하십니다.    

(4절)‘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집니다.   

(9절)‘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십니다.   (13절)‘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즉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에게 순종하면 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율법의 요구는 신약에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때문에, 또 내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원수도 사랑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십니다. 결국 믿음으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자마자 우리가 완전히 변하여 천사가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 함께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성화(聖化)되어갑니다. 나날이 거룩해 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영화로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사랑은 받은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듯이 이제는 우리가 가서 다른 강도 만난 사람들을 돌보아 주라 하십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셨으니 예수님이 나의 이웃이 되어주신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주라 하십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참 이웃이신 예수를 만나야 하는데,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강도 만나 여러가지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인 강도를 만난 사람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포르노, 음란 영상에 사로 잡혀 있습니까?  술과 담배는 사람들이 하나의 문화로 취급을 합니다. 그래서 남자라면 술과 담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술 담배도 못하는 것이 남자냐? 하는 이상한 생각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또 드라마를 보면 여자들이 술 마시고 길거리를 팔자걸음을 하고 걷는 것, 술 취해서 남자 등에 업혀 다니는 것, 그리고 길거리에서 토하는 것이 보통으로 나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이라고 믿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마약으로 인한 문제도 심각합니다.  섹스를 하나의 문화적인 것으로 취급하므로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파탄을 당하고 있는지요? 애인하나 없으면 좀 부족한 사람 취급합니다.  또 일하기 싫어서 다른 사람들의 등을 쳐서 사는 치사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이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지요?  이러한 일들이 왜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강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예수를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강도 만난 자들을 도와주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합니다.  
 
첫째로, 영적으로 강도 만난 자들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리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인 눈은 곧 사랑입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던 자가 강도를 만났을 때 그곳에 분명 다른 사람들도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눈이 떠 있지 않아서 자기 일에만 열중하느라 강도 만난 자를 구해 주지 않았습니다.    

롬1장을 보면 마음에 하나님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1;28-31) 

마음에 하나님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끝이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 라고 합니다.  성도여러분, “무정, 무자비”는 성격이 아닙니다. 기질이 아닙니다. 바빠서도 아니고, 피곤해서도 아닙니다.  “무정, 무자비”는 죄악의 정점입니다.  가장 큰 죄의 모습이 “무정, 무자비”입니다. 어머니가 아버지가 몸이 아파서 밤새 ‘아이고 아야 아이고’ 하면서 끙끙 아픕니다. 그것을 한 귀로 들으면서 자녀가 밤새 컴퓨터 오락이나 하고 있다면, 아니 피곤하다고 혼자 쿨쿨 잔다면... 그것이 그냥 성격입니까?  아내가 몸살이 나서 신음소리를 내며 잠을 못 자는데 남편은 내 알바 아니라며 시끄럽다고 옆방으로 가서 코를 골면서 잔다면 그것은 성격이 아니라 죄입니다.     

거짓말, 강도 보다 더 큰 죄악의 정점이 무관심, 무자비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지 않았다면 우리도 영적 강도를 당해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강도에게서 구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이렇게 기쁘게 섬기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성격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 사람의 영성이요 거룩함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적인 눈이 열리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성령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십니다. 

둘째로,  강도 만나 자에게 가까이 찾아 가야 합니다. 

영적으로 강도 만난 자는 절대 혼자서 교회를 찾아 올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도와서 일으켜 세워 주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절기 때가 되면 과자나 빵을 얻어먹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릅니다. 교회가 아니어도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많나요. 안방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한국에서 방영하는 드라마와 영화를 신나게 볼 수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전화만 눌러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마음 놓고 통화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술집에 가서 즐기는 일도 있으니 누가 교회를 자기 발로 찾아 나오려고 하나요.  그러니 그들은 저절로 오지 않으니 우리가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신 것입니다. 가서 교회로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그들이 찾아오기만 기다려서야 될까요?

셋째로,  손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가서 영적으로 강도 만난 사람을 주님께로 데리고 오려면 손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자신이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지 못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포도주와 기름을 아끼지 않고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옷을 찢어서 붕대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돈을 내어 주며 계속해서 치료해 줄 것을 주막 주인에게 부탁 했습니다.  영적으로 강도 만난 자를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기 희생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한 번에 예수 잘 믿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을 전도했던 사람들도 분명 이러한 희생을 했기에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다른 한 영혼을 전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나 같은 자도 예수 믿도록 했다면, 나도 그 정도의 희생을 각오해서 다른 사람을 인도해 주어야 겠다는 각오를 한다면 가능합니다.     

성도여러분, 전도를 하다 보면 싫은 소리 당연히 듣게 됩니다. 문전 박대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물벼락 안 맞는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때로는 무시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그런 일을 다 당하시며 전도 하셨습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도 그런 일을 당하며 전도 했는데 우리가 대우 받으며 전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베드로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똑 바로 지셨는데 내가 감히 어떻게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나요. 나를 꺼꾸로 달아 달라’ 고 하는 마음이 될 때 영적 강도를 만난 자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습니다.   욕을 먹어도 욕이 우리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축복으로 바꾸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결론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또 다른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면서 까지 나를 사랑해 주신 주님의 명령을 따라 우리도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고자 마음에 결단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다만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지 않아야 합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롬8;13절) 사랑이 풍성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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