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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의 해석 (히 12: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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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해석 (히 12:)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5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12;4-13)

오늘은 히브리서 12장 4절-13절 말씀을 통해서 ‘고난의 의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성령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와 감동이 넘쳐나기를 소원합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의 주제는 고난(苦難)입니다. 히브리서는 고난과 핍박 중에 있는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글입니다. 이 사람들은 안으로는 동족인 과격한 유대주의자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또 밖으로는 로마의 폭군 네로황제가 로마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덮어씌워서 기독교를 대대적으로 박해하였습니다.  

이러한 과거의 고난과 앞으로 또 어떤 박해가 올지 모르는 불안감에서 히브리 성도들은 옛 종교인 ‘유대교’로 되돌아가려는 배교(背敎)의 유혹이 적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아니지요? 그러나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받았고, 생명의 위협까지도 받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가지입니다.  이 고난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 가장 중요한 사실은 고난은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고난이 죄 때문에 온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의 욥이라는 사람을 봅시다. 하루아침에 열 자녀가 다 죽고, 모든 재산이 강도당하여 쫄딱 망하고, 온 몸에는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병이들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욥의 3친구들은 울었습니다. 그리고 말을 합니다. ‘죄(罪)’때문 이라는 것입니다. 아무 죄도 없이 이런 일이 어찌 일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친구는 욥에게 ‘니가 뭔가 죄가 있으니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냐. 아무 죄 없이 이런 고난을 당할 수가 없다. 니 회개해라’ 이런 말을 합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이런 생각이 많이 있습니다.  심방을 가서 종종 하는 말이  ‘빨리 회복하게 하시며... 주여 회개할 것 있으면 회개하게 하시고...’ 합니다. 지나가는 말로 슬쩍 하여도 그것이 비수를 팍 꽂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나중에 욥의 3친구는 죽어야 합니다. 자기가 한 말들이 정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니가 뭔가 죄가 있으니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냐. 아무 죄 없이 이런 고난을 당할 수가 없다. 니 회개해라’ 하는 말이 바른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말에 대한 책임으로 하나님은 죽음을 결정하십니다. 하지만 욥이, 자기에게 ‘회개하라’는 공격을 받은 욥이, 친구들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줌으로 그들은 죽음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욥의 편을 들어줍니다.
 
그러니 여러분, 함부로 남을 정죄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나를 죽음으로 끌고 가는 죄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집에 저렇게 우환이 있는 것을 보니 죄를 지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 하고 말을 쉽게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그렇게 말하는 자기 자신은 죄가 없습니까? 그런 우환을 받을 만한 죄가 없는가요?  한번 뒤집어 볼까요?  정말 우리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난을 볼 때도 조심해야 하고 자신의 고난을 볼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에 어떤 가정에 정말 ‘죄’ 때문에 고난이 왔다고 칩시다. 그러면 내가 가서 그 사람에게 ‘당신 죄 때문에 고난이 왔어요’ 라고 말할만큼 나는 죄가 없는 사람인가요? 그게 아니잖아요.    여러분, 고난이 죄 때문에 왔건, 다른 어떤 이유로 왔건 그것은 다 하나님이 허락된 고난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아래에 있는 고난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심방이나 문병을 가서 ‘회개해라’ 이런 말을 안해야 합니다.   

만약 그런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흥분할 것 같습니다. ‘니는 죄 없나 한번 뒤져볼까!! 내가 교통사고 날 죄라면 너는 차가 뒤집어질 죄 없나!!  내 죄 때문에 자식이 다칠 죄라면, 그러면 니는 자식이 건강할 만큼 아무 죄도 없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굉장히 무서운 독소를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남에게 쉽게 그 독소를 쏘아 댑니다.  

그러면 지금 아무 문제도 없는 가정은 죄가 하.나.도. 없어서... 그렇습니까??? 어디서 그런 교만 방자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자기를 알지 않습니까?  감히 누가 누구에게 말을 그렇게 막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욥기’를 우리가 정독해야 합니다. 만약에 ‘욥기’가 없다면... (물론 극단적인 말이지만) 고난의 문제는 다 죄가 원인입니다.
 
(요9;1-2)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에게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이것이 신명기적인 해석입니다. ‘니가 순종하면 복을 받고, 니가 불순종하면 저주 받는다’ 이것이 신명기적인 축복관입니다. 성경적 기본적인 사고방식이 ‘순종은 축복, 불순종은 저주’ 이것이 신명기에서 내려오는 유대인들의 사고입니다. 이 말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런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렇게 신명기적인 고난이 아닌 예외적인 고난을 잘 보여주는 것이 욥기입니다.  

욥기가 없으면 (물론 성경을 자세히 보면 구석 구석에서 보여주고 있지만) 여러분과 저의 고난은 다 죄(罪)의 문제로만 다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특히 욥기가 너무나 분명하게 고난이 반드시 죄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고난의 문제는 아무도 손 못 댑니다. 하나님의 주권(主權)입니다. 우리는 고난 받는 사람을 감히 정죄 할 수 없습니다. 

 ** 그래서 고난은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유대인 출신 히브리인들이 받는 고난을 ‘징계(懲혼날 징,戒경계할 계)’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5절)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6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7절)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8절)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9절)

징계(懲戒)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됩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 원어로는 ‘파이데이아스’,  원형인 ‘파이데이아’는 ‘교육(敎育)’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Discipline’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훈련, 단련’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징계(懲戒)는 심판(審判)과 다릅니다.  심판은 죄에 대한 벌입니다. 훈련과 벌은 다른 말입니다. 만약에 죄(罪)로 인한 벌(罰)이라면 이 단어를 쓰면 안 됩니다. 실제로 히브리교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죄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벌 받을 잘못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징계는 훈련입니다. 고난은 징계인데, 그것은 훈련, 교육이라는 의미로 성경이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징계를 통해 사람은 첫째, 성숙하게 됩니다.    부모님들은 다 아십니다. 자녀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은 반드시 징계를 동반합니다. 여러분, 아이가 버르장머리 없을 때, 과감히 아이를 야단치고 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징계의 목적은... 성숙(成熟)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키워 본 부모님은 다 아십니다. 아이가 한 번 클려고 하면 아프고 큽니다. 성장통(成長痛)이 있습니다. 아이가 한번 아프고 나면 ‘아 이 애가 클려는가 보다’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프고 나면 늙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픈 뒤에 성숙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성숙하기 전에는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성숙입니다.  성숙하기 위해서 사람은 고난을 통과해야 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면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은 사람은 이삭 뿐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모리아 산의 헌신’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누가 고난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다윗? 고난 중의 고난을 받은 사람입니다. 요셉? 무슨 죄 지었나요? 꿈 꾼 것이 뭐 그리 죄입니까?  

사람이 고난을 통과하면 성숙해지고,   둘째로는 가치(價値)의 변화(變化)가 옵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가치의 변화를 줍니다. 죽을 병, 암(癌)병에 걸린 사람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싹 고쳐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이전과 똑 같이 살까요? 말도 안 됩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부도가 나서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이 다시 큰 물질적인 복을 받으면 이전처럼 돈을 콱 움켜지고 살까요?  아닙니다. 가치가 변화됩니다. 고난은 사람의 가치를 변하게 합니다.   징계를 통해  셋째, 진리를 알게 됩니다.  (시119;67)“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 고난 속에서 사람들은 고난 중에도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임하였는지 절절히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간증이 생깁니다.   아멘인가요? 고난을 보는 눈이 달라지시나요? 
  
** 이 고통과 고난을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허락하시나요? 
  
* 첫째, 자녀에게 허락합니다.  

(히12;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여러분이 스스로 압니다. 내가 십일조를 일 년을 떼먹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아무런 싸인이 없습니다. 자신은 알잖아요.  일 년이 지나도 차 접촉사고 한 번도 안 일어나고, 나는 형통하기만 합니다. 그 사람은 정말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정말 나를 버리십니까? 왜 내가 일년을 하나님의 돈을 도둑질 하여도 아무런 싸인을 보내지 않으십니까. 정말 저를 버리십니까?’ 

이렇게 기도하는 그 사람은 아직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야 아버지 모르는 갑다. 떼어 먹어도 괞찬구먼’ 이런 사람은 나중에 한 방에 가는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징계는 자녀가 아니면 하지 않습니다. 보세요. 옆집의 아이가 밥 안 먹는 다고 내가 야단치나요? 띵동 하고 벨 누르고 들어가서 ‘너 나와봐. 왜 반찬투정 하고 그래’ 하고 야단치나요? 안 하지요?  자기 자식에게 하잖아요?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징계는 자녀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깨닫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둘째로, 징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허락합니다. 

(히12;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징계를 받을 때 먼저 우리가 고백할 것은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아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문제가 꼬이고 힘들 때 ‘하나님이 나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계시는구나’ 생각해야 합니다. 

자녀가 잘못했는데도 내버려 둔다면 여러분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녀의 잘못에 징계를 내릴 수 있는 부모라야 합니다. 물론 지혜롭게 해야 되지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하면 안 됩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 셋째, 징계는 일꾼에게 허락합니다.

징계는 기대감을 갖는 사람에게 내립니다. 징계는 기대감과 정비례합니다. 여러분, 다윗만큼 징계를 강하게 받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요셉만큼 억울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쓰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이기에 더 혹독하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혈통적 조상이 됩니다.  

요셉은 선민의 계보를 유지하고, 애급과 주위의 수많은 목숨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그들이 받은 고난이 그들을 이런 위대한 사람으로 준비시킨 것입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기대감과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회사의 사장입니다. 자녀가 여러명입니다. 어떤 한 아들을 유독 혹독하게  단련을 시킵니다. 왜 그럴까요? 그가 자기의 뒤를 이을 후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이지만 그 중에서도 일꾼으로 선택한 사람에게는 좀 더 징계가 강하게 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많은 교회에서 ‘제자 훈련’을 합니다. 이 말은 교회가 이 사람들을 중직으로 쓰겠다는 것입니다. 전문적으로 전도하는 사람으로, 중보 기도하는 기도의 책임자로, 새 신자를 책임지는 사람으로 쓰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숙제가 너무 많다느니, 바쁜데 자꾸 교회에 나오라고 한다느니 불평을 하면 되겠습니까? 있을 수가 없지요. 훈련 아닙니까? 훈련을 받는 사람이 숙제가 많다고, 자꾸 시간을 뺏는 다고... 이런 사람은 훈련에 안 들어가면 됩니다. 

훈련에 들어가서 이런 불평을 하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훈련을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 훈련은 빡 셀수록 인재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께서 중하게 쓰시겠다고 마음을 먹은 사람은 더 빡세게 다루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리는 고난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난을 고난으로만 받으면...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만 죽어나고 유익이 없습니다. 고난을 믿음으로 받아야만 유익이 되고, 믿음으로 해석을 해야 훈련이 됩니다. 이 훈련이 끝나면 그 때는 기가 막히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아, 하나님이 나를 어디다 쓰실까? 나를 어떻게 사용하실까? 너무 기대가 된다’  이것이 고난을 믿음으로 화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받을 때 그 태도를 조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고난을 화합하는 사람은, 

* 고난을 경히 여기지 않습니다.   (히12;5)“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 고난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잠3;11)“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싫어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일에 적대감을 품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나한데만 이러는 거야’ 하는 적대감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대드는 아이가 있지요? 부모를 같이 때리는 것이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 고난 받을 때,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12;12,13)  사실 고통이 길면 낙심이 옵니다.  그러나 피곤한 손,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믿음입니다.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는 것이 믿음으로 화합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고난 받을 때,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십시오. (시73;28)“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게 해 주십시오. ‘이 풍랑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하지 않습니까?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과 더 가가이 꼭 묶어주는 줄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 고난은 죄 때문에 오는 심판이 아닙니다. 벌이 아닙니다. 고난의 하나님의 섭리요 주권입니다.  특히 우리는 고난 받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 고난은 훈련이요, 교육입니다.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친아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징계입니다. 

* 고난은 특히 일꾼에게 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더 크고 더 중하게 사용하시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통해 큰 일꾼이 되기를 기도하시고,  고난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시66;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23;10)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될 것입니다.   이 고백이 믿음의 역사를 가져올 것입니다.  오늘의 가난이, 오늘의 좌절이, 오늘의 실패가 내일의 큰 선(善)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의 의미와 고난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 것을 잊지 않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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