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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출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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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출 4:1-9)


옛날에 버스에 안내양이 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버스 회사에서 안내양들을 면접 보는데 버스 회사 상무님이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버스가 어떻게 가는 줄 압니까?"  그러니까 한 아가씨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오라∼이"

사랑하는 여러분, 배가 어떻게 갑니까?  돛이 배를 가게 합니까?  아닙니다.  아무리 높이 솟은 근사한 돛도 배를 가게 하지는 못합니다.  배를 움직이는 것은 높이 솟은 돛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바람입니다.  바람이 불어주지 않으면 아무리 근사한 돛도 소용이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배가 바람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바람을 탈 수는 있습니다.  동일하게 오늘 우리가 성령의 바람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바람을 탈 수는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 모두가 성령의 바람을 타고 뜨거운 믿음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내 힘을 의지하지 말고 성령의 바람을 의지하십시오.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 힘만 의지할 때에는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령의 바람을 의지할 때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황무한 이 땅도 옥토와 같은 아름다운 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빈들의 마른풀처럼 시들어버린 우리의 마음 밭도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이곳에 성령의 강력한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도하십시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기를 사모하십시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아덴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 그곳 사람들은 한 마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쟁이"  어떤 번역에서는 '수다장이', '떠버리'라고 했습니다.  사실 바울은 아덴에서 세상의 학문과 지식을 다 동원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과는 말은 그럴 듯하게 하는 말쟁이로 치부를 당했습니다.  복음 전도에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고린도에서는 자신을 내려놓고 철저하게 성령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학문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전도할 때에 듣기 좋은 말이나 설득력 있는 말을 사용하기보다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세상 사람들은 교회와 교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말은 그럴 듯 하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말은 그럴 듯 한데 실제의 삶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능력 있는 삶을 보여달라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는 것을 지극히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인간적인 지혜나 말재주로 무엇을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람의 지혜나 그럴듯한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만이 이 땅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이 나를 변화시키고, 내 가정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힘 바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으신다면 입으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십시오.

일반적으로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면 그 전에 갖추어야 될 것이 많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건강도 있어야 하고, 지식도 있어야 합니다.  얼마간의 경험도 있어야 하고, 지도력도 있어야 합니다.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들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념이라고도 하고, 혹은 확신이라고도 합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남이 나를 믿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도 역시 믿음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데 남이 나를 믿어 줄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는 나 자신입니다.  내가 내게 확신이 있어야 남들 눈에도 "그는 믿을만하다"고 믿음이 가는 인격으로 비쳐지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 가운데에 바로 이 믿음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지금 모세의 처지를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께서 기왕이면 모세의 나이가 좀더 젊었을 때에 부르셨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말입니다.  모세의 나이가 한 40세쯤 되었을 때 부르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는 바로의 궁전에서 한참 공부도 많이 하고, 공주의 아들로서 권세를 행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때에 모세를 불러서 쓰셨더라면 어땠을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간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도망을 간 미디안 광야는 애굽의 끝입니다.  그러니까 갈 데까지 간 인생의 실패자였습니다. 거기다가 모세는 40년 동안이나 장인 이드로의 양이나 치면서 더부살이를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완전한 인생의 실패자의 표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같은 값이면 왜 40세의 원기 왕성한 청년 모세를 부르시지 않고 80세에 이른 실패자요, 무기력한 목동인 모세를 부르셨을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맡기려고 할 때 무엇보다 조건을 따집니다.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도 상황과 여건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와 다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그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의 중심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어느 자리에 있든,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붙들어서 쓰십니다.  그리고 그를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애굽에서 살인자로 갈 데까지 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그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 바로의 궁전에서 배웠던 세상의 학문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세상의 풍습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당당하고 잘 났던 풍채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양치는 현장에서 그 모세를 부르십니다.  이제는 기력도 없고, 의욕도 없고, 욕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일을 하시고자 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너무나도 엄청난 일입니다.  430년 동안이나 노예 생활에 길들여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내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 생활에 익숙하고, 노예적인 사고방식에 젖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이들 이스라엘 사람들을 도우려다가 그들이 고발을 함으로써 그 좋은 궁전의 생활을 버리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와야만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모세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제불능의 사람들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 땅에서 건져내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닌 장정만 60만 명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건져서 바로 이웃으로 옮겨놓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서, 시내 광야를 지나서, 저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인도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우리는 이미 기록된 성경을 보고 있으니까 가능했다고 하지만 사실 이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인간적인 상식이나 능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것은 모세 자신으로 볼 때는 모세의 간절한 소원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모름지기 오랫동안 기도해 온 기도 제목이요, 그의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그 기도의 응답이, 그 간절한 소원에의 성취가 이루어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늦었습니다.  43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더구나 지금 자신의 나이가 80세입니다.  이제는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설령 인간적으로는 아무리 불가능한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는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다고 칩시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해도 모세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모세는 거듭거듭 사양을 되풀이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하신다고 하더라도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를 통해서는 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무 늙었고, 나는 좋지 못한 과거를 지녔습니다.  애굽에서 사람을 쳐죽인 그런 살인자입니다.  도망자에다 실패자요, 그리고 다혈질이라서 성미가 급하고 불같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다 포기한 상태에 있는 그런 헛점투성이의 인간입니다.  그런고로 비록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구원의 엄청난 역사가 오늘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바로 나 모세는 아닐 것입니다.  나는 예외입니다.  나를 통해서 될 일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모세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 그렇습니다.  모세가 자격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먼저는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아무 것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능력도, 건강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식도, 지도력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계속 변명하는 말이 백성들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사실 그럴 수 밖에요.  내가 나를 못 믿는데 누가 나를 믿어 주겠습니까?  누가 나를 믿고 따라와 주겠습니까?  이 비참하고 초라한 나를 누가 따라 주겠습니까?  그래서 모세는 안 된다고 안 된다고 하나님 앞에서 극구 사양을 합니다.  10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모세는 말을 할 줄 모른다는 핑계까지 댑니다.  아마도 모세는 입이 어눌해서 말을 좀 더듬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세가 처음부터 말을 더듬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바로 궁전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왕자였습니다.  이것은 고대에서는 무술과 학문과 언변에 탁월했다는 변증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사람도 없는 광야에서 아침에 해만 뜨면 양떼를 이끌고 광야에서 광야로 유랑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긴 40년의 광야 생활에서 그는 대화의 상대자를 잃었습니다.  말이 없는 기나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말을 잃어버렸고, 말을 더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그를 나무라십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도대체 누구 앞에서 변명을 늘어놓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가 결국 하나님의 손에 강제로 붙들려서 쓰임을 받게 되는 것을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인의 궁극적인 관심은 세상이 어떠하고 환경이 어떠한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궁극적인 관심은 지금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이야기는 다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에게는 또 하나의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해서 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워낙 무자격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설사 함께 하신다고 하더라도 나 같은 사람과 함께 하실 리가 없고, 또 나 같은 사람이 감히 하나님의 일을 할 수는 없다고 지레 절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모세는 너무나도 자기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양하고 또 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끝내 모세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인내를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시고, 1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실로 엄청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할 말을 다 가르쳐 주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모세를 볼 때에 그를 하나님처럼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가라, 이제 가라, 훌훌 털고 일어나 어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강권적인 소명(召命)입니다.

이렇게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소명을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첫째로, 그 분은 인간의 부족과 허물을 묻지 않습니다.
이미 다 알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나보다도 더 나를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나의 약한 것과 부족한 것을 다 알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앞에서 감히 사양할 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가능하게 하도록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능하고 못하고는 하나님께 속한 문제입니다.  모세에게 속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능케 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저를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명을 주시고, 직분을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못한다고 말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이 사명을 감당할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가능하고 못하고는 내 문제가 전적으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 속한 문제입니다.

셋째로, 좀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로 부르십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오묘한 섭리 중에 효과적으로 저를 부르고 계십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큰 구원의 경륜 속에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엄청난 역사를 경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시리라는 뜻 안에서 모세를 이 땅에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경륜 안에서 이제 모세라는 사람 하나를 들어 쓰시고자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가 있고 나서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쓰임 받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가 부족하든 말든, 자격이 있든 없든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하시니 쓰임 받을 뿐입니다.

다섯째로, 최종적인 승리는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꼭 이루어지도록 그 최종적인 승리, 종말론적 역사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의 약속이 있고 보증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모세를 부르십니다.  이제 모세는 아무 말도, 아무 변명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강하게 나오시니까 모세도 이제는 도리가 없는 줄 깨닫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모세한테는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게 무엇을 좀 주세요.  희한 한 것, 좀 굉장하고 깜짝 놀랄만한 능력과 표적을 주세요."  굉장한 것, 마술적이며 초자연적인 것, 초인간적인 그런 기적적인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뜻밖입니다.  "모세야,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아마도 모세는 적이 실망해서 대답했을 것입니다.  "지팡이입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모세가 기대하고 있던 바와는 너무나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아마도 모세는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치면서 아주 엄청난 어떤 역사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입니다."

그 다음 말씀을 조금 추리해서 생각해보면 성경에는 없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지는 아마도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됐어!  그것이면 됐다."  지팡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이상의 것을 주시려고 하지 않습니다.  네게 있는 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네가 가지고 있는 것, 네게 있는 것, 이것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경륜에 속한 것임을 모세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생애는 출생부터 매우 비상했습니다.  비상한 시점에 태어나 갈대 상자에 담겨져서 나일강에 떠내려간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습니다.  다시 건져져서 바로의 궁전에 들어가 40년 동안 애굽의 문물을 다 공부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다시 그를 미디안 광야로 내쫓아서 양을 치면서 겸손을 배우고, 인내를 배우고, 지도력을 키우게 된 그런 과정도 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80년이라는 긴 과정을 준비시켜 가지고 오늘 모세의 손에다가 지팡이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팡이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평범한 지팡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마른나무 막대기, 그것을 들고 있는 모세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야,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입니다."  "됐어!  그것이면 됐다."

이 순간이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의 의미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 속에 오늘 이 마른 막대기, 이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 들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소박하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소유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건 재산이건, 나이건 건강이건, 명예이건, 이 모든 것이 가지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의 역사 속에 이 사건 하나가 여기에 있고, 그리고 내가 있습니다.

그 옛날 에스더가 이방 나라에 가서 이방 왕의 왕후가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에 그 삼촌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향하여 하는 말 가운데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우리는 귀담아 들을 수 있습니다.  "에스더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너 한 사람 잘 살라고 왕후가 된 줄 아느냐?  네 민족이 어려운 경우를 당하였을 때에 민족을 건지라고, 나라를 건지라고 왕후가 된 것이 아니겠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내게 주시고 준비시켜 놓으신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한 사람은 자기가 소유한 것으로 만족한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집에 살든, 무슨 물건을 가졌든 간에 그것이 가장 좋은 줄로 아는 사람이 제일 부자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의 뜻을 아는 사람, 그리고 그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가장 유능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바를 은사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이 가진 바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그 사람이 가장 유능한 인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의 의미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제 그 지팡이를 바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이 많습니다만 그걸 몇 가지만 열거해 보면 여기에서 재미있는 특징을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던지라, 잡으라, 넣으라, 내어라, 취하라, 부으라, 치라, 건너라, 들라, 낮추라…….  전부 이런 이야기입니다.  아주 간단한 문장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던지라고 하시면 나는 던지는 것입니다.  왜 던져야 하느냐고 물을 것이 없습니다.  잡으라면 잡고, 건너라면 건너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내가 가진 것을 통하여 역사하실 때에 내 믿음과 순종만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자세는 이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종에게 말씀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이 믿음이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지팡이 사건을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두말 않고 던집니다.  그랬더니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또 그것을 다시 잡으라고 해서 잡으니까 도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꼭 마술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엄청난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표징입니다.  믿음을 주기 위한 표적이요, 이 표적은 모세를 향하신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모세의 생애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그에게 주시는 지시입니다.  보십시오.  평범한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할 때에 양을 지키는 목자의 지팡이가 이제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지팡이가 됩니다.

어찌 생각하면 모세의 일생은 이 지팡이로 시작해서 이 지팡이로 끝났습니다.  이 지팡이로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지팡이를 가지고 이적을 행하면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 지팡이로 홍해를 쳐서 갈라서 육지같이 건너가게 했습니다.  이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 가서는 이 지팡이를 잘못 사용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민수기 20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보는 순간 부지불식간에 욱하는 성정이 되살아나서 패역한 백성이라고 저주하면서 신경질적으로 반석을 내리쳤습니다.

조심스럽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믿음으로 순종했어야 할 자리에서 자기 감정을 터뜨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너는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나의 거룩함을 들어내지 아니 했으며 나를 거역했느니라.  그래서 너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무서운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불순종을 믿음이 없음과 동일한 사건으로 보셨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이 한 번의 사건을 놓고 그가 믿음이 없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모세는 여기에서 끝나버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순종하되, 시키시는 대로 정확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지팡이 사건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 그것을 던지라고 할 때 던지고, 잡으라고 할 때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하셔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여기 이 지팡이 사건을 좀 더 깊이 해석을 해보면 다스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던지라고 해서 던졌더니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팡이를 잘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네가 가진 지팡이를 잘 다스리라.  지팡이를 잘 다스리지 못하고 놓으면 이것이 뱀이 된다.  원수가 되고 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사명을 붙잡을 때에는 그것이 복이 되고 지팡이가 되겠지만 그 사명을 놓을 때에는 뱀이 되고 화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게 주신 사명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어떤 경우에라도 사명을 놓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사명을 붙잡는 순간 그것이 여러분에게 말로 할 수 없는 엄청난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으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사명을 내려놓거나 회피하는 순간 그것은 여러분에게 상실감과 절망과 낙심으로 다가오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다음 장면을 보십시오.  모세가 뱀을 보고 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니까 무섭지만 그 꼬리를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무서워도 잡으라고 하실 때에는 잡아야 합니다.  잡으면 나를 돕는 지팡이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원수라도 잡으라고 하실 때에 그 꼬리를 잡으면 은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이롭게 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역경이라고 하더라도 잡으라고 할 때에 바로 잡으면 그 역경도 축복의 계기가 됩니다.  내 실패, 이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똑바로만 들으면 엄청난 성공의 디딤돌이 됩니다.

이제 문둥병 발한 손의 의미를 살펴보십시다.  "네 손을 품에 넣어라", 또 "네 손을 내어 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네가 손을 사용할 때마다 가슴에 대어 보아라.  손과 마음이 따로따로 놀면 안 된다.  마음이 나쁠 때에는 네 손도 문둥병처럼 악해지고, 마음이 바를 때에는 네 손이 손 됨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줄로 압니다.  "아무리 급해도 지난날처럼 사람을 쳐죽이는 손이 아니라 한 번 더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에 합당하게 손을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런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모세는 걱정합니다.  "저들이 나를 믿지 않고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장 18절에 보면,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라고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이 대화가 매우 심각합니다.  모세는 "안 들을 것입니다"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들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듣는다면 듣는 줄 알아라!"하고 호통치시는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4장 41절에는 "백성이 믿으며……"하는 말이 나옵니다.  모세는 "믿지 않을 겁니다" 라고 했지만 결과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백성이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게 있는 것을 물으십니다.  그것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내게 없는 것을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내게 무엇이 없고,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를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게 있는 것의 목적과, 그 놀라운 의미를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제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쓰여지면 엄청난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물고기를 잡는 어부 시몬을 불러서 사람 낚는 어부 베드로로 만드셨습니다.  핍박자인 청년 사울을 불러서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로 만드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그대로 내놓는 것입니다.  던지라고 할 때에 던지고, 바치라고 할 때에 바치십시오.  내 마음에 안 들어도 잡으라고 할 때에 잡으십시오.  가라고 할 때 가십시오.  치라고 할 때에 치십시오.

그리하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고 경험하고 간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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