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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를 속량하신 구주 (히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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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속량하신 구주

(히 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9세기 후반과 20세기초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 가운데 한분이신 심프슨 목사님은 캐나다의 토론토 낙스대학을 졸업한 후 캐나다에서 목회하다가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 장로교회의 초청을 받았다합니다. 목회를 해나가면서 그는 마음속에서 영적 갈증을 느꼈다합니다. 그는 영적 갈증을 해소하고자 무디의 집회에 참석했다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무디의 집회에서 별다른 은혜를 받지 못했다합니다. 오히려 어떤 이가 간증하는 것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합니다. 

그 간증자는 “저는 무디가 저를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로 이곳에 왔습니다만 저는 지난 밤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뵈었기 때문에 제가 살아있는 한 어떤 것도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합니다. 이 말은 심프슨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후부터 심프슨은 어떤 인간을 바라보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었다합니다. 

그 후 그가 지은 찬송 441장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은사 원한 내게 은사의 주님 신유 구한 내게 신유의 주님 나의 마음속에 지금 오셨네 나의 생명되는 내 주 예수님 영원토록 모셔 내 기쁨 넘치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다양한 은혜를 갈구하지만 정작 그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속량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속량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사명 감당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 가운데 오셨다는 말씀은 깊은 신앙적 통찰이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기독교의 모든 진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 가운데 거하시던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람의 아들로 성육신하신 까닭과 성육신하여 인간들과 더불어 사신 그리스도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 때 인간은 인류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심오하신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이라는 사실은 이 세상의 보편적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시라고 증거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과 똑같은 탄생과 성장의 과정을 거치셨으며 인간의 혈육을 지니셨습니다

(마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눅 2: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요 11: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리고 인간과 같은 성정으로 인간이 겪는 고통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배고픔, 슬픔, 피곤, 죽음을 조금도 감함 없이 그대로 체험하셨던 것입니다

(마 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요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 그리스도는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이 희로애락을 모두 체험하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삶은 철저하게 인간적이었습니다. 그 생애는 그리스도로서 구속의 대사역을 완성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죄인들과 함께 찾아가서 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눅 7: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눅 15:1-2)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율법에 의해 정죄 당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모든 인간들에게 열려진 구속의 길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삶의 상처들을 어루만져 치유해 주신 그리스도의 생애는 어떤 위대한 인간의 일대기보다도 인간적이며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하나님의 속성을 여실히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임을 보여 주는 산 증거가 됩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주의 이름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히 2: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서 행하신 구속사역이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며, 또 그분께 찬양을 돌리기 위함이었음을 말합니다.
이 선포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밝히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한 사역 중 하나가 하나님 나라의 전파였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 줌으로써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분께 영광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비록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지만 자신을 낮추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은 영원토록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께서는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과 영광을 드러내셨고, 하나님은 그를 높여 큰 영광을 받게 하셨습니다.

슈바이쳐 (A.Schweitzer)박사는 누가복음 16장을 읽다가 부자는  백인이요, 나사로는 흑인을 가르키는게 아니겠느냐? 흑인들에게 온갖 못할 짓을 한 백인들의 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아프리카로 가 90평생 흑인들의 고름 주머니를 만지며 평화의 사도로서 봉사의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여행가 김찬삼씨가 그 슈바이쳐 박사를 만나 그 사람의 현장에서 일주일을 살았다 합니다. "바지가 몹시 낡았구려, 허락하시면  저의 바지를 드릴테니 갈아입으십시오."하며 준 슈바이쳐 박사의 바지를 입고, 90세의 노인이 흑인의 고름 주머니를 만지면서 평화와 사랑을 심는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합니다. 김찬삼씨는 그곳을 떠날 때 슈바이쳐 박사에게 "인생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말씀 한마디만 해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청했다고 합니다. 슈바이쳐 박사는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시오!" 그렇게 말하고는 추럭을 타고 떠나는 김찬삼  씨에게 손을 흔들면서 "인류에게 평화를 인류에게 사랑을"하며 마지막 인사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과 함께 살면서 '인류에게 평화를  인류에게 사랑을'하며 부르짖던 슈바이쳐 박사의 그 수고와 희생을 통해서  오늘날 어느 구석에서든지 어떤 모양으로 평화는 유지되고 또 번져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의 은혜에 근거 합니다.
십자가의 주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고(눅23:34)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요 19:30)므로 우리를 속량하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시며 영광돌리셨습니다.  
이 속량의 은총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사명 감당 합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가장 큰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마귀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기 위함입니다.

(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마귀는 최초의 범죄자이며 최초의 유혹자로서 인간들을 죄로 이끌고 사망 길로 인도하기 때문에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사탄은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사망의 두려움으로 인간의 양심을 위협하는 유혹자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욥 1:6-12).

한편 마귀가 인간을 유혹하고, 인간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인간이 혈육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혈육은 일시적이며 결국 죽고야 마는 것으로서 혈육을 가진 자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과 같은 혈육을 입으시고 인간이 되셨고 친히 죽음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인간이 되심으로써 모든 인간들을 위한 대속 제물로 자신의 생명을 바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마귀를 이기시고 죽음을 무력하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죄의 삯인 사망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를 위한 단 한 번의 영원한 희생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이는 인간들을 범죄케 하고 사망 길로 인도하는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이 됩니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거룩하고 의롭게 된 성도들을 마귀는 더 이상 정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을 때에 종교회의가 있었다합니다. 각 종교 지도자들이 한 사람씩 등단하여 회교는 불교를, 불교는 힌두교를 각각 소개하였다합니다. 그 때 조셉 쿡은 기독교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합니다. '누가 나의 붉은 죄를 희게 씻어 줄 것인가요? 그대들은 능히 그리하겠노라고 주장하지 못하며, 그대들의 종교가 능히 그리하겠다고 말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바로 그 일을 한다고 주장하며 또 그 일을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는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가 모든 죄인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속량의 은혜가 마귀의 세력을 멸하고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며 사명 감당 합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가장 큰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유일한 중보자로 속량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히 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구약의 대제사장은 1년에 단 한번 대 속죄일에 백성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이 제사를 통해 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중보자는 양편 가운데 서서 일을 주선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양편 중 어느 한편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는 사람은 좋은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 대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자격 요건은 성결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대제사장 역시 죄 있는 인간이었기에 백성의 죄를 가지고 나아가기 전에 자신의 죄를 먼저 가지고 나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는 다릅니다. 그리스도가 온전한 대제사장이실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분이 죄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화해를 주선하는 중보자의 사역을 맡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연약한 성정을 지닌 인간이 되심으로 인간을 정확히 이해하게 되셨으며 인간의 연약함까지도 체휼할 수 있는 완전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여전히 인간의 속성과 한계를 통찰하시며 자신을 의지하는 자들을 위해 중보하십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친히 인간이 되셨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앞에 나가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도와주시는 그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을 가져온 그 깊은 골,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의 골을 메우시는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온전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그분의 탄생으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단번에 나아갈 수 있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결하셨습니다. 친히 그분께서 우리의 한 가족이 되셨습니다.

속량은 누군가가 죄악 된 나를 대신하여 죽어 줌으로써만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악 된 인간들의 속량을 위해 신의 권세를 유보하시고 죽음을 종국적 한계로 맞이해야 하는 인간이 되셨습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께서 참인간의 모습으로 인류가 당해야 할 죄악의 형벌을 홀로 다 담당하시고 죽음으로 인간은 모든 죄악을 속량 받게 된 것입니다.

뉴욕에 브르클린에 플리마우스 (Plymouth)라고 하는 교회가 있는데 여기에 1928년에 있었던 이야기라합니다. 어떤 할머니가 예배 끝났을 때쯤 되서 손을 들고 "목사님 죄송하지만 딱 한번 마지막으로 부탁 하는데 저 강단에 나가서 간증 좀 하게 해주세요" 그 너무 간절해서 허락을 했답니다.  할머니가 나와서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더랍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68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래요. 68년 전 날짜까지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860년 9월 19일, 그 날은 주일날이었습니다. 이 교회당 바로 마당에서 거기서 노예 시장이 열렸는데 저는 노예로 팔려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경매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딴 곳으로 노예로 팔려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로, 어떤 집으로 팔려가게 되나, 내 운명은 어떻게 되나, 초조하여 벌벌 떨고 있을 때, 방금 예배를 마치고 이 교회에서 나오는 목사님이 나를 붙들고 800불을 주고 나를 사서 그 시간에 나를 자유하게 해주었습니다. 듣자하니 그날 우리가 어찌할 수가 없지만은 우리가 오늘 헌금을 해서 노예 한 사람이라도 자유를 줍시다, 해서 헌 금한 돈을 가지고 저를 사서 풀어주어서 내가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저는 그런고로 이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68년 동안 이 교회에 출석하며 이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이렇게 한 평생을 살았는데 이제 내가 나이 많아서 죽을 때가 가까왔기에 이 말을 꼭 하고 가야겠기에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800불이 한 여인에게 자유를 주는 속량 금 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시고 만 백성을 속량 하셨습니다. 이러한 속량의 은혜를 바로 깨닫고 학습 받고 세례 받고 입교하며 사명 감당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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