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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치지 않는 고통 (롬 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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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인터넷에서 베스트셀러 또는 주목할 책으로 소개된 두 권의 책이 있는데 하나는 GE코리아의 이채욱 회장의 ‘백만불짜리 열정’이란 책이고, 또 하나는 시인 출신의 용혜원 목사님의 “열정 깨우기”란 책이다. 이 두 책의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최근의 기업경영이나 리더십 연구에서는 열정을 첫 번째 성공비결로 꼽는다. 지식과 기술이 뛰어나고 능력이 탁월한 사람보다 열정이 있는 사람이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고 기업도 그런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최근의 리더십에 관한 경영학 교과서의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정보를 주거나 설득해서 그의 합리적인 이성에 호소하는 데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황홀한 사랑에 대한 야성을 일깨워주는데 관심 있다.” ‘사랑에 대한 야성’이란 ‘야성적인 사랑’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즉 열정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고 열정이 없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 열정과 사랑이 있는 사람이 모든 일에 집중하고 끝까지 노력해서 목적을 이룬다.

이런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는 인간적인 관점으로 볼 때는 실패한 인생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믿음의 관점에서 볼 때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 그의 인생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그의 인생을 통해서 기독교 역사에 엄청난 일을 이루어 놓았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인생에서 보장된 미래를 다 포기하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그리고 끊이지 않는 심한 반대와 위험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했다. 그의 이런 헌신 때문에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될 수 있었고, 그에 의해서 기독교신앙이 조직적으로 체계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성공적인 삶의 원동력은 그가 가진 사랑과 열정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고 또 그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그의 동족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그들의 구원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다.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즉 자신의 형제요 가족이요 친척인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은 예수를 믿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정작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은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핍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을 볼 때마다 아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한 것이다. 어떻게 하든지 그들을 구원받게 하려는 뜨거운 열정이 넘친다.

오늘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말씀드리려고 한다. 먼저 1-5절은 바울 사도의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간절한 열망과 마음의 고통에 대한 것이다. 또 6-13절은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14-18절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자.

동족 구원에 대한 그치지 않는 고통
사도 바울은 정통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전통적인 유대인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고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에게서 율법을 배운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엘리트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돌려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저항과 반대와 핍박을 받았다. 그는 자기 동족을 사랑했기에 어느 곳에 가든지 제일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럴수록 더 많은 반대와 핍박을 받았다. 그래서 여러 번 죽을 뻔하기도 하고 큰 위험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바울은 여전히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그들이 어서 속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 보듯이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마음에 큰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더라도 그렇게 해서 그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그가 왜 자기 동족에 대해서 이런 열정을 가지고 이런 마음의 고통을 느꼈는가? 첫째, 영혼구원에 대한 열정과 영혼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평생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가장 많은 핍박을 심하게 겪었다. 그가 본래 정통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격렬하게 핍박하다가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유대인들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들이 잘 몰라서 복음을 반대하고 있지만 자기를 괴롭히는 그들의 모습을 넘어서 그들의 영혼을 사랑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죄는 미워하시되 죄인은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셨다. 예수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죄를 짓는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죄를 미워하고 사람은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의 영혼 자체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 그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의 구원을 위해서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게 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1-8장에서 본 대로 사람은 자기의 행위로도,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도 그리고 유대인의 혈통을 가진 것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고 스스로 죄를 이기거나 죄를 해결하고 의와 선을 행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6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고 사도행전 4:12에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다.

바울은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길만이 하나님이 열어주신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알기에 그 길을 거부하고 믿음으로 나오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했고 그들을 이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뜨거운 열정을 가졌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이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열정이 솟아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무리 예수를 믿으라고 권해도 듣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에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특히 가족들의 불신앙을 보고도 마음의 고통이 없다면 복음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셋째,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임할 결과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은 예수를 믿지 않으면 멸망을 당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복음은 양면성이 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지만, 반대로 예수를 믿지 않으면 죄를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 

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 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사랑하는 가족, 형제, 친척이 예수를 믿지 않고 복음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아픈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 힘쓸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나라는 태풍과 장마로 전국토가 큰 아픔을 겪었다. 수해로 큰 아픔을 당한 지역의 모습을 볼 때에, 그들을 생각할 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전쟁으로, 지진으로 쓰나미로 희생당하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아서 영혼이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픔과 고통을 느끼는가?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영혼이 메말라가고 천국과 영생에서 멀어져 있고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운가? 몸이 건강하지 못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직장이 없고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하는 것을 볼 때 부모로서, 가족으로서 가슴이 아플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영생의 길로 걸어가지 않고 심판과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얼마나 마음에 고통을 느끼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구원하기 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의 멸망을 바라보는 아픈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사랑하는 가족, 형제, 친구를 구원하기 원하는 간절한 복음의 열정을 가진 사람이 되라. 그리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온 힘을 쏟으라.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는가?
바울은 자기 동족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무척 아팠고 크게 실망도 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었다.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그들은 다른 민족에 비해서 하나님께 특별한 은총을 입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도 받았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유대인의 몸으로 오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런 그들이 어째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신 것이 잘못된 것인가? 그는 이런 고민에 대한 대답을 깨달았다. “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택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었다.

그가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많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괴롭히지만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그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들 모두가 멸망 받을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중에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구원받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과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지만 또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기도 했다. 

“6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해서 즉 유대인의 혈통을 가졌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혈통으로만 유대인인 사람들도 있고 또 예수를 믿어 구원받을 참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이에 대해서 성경에서 두 가지 예를 들고 있다. 먼저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경우를 보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의 자손이 크게 번성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 아내 사라의 몸종인 하갈의 몸에서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의 아내 사라에게서 난 아들이 약속의 자녀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가 100세 때에 그의 아내가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삭을 낳았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듯이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약속의 자녀, 약속의 자녀’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이미 이스마엘과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주신 것이었다.

또 한 가지 예는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의 경우이다. 이삭에게는 에서와 야곱이라는 쌍둥이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 형인 에서가 아닌 야곱이 장자권을 차지하고 장자의 복을 받았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에서가 무엇을 잘못했고 야곱은 무엇을 잘했는가?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했는데 그 둘이 뱃속에서 싸우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창세기 25:23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에 대해 오늘 본문에 이렇게 설명한다.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야곱이 에서보다 큰 나라를 이루고 더 큰 민족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에서가 무엇을 잘못하고 야곱이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1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는 말씀이다. 즉 구원은 사람의 노력과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택으로 되는 것임을 이 경우를 통해서 밝혀주고 있다.  

바울은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이 복음을 방해하고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지만, 이스라엘 모두가 배역한 것이 아니라 일부가 그런 것이고 그들 중에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사람들이 있다고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사도 바울처럼 비록 지금 나의 가족, 형제, 친구, 이웃이 복음을 거부하고 신앙을 핍박하더라도 그들을 미워하거나 그들의 구원을 포기하지 말자. 하나님의 뜻이면 그들도 구원받게 될 것을 믿고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렇게 구원이 하나님의 뜻과 선택에 의해서 되는 것임을 깨닫고 또 인정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것은 이렇게 일방적으로 구원받는 사람이 정해진다면, 아무 행위도 없었는데 구원받지 못한다면 억울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하고 불공평한 하나님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의하시고 불공평하시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왜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가, 피조물인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 왜 나는 구원하지 않느냐고 따지고 항의할 자격이 없다. 죄를 지은 죄인은 벌을 받고 진노를 받고 멸망당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무 조건 없이 선택하시고 또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요 우리가 감사할 일인 것이다.

15,16절에 ‘긍휼’이란 단어가 계속 나온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를 택하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 노력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5:10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로 내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나를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하나님이 누구를 구원하시지 않느냐고 따지기 전에 내 죄로 죽어 마땅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에 감사해서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온 힘을 다해 충성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과 복음을 위한 뜨거운 열정으로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은혜로 구원하셨듯이 나도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고 또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라.

알렉산더 대왕이 한 번은 이웃나라의 친구로부터 귀중한 사냥개 두 마리를 선물로 받았다. 그는 크게 기뻐해서 이 개들을 데리고 토끼사냥을 나갔다. 그런데 개들은 사냥할 의욕이 전혀 없이 누워만 있었다. 며칠 후 사슴사냥을 나갈 때도 데리고 갔지만 역시 이 개들은 사냥할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알렉산더 대왕은 몹시 화가 나서 사냥개들을 죽여 버리고 말았다. 얼마 후 사냥개를 선물한 친구가 찾아왔을 때 대왕은 쓸모없는 사냥개를 선물했다고 화풀이를 했다. 설명을 자세히 들은 친구는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왕, 그 사냥개들은 호랑이와 사자 사냥을 위해서 훈련된 값비싼 개들이었습니다.” 그 사냥개들은 자기들이 훈련받은 목적과 다른 일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의욕과 열정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여러분은 삶에 열정이 있는가? 식지 않는 열정을 가지고 힘차게 달려가는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대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생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내가 가진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분명한 목적과 올바른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목적이 잘못되면 열정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열정이 없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여러분은 어떤 일에 열심과 열정을 느끼는가? 무엇을 생각할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우리의 목적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다. 나만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이 목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해서 그들도 나처럼 죄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최고의 목적이고 유일한 목적이다. 이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살지 않기 때문에 내 안에 열정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에 빠져 죽어 마땅한 나를 사랑하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또 복음을 위해 살라고 하셨다. 특별히 나를 통해 나의 가족, 형제, 친척, 친구, 이웃 그리고 내 민족을 구원하라고 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내게 주신 사명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지 않은 영혼들을 볼 때에, 믿지 않는 나의 가족, 형제, 친구, 이웃을 볼 때에 내 안에서 뜨거운 복음의 열정이 솟아나야 한다. 그들이 받을 멸망과 심판 때문에 그치지 않은 마음의 고통이 있어야 한다. 그 열정과 그 아픈 마음을 가지고 복음전파와 영혼구원을 위해 헌신하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주를 위해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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