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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라지는 광채 (출 34: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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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광채 (출애굽기 34:29-35) 


중세의 성화를 보면 믿음의 인물을 묘사할 때 얼굴 뒤에 쟁반만한 동그라미를 그려 넣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헤일로(halo) 또는 광채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인물에게는 이와 같이 얼굴에 광채가 났으리라는 그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성경구절에서 유래가 된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사십일을 보내고 십계명 돌 판을 가지고 내려올 때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눈이 부셔서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사람들 앞에 설 때는 얼굴에 수건을 썼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의 고린도후서를 읽어보면 그 이면의 스토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기 때문에 수건을 썼는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 광채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광채 때문에 수건을 썼지만 나중에는 광채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수건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쌍한 모세는 한번 시내산에 올라갔다가 일평생 얼굴에 수건을 쓰는 신세가 됐다는 얘기인데 이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효과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광채가 사라지는 날이 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의 지도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백성에게 자기가 여전히 광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될 책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체재 유지를 위하여. 이것이 거짓은 아니더라도 신화를 만들어야 될 필요가 있고 품위를 유지해야 될 필요가 있고 체면이 있고 백성들에게 지도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가 한 때 가졌던 광채가 여전히 있는 것처럼 보여야 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교계에 모세처럼 영향력이 컸던 인물들이 모세와 같은 고민이 있습니다. 그들도 한때 얼굴에 광채가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종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런데 그 광채가 영원히 지속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결국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어떤 경우에는 빨리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목회자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고 성도들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채는 이미 사라졌는데 여전히 있는 것처럼 행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행세한다고 사라진 것이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다보니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면 과거에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경험한 교회일수록 허위와 거짓과 신화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고 아닌 것을 그렇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작용이 생깁니다. 옛날에는 얼굴에 수건을 쓰는 것으로 이것을 숨길 수 있었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수건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처럼 빨리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과거의 것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 모세 얼굴의 광채는 왜 사라졌느냐. 영원히 남아있지 왜 그 광채가 사라지느냐. 단순한 이유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사라지는 겁니다. 사람은 금이 간 바가지와 같습니다. 새는 바가지. 집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는 것처럼 아무리 은혜를 받았어도 사람은 그 은혜를 영원히 간직하지 못하고 금이 가고 깨져있기 때문에 결국은 새버립니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건 하나님 탓도 아니고 사람 탓도 아닙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사람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 대하여 신화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한 사람의 슈퍼스타라든가 한 사람의 능력 있는 사람이라든가 한 대형교회라든가 한 대표적인 교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이 되시고 야곱의 하나님이 되셨던 것처럼, 다윗의 왕조를 솔로몬이 이어받았던 것처럼, 엘리야 선지자의 사역을 엘리사 선지자가 이어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한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고 한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고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사람에게 무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어지는 것이고 이어져야 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냈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사람은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였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지만 정작 이스라엘의 초대임금이 된 사람은 사무엘이 아니고 사울 왕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이스라엘의 초대임금이 됐지만 그를 이어 왕조를 세운 사람은 사울이 아니고 다윗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최고 선지자였지만 엘리야의 사역을 엘리사에게 물려주고 엘리야는 병거타고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영원한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당대에 하나님을 섬길 뿐 시간이 되면 땅에 묻히게 돼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묘비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하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땅에 묻으시나 당신의 일을 계속 하신다.’ 성 어거스틴이 시내 도성에서 한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나라는 무너지나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광채는 잠시 머물 뿐이고 소정의 목적을 이룬 후에는 사라지게 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세태에 대해서 실망하면 안 됩니다. 한때 하나님이 그를 쓰셨고 한 세대에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이루셨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바람과 같아서 한곳에 머무시는 것이 아니고 계속 움직이시고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눈은 온 세상을 훑으시며 당신을 전심으로 찾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쓰실 수 있는 민족과 당신이 쓰실 수 있는 교회와 당신에게 헌신하는 사람을 늘 찾으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초기에 제자들을 부르신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시는데 당신이 하시면 되지 왜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이미 장래 일을 내어다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이 땅에 계실 것이 아니고 삼년 반 후에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떠나가실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이후의 일을 예비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처음부터 사도들을 찾으시고 부르시고 훈련시키시고 믿음을 가르치시고 그들에게 성령을 기다리게 하시고 떠나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가신 후에 그 일이 중지됐습니까. 그 일이 쇠했습니까. 

그 일이 망했습니까. 아니에요. 더 크고 더 활발하게 지속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께서 사람에게 투자하시고 제자들을 키우시고 이 일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도 명하시기를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도 제자를 삼게 하셨어요. 이것은 어느 한 사람의 슈퍼스타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고 누룩처럼 퍼져나가게 하시고 땅 끝까지 퍼져나가게 하시고 대를 잇게 만드시고 계속되게 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더 커지게 하시는 섭리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님들 중에는 과거에 받은 은혜뿐만 아니라 과거에 체험했던 부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1907년 평양대부흥을 말하는 분들이 많지요. 아마 그때 살아계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리워하는 모양인데 1907년은 1907년이에요. 그때는 그때에요. 그때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부흥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다시 되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현재적으로 행하시는 분이지 우리로 하여금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향수를 가지고 그것을 말하고 과거에 거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당신을 계시하실 때 모세가 여쭤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대답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영어 번역이 더 쉽습니다. ''''''''''''''''I am''''''''''''''''이라고 대답하셨어요. 

하나님의 이름은 ‘I am’ 하나님은 계시는 분이라는 얘기인데 ‘I was’가 아니에요. 과거형이 아니고 현재형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I am’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적으로 계시고 현재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과거의 영광, 과거에 먹었던 만나, 과거에 경험했던 은혜만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한, 현재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한때는 성지였지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시작됐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루살렘에만 계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사하셨어요. 성령은 이사하셨습니다. 땅 끝을 향하여 움직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예루살렘, 이스라엘을 갈 때 성지순례를 가는 게 아니에요. 순례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예루살렘에만 계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지 여행을 가는 것이지 순례 가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다른 곳에 옮겨 가셨고 이미 다른 곳에 더 큰 일을 행하고 계시기 때문에 순례를 간다면 하나님이 지금 역사하사는 곳을 찾아가야 되고 어떻게 보면 지금 내가 믿음을 갖고 있는 이 현실이 성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뵙고 꿈에서 깬 후에 말하기를 ‘과연 이곳이 하나님이 계시건만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곳은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돌을 베개로 하고 하는 척박한 땅이 그곳이 하늘의 문이요 성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건만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왜 사람들이 성지를 가려고 하고 왜 사람들이 과거의 부흥을 그리워합니까. 지금 이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지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흔적이라도 보기 위하여 뭔가 과거의 유적이라도 보면 하나님의 흔적을 보리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과거의 유적을 보면 과거에 하나님이 하셨던 일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그것은 오히려 이곳에 계신 하나님, 지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로 하여금 놓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중에는 가끔 ‘우리 남편이 유학중일 때는요 교회에서 성가대도 하고 이일도 맡고 저 일도 맡고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주일예배도 나갈까 말까 해요.’ 그럼 다시 유학을 가시든가.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유학 때는 유학 때고 지금은 지금이에요. 과거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셨겠지만 지금 옛날에 하던 식으로 다시 성가대를 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에요. 지금은 지금대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 있고 우리에게 주시는 봉사의 일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어제의 하나님이 아니요 지금의 하나님이에요. 지금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우리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도 과거에 일어난 부흥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습니다. 대한민국에는 70년대 중반에 큰 부흥이 일어나서 여의도 광장에 대형 집회가 많이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현재 대형교회의 대부분이 70년대에 탄생했지요. 미국에서도 1960년대, 70년대에 지저스 피플이라고 큰 부흥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가 어디를 가면 부흥이 막 끝났어요. 어디를 가면 과거에 이러이런 일들이 있었대요. 근데 끝났대요. 참 이상한 일이에요. 어디를 가면 사람들이 옛날이야기를 해요. 옛날에는 이러이런 일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끝났다고.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아, 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찾으려 하지 말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찾아야 되겠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구경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실 일을 기다려야 되겠고 준비해야 되겠구나. 이게 더 어렵습니다. 

남을 통해서 하신 일은 구경하면 됩니다. 구경하려는 사람 많아요. 대학교 때 제 미국인 친구 한 명은 토론토에서 부흥이 일어난다니까 비행기 타고 토론토까지 쫓아가서 구경하고 또 플로리다에서 부흥이 일어난다니까 플로리다까지 쫓아가고 이런 식으로 늘 쫓아가느라고 바빴는데 왜 자기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유명한 하키 선수가 이런 말을 했지요. ‘나는 공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지 않고 공이 있을만한 곳으로 달려간다.’ 성령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만한 곳으로 우리가 달려가고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언제까지 남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만 부러워하고 그것을 구경하려고만 하겠습니까. 그 사람이 믿음으로 산다면 나도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면 나를 통해서 역사하지 않는다는 법이 없습니다. 

남들은 나보다도 예수님을 더 믿기가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처럼 오해가 없습니다. 목사가 여러분보다 예수 믿기가 더 쉬운 것 같습니까. 아니에요. 목사들이 일찍 늙는 것을 보세요. 여자들이 남자보다 예수님을 더 잘 믿는 것 같습니까. 그럼 여자들이 기도하면서 왜 그렇게 웁니까. 죄가 많아서 그렇습니까, 그럼 고민이 많아서 그렇습니까. 이북사람들이 더 예수님을 쉽게 믿는 것 같습니까. 아니에요. 왜 그럼 월남을 했겠습니까. 

베드로 시대에는 예수님 믿기가 더 쉬웠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왜 베드로가 순교를 했겠습니까. 마틴 루터 시대에는 예수님 믿기가 더 쉬웠을 것 같습니까. 아니에요. 그렇다면 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가를 만들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예수 믿는 것이 어렵다면 나에게만 어려운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쉽다면 모두에게 쉽고 나에게도 쉬운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이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앓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형제들은 다 동일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고 나도 예외가 아니에요. 내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어렵다는 말은 이것이 진정으로 귀중한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게 장난이 아니고 취미생활이 아니고 정말로 내 중심의 진실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 아니에요. 그냥 인구 조사할 때 기독교인이라고 적을 수 있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정말로 나의 모든 노력과 나의 정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족하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아내에게만 족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는 나에게 족하고 똑같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 족합니다. 과거뿐만이 아니고 지금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은퇴하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 나에게 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바라보지 말고 남의 실패를 보고 저 사람도 저러니 나도 저렇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남이 저러니까 나라도 잘 믿어야 됩니다. 나라도 오늘 정신을 차리고 주님을 좇아갈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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