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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뜻을 인정함 (행 15:36-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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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인정함 (행 15:36-16:10) 
 
 
2차 전도여행(15:36-18:22)을 중에서 오늘은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선 사건(15:36-41)과 양육 사역에서 유럽 전도로 계획을 바꾸게 되는 과정(16:1-10)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수일 후에, 바울은 바나바에게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15:36)고 제안했습니다. 복음을 영접한 성도라면 누구나 전도할 수 있지만, 양육은 잘 가르치는 은사를 더 필요로 합니다. 바나바도 새신자 전도보다 기존 신자의 양육이 중요하다는 점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가고자”(37) 했으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38)하여 견해 차이가 생겼습니다. 서로 감정이 고조되도록 격론을 벌이다가 결국은 “심히 다투어”(39) 피차 갈라서게 되었지요.

지금도 성도의 공동체는 ‘관용’과 ‘엄격’ 사이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두고 종종 갈등합니다. 자녀의 신앙 교육에서도 이것이 늘 갈등의 요소로 작용하지요. 바나바에 대해서는 단순히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갔다고 표현한 반면 바울에 대해서는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났다고 기록하여 안디옥 교회가 바울의 견해를 좀 더 타당하게 여긴 듯 여운을 남깁니다(39b-40). 하지만 둘 중 하나가 정답이라고 분명히 말하지는 않습니다. 누가 더 타당했느냐보다 중요하게 다룬 것은 분열의 사실 자체입니다. 담담하게 기술되었지만 누가 옳았든 이 사건은 교회에 오랜 상처로 남았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바울을 기어이 찾아서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해준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그 후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했습니다. 옳다고 확신하는 견해에 너무 분명한 차이가 있어 더 이상 함께 사역 할 수는 없었지만, 바울이 그 후에도 바나바를 헌신적인 주의 일꾼으로 생각했던 것은 분명합니다(고전 9:6). 훨씬 성숙한 노년에는 마가에 대해서도 나의 일에 유익한 나의 동역자라 칭하는 관계가 됩니다(딤후 4:11; 몬 1:24). 바울 역시 성숙의 과정에서 허물을 남기는 한 인간이었습니다. 완전할 수 없는 인간성의 한계 때문에 서로 상처를 주고 갈라지기도 했지만, 성령님께서는 그 후에 그를 기묘하게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바나바의 반대 경로인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했습니다(11). 이전에 돌에 맞았던 “루스드라”를 방문했을 때, 바울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디모데라 하는 제자”를 만납니다(16:1-3). 눈물로 씨 뿌렸던 장소에서 그 열매를 발견했기에 기쁨도 컸을 것입니다(시 126:5-6). 그에 대한 바울의 각별한 애정은 서신서에 등장하는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고전 4:17),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디모데”(딤전 1:2)라는 호칭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바나바와 헤어짐으로 인한 마음 한 구석의 우울함이 새로운 만남으로 상당히 씻겼겠지요. 구속 역사의 원대한 흐름을 주관하시는 중에도 당신님의 자녀를 적절히 위로하시는 섬세한 아버지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입니다(1). 바울은 유대와 헬라의 문화를 동시에 간직한 신실한 형제가 전도여행에 적합하다고 여겨 동참시키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3)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간주하는데, 할례가 없는 유대인은 교제하기에 대단히 꺼림칙한 존재입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는 복음을 분명히 하면서 원만한 교제를 고려한 것이었으므로 디모데의 할례는 적절한 조치였습니다. 바울은 방문하는 성마다 이와 똑 같은 원칙을 “지키게” 했고, 그러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했습니다(4-5).

바나바와의 갈등에서는 바울이 매우 엄격한 인상을 주었는데, 이곳에서는 상당히 유연합니다. 바울은 원칙에 확고했을 따름이지 완고한 사람은 아니었지요. 구원과 관련해서 할례는 전혀 불필요했기에, 바울은 원칙대로 헬라인 디도에게 결코 할례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갈 2:3). 하지만 이미 유대인에게는 풍습이기도 한 할례를 유대인 디모데에게는 금지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지킬 율법은 아니지만 필요에 따라 행할 수도 있었지요. 복음에 기초한 원칙이 명확히 서 있으면 강력히 거절할 부분과 유연하게 수용할 부분을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성도가 성숙한 성도이듯, 교회도 원칙이 분명해 설수록 더 성숙한 교회로 자라갔던 것이지요.

오늘날 한국 교회의 미성숙성은 원칙의 부재에서도 나타납니다. 만일 교회의 신앙고백인 신조를 지킨다면, 다양한 해석들이 있을지라도 일치점과 차이점을 구별할 것입니다. 일치점은 즐겁게 수용하고, 차이점은 보다 성경적인 견해를 다각도에서 비교해볼 수 있는 재료로 삼겠지요. 하지만 성도가 원칙에 해당하는 신조를 모를 때, 좋다는 생각만 들면 율법주의든 신비주의든 세속주의든 구별 없이 받아들입니다.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보니 믿음이 약해져서 이단에 잘 미혹되고, 심지어 교회 안에 이단자가 활동해도 분별하지 못합니다. 다음 세대 교회의 견고함을 위해서는 교회회의가 정한 건전한 신앙고백서들이 다시 힘써 가르쳐져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를 얻은 바울 일행은 아시아 전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하셨습니다.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통과하여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를 썼는데, 또 다시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결국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6-8). 시간과 재정과 체력만 낭비하고 아무 소득 없이 이러 저리 헤맨 꼴이 지요. 여기서 1차 전도여행의 성공은 사도 바울이 열심히 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공로적인 생각은 다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동일한 사람이 똑같이 애써도 그분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지요. 하지만 감사한 것은 아무 열매가 없고 모든 길이 막혀도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철저히 기도하고 계획할지라도 한치 앞을 정확히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사도 바울조차도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고 행하는 것은 아니었지요. 이방인에게 주의 이름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 줄은 알았지만(9:15), 구체적으로 어떤 지역에 복음을 전할지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옳다고 깨닫는 범위 내에서 행할 뿐 일일이 지시받은 것은 아닙니다. 성숙한 성도 역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헤맬 수 있습니다. 이 길이 막혀 저 길로 행하다가 막다른 길에 몰리고,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그냥 갈 수 있는데 까지 가볼 때도 많습니다. 내 맘대로 안돼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라는 심정으로 오늘 하루 주어진 일에 힘쓸 뿐인 경우도 많지요.

본문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순간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계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풍뿐만 아니라 역풍을 통해서도 인도하십니다. 나름대로 계획하고 힘쓴 일이 하나님께서 뜻하신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인간의 한계로 인한 약점과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조차 망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목할 점은 모든 길이 막히는 상황에서도 바울 일행이 성령님께서 막으시고 허락지 않으심을 인식했다는 것인데, 이러한 인식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깨닫게 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제가 끊어지지 않으면 마침내 주님께서 뜻하시는 방향과 일치하게 되는 교차점에 이르게 됩니다.

9절을 보면 드로아에서 바울은 밤에 “환상”을 봅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청했지요. 그 후 바울 일행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는데,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10). 하나님과의 교제가 빈약한 사람은 계획이 좌절되면 단순히 상황 탓으로 해석하는 반면 환상을 보면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 일행은 계획이 막힐 때는 성령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반면, 환상을 보았을 때는 그것을 참고하여 ‘하나님이 부르심일 수도 있겠다’는 정도로만 인정했을 뿐, 예수님의 영이 내게 보여주신 뜻이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을 만한 성숙성이 없을 때 종종 잘못 해석되곤 합니다. 성경의 구속사에 대한 큰 그림을 모르는 성도라면 환상을 자기 욕망대로 해석할 위험이 높습니다. 한계를 가진 인간으로서는 가능한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계획을 세우고 계획한 대로 열심히 실천하는 자세가 중요하지만, 비록 완벽해 보이는 계획을 세웠을지라도 성령님의 뜻과 일치하는 방향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조심스럽고도 민감해야 할 것인데, 그러려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들로 나타났는지 면밀히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시편 23편 강해 참고).

인간들이 때로는 다투어서 갈라지고, 때로는 엉뚱한 곳에 힘을 쏟으며 헤맸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든 이뤄지니 내 욕망대로 살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록 한계가 있을지라도, 비록 우둔하여 잘 깨닫지 못할지라도, 비록 실패하고 또 실패할지라도, 비록 막히고 또 막힐지라도, 하나님의 크신 뜻이라 인정하는 만큼이라도 성실하게 해 나가려 할 때, 오묘하신 하나님께서는 역풍을 통해서라도 인실 것을 신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막히고 일이 안된다고 염려하고 불안해할 것이 아닙니다. 계속 신뢰하며 전진하다보면 하나님께서는 내 계획 속에 전혀 없었던 원대한 새 일에 힘쓸 수 있게도 하십니다. 

본문은 ‘성령님’과 ‘예수님의 영’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똑같이 적용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흔적이지요. 나의 삶 속에서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도 좀 더 민감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고 묵묵히 전진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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