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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창립] 새 길을 닦는 사람들 (사 5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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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길을 닦는 사람들(교회 창립 34주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오늘은 소망교회 창립 34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귀한 교회를 여기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하나님께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주셨습니다. 복음전도와 선교, 구제와 봉사, 그리고 다음세대를 양육하는 교육을 하게 하시고, 무엇보다 매주일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로 하여금 예배공동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복된 교회로 세워주시니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올려드립니다. 

서른네 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치면 젊음의 절정을 구가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소망교회의 서른네 돌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랜 기간 침묵의 시기를 깨뜨리시고 사역을 시작하신 나이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쉴 틈도 없이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전심전력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과 상처 난 사람들을 만나시고 이 땅에 피폐해진 영혼의 아픔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시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 그가 스스로 사명을 선포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복음 4:18-19)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에게 임하셨다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면서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포로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탄에 억눌리고 죄에 억눌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해방의 선언, 용서의 선언, 그가 이 땅에 생명과 풍요로 오셨다는 사실을 선언하시면서 3년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악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에 달리셔서 비통하게 짧은 인생을 끝마치셨습니다. 이때가 서른세 살의 청년의 나이였습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소망교회가 서른네 살 맞게 되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뒤를 계속 따르라고 하는 하나님의 징표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매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예수님의 삶을 다시 이어받고 행해야 할 것임을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에 확인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품으신 하나님의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대의 문제를 직시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가슴으로 담는 예수님의 태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친히 주신 이 가슴 아픈 마음을 지니시고 제자들을 키우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하시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세상은 문제가 많습니다. 세상은 공격적입니다. 세상은 어두움의 세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태복음 10:16)

양을 이리 가운데 내어놓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양처럼 연약한 자다. 네가 상처를 받으며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를 통해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을 것이다. 그때 네가 지혜로워야 된다. 그때 순결해야 된다.” 

이리란 물어뜯고 죽이는 세력들입니다.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어둠의 세력들을 총체적으로 명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유대 왕들, 로마제국의 정치세력들, 기득권에 안주하려고 했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이리저리 우왕좌왕하는 무지몽매한 민중들까지 모두 포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모든 세력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곳이 어둠이고, 그곳에 불의와 죄악이 있지만 너희들이 나아가야 그 죄악 된 세상을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우리들만의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끼리 좋아하고 우리끼리 살고 우리끼리 누리는 종교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의 고통의 자리, 죄악의 자리로 내어보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세우시고 양육하시고 세상을 향하여 내보내셨습니다. 우리들도 예배를 드리고 다시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어둡고 침침하고 불의와 죄악이 가득해도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갖는 축복이요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일꾼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 동일한 하나님의 심정이 들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제국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절망했습니다. 기대감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노예처럼 살다가 죽게 되겠구나 하고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말씀을 해주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이사야 58:12) 

새로운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이 시대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십니다. “네가 가는 곳은 황폐된 곳이다. 네가 가는 곳은 역대의 파괴된 기초들이 다 사라지고 무너진 곳이다.” 그리고 여기 보면 동사가 나오는데 “다시 세울 것이다.” “기초를 쌓을 것이다.” “보수할 것이다.” “길을 수축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건축입니다. 건설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건축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새롭게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땅이 있어야 합니다. 건축설계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명으로 알고 거기에 자기의 삶을 쏟아 붓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언젠가 이명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 신입사원 시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처음 신입사원 면접을 하게 되었을 때 故정주영 회장께서 이렇게 물었답니다. “자네는 건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때 젊은 청년 이였던 이명박 장로님께서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건설이란 창조입니다.” 그렇게 그가 늘 배워왔던 신앙의 언어를 통해서 창조라고 얘기를 하니까 정회장께서 아주 기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건설만 창조일까요? 여러분의 생애를 되돌아보십시오. 우리의 생애가 창조였습니다. 생명을 창조했고, 풍요를 창조했고, 질서를 창조했고, 아름다움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들을 새롭게 창조했던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파괴는 순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파괴는 갖고 있는 것들이 무질서의 파편들로 쪼개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하든 파괴는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건설과 창조는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소모됩니다. 계획과 질서가 있어야 됩니다. 조화와 아름다움을 향해가야 합니다. 이것을 만드는 사람들은 지혜와 총명이 필요합니다.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거기에 시간과 정성과 열정을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 창조행위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창조행위가 일어나기를 바라면서도 수고하지 않고, 땀 흘리지 않고, 지혜를 공고히 짜지 않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축복받은 비결이 무엇일까요? 묵은 땅을 기경한 것입니다. 묵은 땅을 그대로 두지 않고 깊이 파서 뒤집어엎은 것입니다. 옛것에 매어있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건설해 나아갔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이 그랬습니다. 대한민국의 백성들이 가난한 것 때문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가난을 극복하고 풍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애썼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선배들입니다. 

독재정치가 있었습니다. 인권이 억압되었습니다. 그때 독재를 거부하고 민주정치를 추구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민주주의의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 백성들에게도 불의와 타락의 어두움이 있었습니다. 그 어두움을 타파하고 이 땅에 공의와 정의를 세우려고 했던 우리의 선배들, 아니 믿음의 사람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속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 우리 속의 황폐된 것들, 우리 속의 상처 난 것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해야 변화와 창조의 동기를 부여 받습니다.
 
본문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초석들이 무너져서 나뒹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거할 곳이 없어서 황야의 길도 없는 곳을 방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탄식소리였습니다. 그 탄식소리를 들었던 믿음의 사람들이 분연히 일어나서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분노를 마음에 품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가 사람에게 전달될 때 그것은 안타까운 분노입니다. 사랑이 담긴 분노입니다. 염려하는 분노입니다. 집나간 탕자를 그리워하면서 어서 되돌아오라고 탄식하는 분노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아직 우리 주위에 어두운 데가 있지 않습니까? 아직 황폐된 곳이 있지 않습니까? 아직 무지하고 미련한데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임을 알고 안타깝게 생각할 때에 사명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반복적으로 아파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때로는 예언자가 됩니다. 때로는 이 시대의 선구자가 되어 앞장서서 가야할 길을 먼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개신교는 마틴 루터가 본격적으로 95개조 항목을 비텐베르크 성당 벽에 썼을 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 부패를 보았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부속품처럼 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직제도가 오히려 영적지도자들을 타락하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파는 모습으로 전락한 교회를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행위와 돈과 자기들의 삶의 자랑으로 구원받는 것으로 바꿔놓는 잘못된 교리를 보면서 그는 마음속에 거룩한 분노를 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함께 동참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개신교가 이 땅위에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핍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개신교인들을 향해서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렀습니다. 저항하는 사람들, 항거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본질 속에 이것이 있습니다. 악한 것, 부정적인 것, 잘못된 것에 대한 저항의식. 잘못된 것에 대하여 분연히 일어나는 분노를 통해서 역사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사람들만의 일일까요? 우리들의 일은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떤 직업을 갖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태까지 어떻게 사셨습니까? 우리 생애 속에 이 거룩한 분노가 우리의 마음을 붙잡았던 때가 있지 않습니까? 왜 의사가 되었습니까? 그냥 존경받는 직업, 먹고 살만한 직업이기 때문에 의사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질병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안타까워한 경험이 없으십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고질병에 걸려 고통당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이 질병을 치유하는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하면서 의사가 되지 않았습니까? 왜 정치가가 되었습니까? 그냥 권력자가 되고 싶어서, 세상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탐해서 정치가가 되었습니까? 그건 정치가가 아닙니다. 어떻게 국민을 섬기고 이 나라를 반듯하게 세울 수 있을까 마음속의 열정을 가지고 정치가가 되지 않았습니까? 

왜 판검사가 되었습니까?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하는 잘못된 현상을 보면서 통탄하는 마음 때문에 이 길을 가지 않았습니까? 잘못된 관행을 고치고 이 사회에 정의와 공의를 세우겠다고 다짐하면서 어려운 사법고시를 보지 않았습니까? 왜 기업가가 되었습니까? 

왜 사업가가 되었습니까? 이 시대가 당하고 있는 고난과 가난을 애통해하면서, 먹지 못하고 헐벗은 백성들의 아픔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들을 풍요롭게 해주기 위해서 기업가와 사업가가 된 것이 아닙니까? 적어도 집안에 가난의 고리를 내가 끊어보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사업을 하지 않습니까? 

왜 학교 교사가 되었습니까? 왜 교육자가 되었습니까? 사람이 소중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어렸을 적에 올바른 정신과 사상이 들어가면 사람이 바뀌고 공동체가 바뀌고 민족의 역사까지 바뀔 것이라는 꿈을 꾸면서 교육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왜 문화예술인이 되었습니까? 처음에는 좋아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서 어두움을 밝히고 싶었을 것입니다. 추한 것, 더러운 것을 넘어서 조화롭고 아름다운 것을 향해 달려가기 원해 이 길을 택한 것이 아닙니까? 왜 작가가 되었습니까? 

왜 언론인이 되었습니까? 이 땅의 사회공론을 세워서 올바른 사회를 세우고 싶은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왜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놀라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절망하는 사람들,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기 때문에 말씀의 사역자가 되고 이국땅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분노를 회복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 거룩한 분노가 우리에게도 있지 않았습니까?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이 시대가 이런 어둠속에 있어서는 안 되는데.’ 이런 문제점들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이것이 무너졌습니다. 그냥 습관화되었습니다. 일상 속에 그냥 파묻혀버렸습니다. 내 속에 있던 거룩한 마음들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시 회복시켜야 합니다. 

이번 여름에 부목사님 한 분과 성도님들이 종교개혁지를 방문하면서 영국의 선교중심지였던 에딘버러를 찾았습니다. 그곳은 20세기 초 세계선교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났습니다. 그곳에 42개의 교회가 있는데 정기적으로 예배드리는 교회가 두 곳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40개의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박물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카페가 되었습니다. 술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성도님들의 가슴에 통탄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술집이 되다니! 믿음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시대에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아직도 어두움의 모습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아파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에게 문제가 보이고 대안이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랫동안 기도하셨습니까? 

그런데 변화가 없고 상황이 좋아지지 않아 하나님께 실망하면서 기도를 멈춰버린 사람들은 없습니까? 가정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다가도 자포자기한분들은 없습니까? 직장과 회사를 위해서 기도하다가 그 기도의 열정이 이제는 다 꺼져버린 재와 같이 된 분들은 없습니까? 사회의 불의와 악에 대해서 분노하면서도 내게는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내팽개쳐버리고 살고 있는 분들은 없습니까?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고 환멸을 느낀다고 국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멈추고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그만 둔 사람들은 없습니까? 북한을 위해서 수십 년간 기도해도 변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해서 북한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멈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룩한 분노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직도 우리 주위에 어두움이 있습니다. 아직도 황폐된 곳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상처를 받고 있는 곳들이 있습니다. 소망교회가 34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이 거룩한 분노를 다시 되살려야 합니다. 분노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입으로만 하는 분노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미움이 담긴 분노만으로는 세상이 그것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파괴할 수는 있지만 창조의 자리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분노는 기도하면서 하는 거룩한 분노입니다. 사랑하면서 하는 거룩한 분노입니다. 우리는 내 몸을 드려서 하는 거룩한 분노의 자리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황폐된 곳들이 다시 세워질 것입니다. 무너진 기초들이 다시 쌓일 것입니다. 황량한 들판에 새 길이 생길 것입니다. 그곳이 사람들이 거하는 생명의 자리로 바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속에 끓었던 열정들, 하나님 앞에서 다짐했던 우리의 생각과 결심들을 다시 우리의 가슴속에서부터 되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향해 파송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말씀의 사람입니다. 기도의 사람입니다. 사랑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애통해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시대의 문제를 가슴으로 품으십시오.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소식을 이 땅에 전달할 때 우리의 주위가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도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사도 바뀌는 놀라운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황폐하고 기초가 무너진 곳에 다시 새로운 기초를 쌓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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