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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차라리 대접하라 (왕하 6: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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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대접하라 (왕하 6:20-23)


[그들이 사마리아에 들어서자, 엘리사가 “주님, 이들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눈을 열어 주셨다. 그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사마리아 한가운데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이 그들을 보고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아버지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이 눈을 뜨고 보게 되면, 쳐서 없애 버려도 됩니까?” 엘리사가 말하였다. “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을 칼과 활을 가지고 사로잡았습니까? 어찌 임금님께서 그들을 쳐죽이시겠습니까? 차라리 밥과 물을 대접하셔서, 그들이 먹고 마시게 한 다음에, 그들의 상전에게 돌려보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왕이 큰 잔치를 베풀어서 그들에게 먹고 마시게 한 다음에 그들을 보내니, 그들이 자기들의 상전에게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시리아의 무리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땅을 침략하지 못하였다.]

•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세계성찬주일인 오늘,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세계성찬주일은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하고 교회의 하나됨을 재확인하는 복된 날입니다. 일 년에 한 번 하는 의례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결단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엘리사 이야기의 일부인 오늘의 본문은 평화의 길을 찾는 우리에게 좋은 지침이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라는 점만 본다면 엘리사는 성경에서 예수님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민중들은 그를 통해 나타난 이적들을 기억이라는 전승 매체를 통해 오랫동안 전해왔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갈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리아 왕은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신하들과 작전회의를 하고 군대를 출동시키면 이스라엘 군인들이 미리 알고 길목을 지키곤 했던 것입니다. 왕은 내부에 첩자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왕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한 신하가 말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는데 그는 왕이 침실에서 은밀하게 한 이야기까지 알아서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졌습니다. 왕은 엘리사를 제거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합니다. 기마와 병거와 중무장한 강한 군대였습니다. 

엘리사는 그 때 도단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른 아침 성 밖을 내다보던 엘리사의 시종은 성읍이 포위된 것을 알고는 경악합니다. 포위망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혼비백산한 그가 엘리사에게 다급하게 상황을 알리지만 엘리사는 태평합니다. 그럴수록 시종은 더욱 애가 탔습니다. 마침내 엘리사는 시종의 마음을 안돈시키면서 하나님께 그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영의 눈이 열리자 시종은 온 언덕에 가득 차 엘리사를 호위하고 있는 불 말과 불 수레를 보았습니다. 

신앙의 언어를 산문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늘 참과 거짓이라는 척도를 가지고 이야기를 재단하곤 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언어는 시적인 언어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의 언어는 참과 거짓이라는 척도를 내려놓고 그 속에 담긴 진실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엘리사는 ‘함께 계신 하나님’을 믿고, 생과 사를 그분께 맡겼기에 태연자약했던 것입니다. 

•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성경은 아주 재빠르게 그가 또 기도하자 시리아 군인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판단력이 어두워졌던 것인지, 지형에 익숙하지 못해 헤맨 것인지, 자욱한 안개에 갇힌 것인지, 신적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에 빠졌습니다. 엘리사는 길을 안내해주겠다면서 그들을 사마리아로 데려갑니다. 엘리사가 다시 기도하자 그들의 눈이 열렸고, 비로소 자기들이 적국의 수도 한복판에 들어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칼 한번 써보지 못하고 포로가 된 셈입니다. 시리아 특전사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승리에 고무된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에게 묻습니다. “그들이 눈을 뜨고 보게 되면, 쳐서 없애 버려도 됩니까?”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시리아 군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죽음을 피할 길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몸과 마음이 굳어 옴짝달싹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서 등을 맞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두고 온 가족들의 얼굴도 떠올랐을 것입니다. 어쩌면 종으로 남은 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뜻밖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을 칼과 활을 가지고 사로잡았습니까? 어찌 임금님께서 그들을 쳐죽이시겠습니까? 차라리 밥과 물을 대접하셔서, 그들이 먹고 마시게 한 다음에, 그들의 상전에게 돌려보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22)

모두가 놀랐을 것입니다. 이게 전쟁 상황에서 가능한 이야기인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적을 잘 대접해서 돌려보내라니요? 엘리사는 비폭력 실천가처럼 보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의 충고대로 합니다. 큰 잔치를 베풀어서 시리아 장병들로 하여금 먹고 마시게 한 후에 돌려보냈습니다. 이게 잘 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얼마 뒤에 시리아 왕 벤하닷이 전군을 이끌고 사마리아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엘리사의 햇볕정책은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적을 호의로 대하면 안 된다는 주장의 전거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나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해명을 해야 합니다. 신앙은 현실 논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그래서 비현실적으로 보입니다. 신앙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하지만 때로는 그것을 넘어서기도 합니다. 외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은 이성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계산이 아닙니다. 당연한 것을 그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파종과 같아서 우리의 신앙적인 말이나 행동은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때와 장소에서 결실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엘리사의 호의에 힘입어 새 생명을 얻은 시리아 장병들이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또다시 전쟁에 동원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때로 자기의 의사와 상관없이 역사의 격랑에 휩쓸릴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호의를 경험하기 이전과 이후의 그들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사 이야기에 마치 여담처럼 끼어든 이 이야기를 통해 저는 흑암 세상을 이기는 산 희망을 봅니다. 

• 평화로운 세상의 단초

얼마 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반인 마무드 압바스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팔레스타인의 유엔 정회원국 가입을 요청하는 서류를 제출했습니다. 국제사회는 팔레스타인의 그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원국인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게 거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를 원하지만 팔레스타인은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게 진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보도에 접한 후 마음이 착잡해졌습니다. 그의 발언은 대화의 거부이고, 평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세상에서 가인의 후예인 라멕의 노래가 널리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조그만 상해를 입힌 남자를 죽였다고 자랑하던 사람 말입니다. 

평화의 길은 멀고도 멉니다. 하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압도적인 무력이나 경제력으로 누군가를 굴복시키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불안해진 것은 소수의 테러리스트들이나 불량 국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붙이는 이들 때문입니다. 하루에 1달러 미만의 돈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10억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영양실조로 또 기본적인 의약품이 공급되지 않아 죽어가는 어린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런 상황이야말로 극단적인 행동을 낳는 온상입니다. 

세상의 권세 잡은 이들은 눈엣가시같은 몇몇 불량국가와 테러리스트들을 없애면 세상이 평화로워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몽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평화는 밥을 골고루 나눠먹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마을 사람들이 그토록 평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이끄는 비결이 뭐냐는 질문에 촌장은 ‘잘 멕이는 거지 뭐’라고 대답합니다. 처음에는 웃었지만 그것은 일종의 촌철살인이었습니다. ‘쳐서 죽일까요?’ 하고 묻는 왕에게 엘리사는 ‘차라리 대접하여 보내라’고 말합니다. 저는 외람되지만 그날 그곳에서 벌어졌던 식탁이야말로 성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먹장구름 속에서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처럼, 폭력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드러난 평화로운 세상의 단초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전 세계에 있는 신앙의 형제자매들도 우리처럼 오늘 주님의 성찬상 앞에 서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거룩한 일치의 신비 가운데로 부르고 계십니다.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 속에 주님의 영을 정성껏 모셔야 합니다. 너와 나를 가르는 담, 차별과 편견을 공고히 하는 모든 담을 사랑으로 허무시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임한다면 우리는 평화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한 초대에 기쁨으로 응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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