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온유한 사람 (마 5:1-5)

첨부 1


온유한 사람 (마 5:1-5)

예수님께서는 팔복 중 세 번째로 <온유한 사람이 받는 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사람, 참 좋은 말입니다. 

여러분, 온유가 무엇입니까? 문자적인 의미는 <온순하고 유순하다>는 뜻입니다. 늘 조용합니다. 누가 건드려도 참습니다. 억울해도 소리 없이 견딥니다. 화를 내면서 대항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드럽게 대합니다. 이런 태도가 온유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바보 취급당하기 딱 십상입니다. 동네북처럼 이 사람도 찔러보고, 저 사람도 건드리고 갑니다. 그래도 가만히 있습니다. 바보 같지요? 

그렇다면 온유는 아무 힘도 없고 약한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저는 부모님이 연로하셨고, 당시 저 혼자였기 때문에 군 복무를 짧게 마쳤습니다. 그 때 엄청난 설움을 당했습니다. 밥도 안 먹여주고, 옷도 안 주고, 군화도 안 주고, 아무 것도 해 주는 것이 없었습니다. 옷도, 군화도 용산에 가서 중고품으로 제가 사고, 밥도 도시락 싸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온갖 압박과 설움에 시달렸습니다. 대한민국에 그런 군대도 있느냐구요?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방위라는 것입니다. 저는 공군사관학교에서 방위로 근무했는데, 방위 보다 더 낮은 계급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설움 당하는 방위들도 기가 사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체육대회를 하는 날입니다. 장교 한 팀, 사병 한 팀, 그리고 사관생도 한 팀, 거기다가 방위 한 팀, 이렇게 팀을 만들어 맞붙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흥미진진한 것이 씨름이었습니다. 그 씨름의 마지막 승자는 누구였을까요? 사관생도일까요? 장교나 사병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방위, 그것도 모두가 우습게 보는 이발소 방위병이 우승자였습니다. 

이발소 방위병은 등치도 작았습니다. 말도 없이 늘 조용했습니다. 이발하러 온 장교나 사병들 모두가 그를 우습게 여기면서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칩니다. 그래도 그는 일절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씨름을 하던 그 날, 평소와는 전혀 다른 그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방위들 사이에서는 그가 씨름을 잘 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기에 강권해서 출전하게 했습니다. 그는 등치 큰 장교도, 사병도 모두 들어 던지고 당당하게 우승했습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유명해졌습니다. 그리곤 그의 숨은 전력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씨름 선수였다는 것, 그러다가 주먹 쓰는 아이들 틈에서 노느라고 고등학교 진학을 못했다는 것, 나중에는 주먹 바닥에서 <형님> 소리를 들었다는 것, 순해 보이지만 화가 나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것, 방위 근무를 하게 된 이유는 중졸 학력 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 낮에는 방위지만 저녁에 근무 마치고 나가면 장군 부럽지 않다는 것이 하나씩 소문이 났습니다. 

언젠가 저와 동갑인 그에게 <왜 평소에 귀찮게 건드리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가소롭잖아!>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가 조용히 있었던 것은 약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가 가소롭게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후 그는 작지만 강한 사람으로 통했고, 그 날 이후 이발소에 와서 장난치는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조용히 있다고 절대 바보가 아닙니다. 약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게 아닙니다. 온유도 그렇습니다. 약한 사람이 온유하게 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강하기 때문에 온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예를 예수님을 통해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가장 온유한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53장 7절을 보면 예수님의 온유하심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의미하는 말씀이지요. 

예수님의 고난을 보십시오.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뺨을 맞으시고,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이 저지른 죄 때문이라면 억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때리고 조롱하던 죄인들 때문이었고,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너무도 억울한 고난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어떻게 대응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일체 대응치 않으셨습니다. 그 처절한 고난 중에서도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처럼 묵묵히 계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온유>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신 것이 예수님의 연약함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강한 분입니다. 전능자이십니다.  천지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분, 물 위를 걸으신 분, 죽은 사람을 살리신 분이었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가장 강하신 분이 온유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온유란 약한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유란 힘없는 사람의 태도라는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진정한 강자만이 온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강한 사람은 어떻게 온유할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그가 마지막 승리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내가 져 준다. 네 마음대로 해 봐라. 조금 있으면 내가 이긴다.> 이게 강한 사람의 여유입니다. <얼마든지 이길 수 있으니, 좀 봐 주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출애굽기 3장과 4장에 나옵니다. 그 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그는 과거에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사십 년 전에도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자 했지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가 나서 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해야 했습니다. 그 후 사십 년 세월이 더 흘렀는데, 모세의 마음에는 의욕도,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능력도 없고, 말재주도 없다고 하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꾸중도 하시고, 달래기도 하시면서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증거도 여러 가지 보여주셨습니다. 지팡이를 던지면 뱀이 되고, 다시 잡으면 지팡이가 되는 체험도 주셨습니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다시 빼니 나병이 생겼고, 다시 품에 넣었다가 빼니 깨끗이 낫는 경험도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일강의 물을 가져다 부으면 피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그 지팡이를 손에 잡고 애굽 왕 바로 앞에 섰습니다. 그 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도우실 것이고, 바로는 금방 굴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세의 말을 들은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금방 자유를 얻고 애굽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바로 왕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바로는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전에는 짚을 주면서 벽돌을 만들게 했는데, 이제는 짚도 주지 않고, 전과 동일한 분량의 벽돌을 생산하도록 몰아붙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온 후로 노역이 더 심해졌고, 견디기 힘들어졌습니다. 

이 때 백성도, 모세도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출애굽기 5장 22절 이하에서 모세는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출애굽기 6장 1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하나님께서 약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아직 하나님께서는 시작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은 바로 왕이 마음대로 하도록 놔두신 시간이었습니다. <지금은 마음대로 까불라고 해라. 내가 나가기만 하면 금방 끝난다...> 이런 식의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조용히 계신 이유는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아직 하나님께서 행동하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서기만 하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세력은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에 하나님을 원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자. 아직 하나님께서 행동하지 않으신 거야. 이제 하나님께서 손을 펴시면 바로 왕은 항복할 거야. 당신들 애굽 사람들이 우리를 이렇게 힘들 게 하지만, 조금만 있어 보시오. 마지막 승자는 우리가 될 것이요...>라고 생각하고 여유를 가져야 했습니다. 

이런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있을 수 있는 태도, 그게 온유입니다. 조급하지 않고, 흥분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고, 대응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있습니다. 바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평정심을 잃지 않습니다. 그는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성도는 위기 앞에서도 태산처럼 있어야 합니다. 이게 온유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되길 원합니다. 

.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온유한 사람은 무슨 복을 받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보처럼 앉아 있는 사람, 당하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나중에는 승리자가 되어 땅을 차지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에도 나옵니다. 시편 37편 11절을 보면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온유함으로 땅을 차지한 승리자가 누가 있을까요? 성경에서 그 대표적인 인물을 찾아본다면 다윗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 비하여 약자처럼 보였습니다. 다윗은 쫓기는 신세였고, 사울은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고, 다윗은 늘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이런 고통은 억울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동안 사울 왕을 위해 최선을 다해 충성했습니다. 전쟁터에서 날밤을 새우면서 사울 왕을 위해 싸웠고, 자신의 목숨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울은 그를 죽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울을 대항하다고 해도 그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왔습니다. 어느 날 사울이 피곤하여 동굴에서 잠이 들었을 때 다윗은 그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부하가 단칼에 그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어떻게 했나요? 그를 만류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을 우리가 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울을 제거하고 왕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다윗이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이 <다윗의 온유>였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온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다윗이야말로 진정한 강자였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다윗이 사울보다 약자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강자라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윗이 강자인 여러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 다윗에게는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울은 하나님께서 폐하시기로 작정되어 있었습니다. 

둘째, 그에게는 민심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다윗과 사울 사이에서 전개되는 게임이 얼마나 불공정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다윗을 존경했습니다. 일찍이 백성들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외친 바 있었습니다. 

셋째로,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편이셨습니다. 사무엘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은 후로 하나님의 신이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온유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에게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복이 임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었습니다. 사울을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고도 나라를 얻었습니다. 모든 땅이 그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땅을 얻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온유한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너무 분노하지 말고, 너무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인간적인 방법으로 대항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는다면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상대방과 똑같은 수준에서 싸우지 마십시오. 오히려 축복하고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편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 마음에 평화가 올 것입니다. 근심과 스트레스도 사라질 것입니다. 

미국의 MD 앤더슨 병원은 세계 최고 수준의 병원입니다. 그 곳의 종신교수이며, 암 치료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인 <김의신 교수>의 <암 이야기>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근심과 스트레스는 뇌에서 나오는 '10번 부교감 신경'을 자극한다. 이로 인해 위와 장운동이 떨어지고 식욕이 감소한다. 잠도 못 잔다. 걱정이 많은 사람들은 수면제를 줘야 겨우 잠을 자는데, 수면제는 위장 활동을 떨어뜨려 더 식욕을 잃게 한다.> 

그러면서 암 세포를 잡아먹는 면역세포인 <자연 살해 세포, NK·Natural Killer Cell>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게 많으면 암 치료가 잘 되고 암에도 잘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이 세포의 수치를 조사했더니, 교회 찬양대원들이 일반인보다 천 배나 높게 나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기쁨 속에서 노래하고, 감사 기도하고, 인생을 밝게 사는 사람이 암에 대한 저항력이 높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나 온유하십시오. 함께 싸우는 사람, 상대방과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은 수준에서 대응하는 사람, 그 마음에 분노와 혈기가 끓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이기고자 하는 초조함의 반영입니다. 이런 사람은 목소리도 크고 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약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복수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는 사람, 자신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깨닫고 확신하는 사람,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가소롭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 이런 사람이 되길 기원합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이런 사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땅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온유한 사람만이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면 그것으로 끝날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하셨나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세상은 자신들이 이긴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처럼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을 이기시는 능력이 그 분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로 내모는 사람들을 가소롭게 바라보셨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이기는 것 같지만, 불과 몇일이다. 내일 모레 아침 나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생명의 구주가 될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온유함이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당신을 죽이려는 적들과 맞서 싸우셨다면, 십자가를 던져 버리셨다면, 그래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온유한 주님이 세상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한 사람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선입관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는 약해보이지만 실상은 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온유하길 원합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온유하십시오. 온유하다고 해서 미지근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온유는 열정, 뜨거움, 비전과 불붙는 사명감과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습니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도 얼마든지 온유할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표면은 조용하지만, 깊은 곳에서는 생명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