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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 잘 하는 사람 (잠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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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잘 하는 사람 (잠 16:3)
 
"저 사람 기도 '잘' 하네." 그리고 "저 사람 기도 참 '잘' 하네."
한국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를 잘 아시나요?
기도는 청산유수처럼 잘하지만, 뭔가 가식적인 사람을 두고 그렇게 말하기도 하고, 정말 신실하게 기도를 잘 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요.
오늘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도를 잘한다는 것은 두 가지의 밸런스가 잘 맞아야 합니다. 실상 우리 교인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모양은 기도이지만, 하나님과 무관한 기도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기도를 “습관적인 기도”라고 표현하는데,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이러한 기도를 “중언부언하는 기도”(마 6:7)라고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딤후 3:5)라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 뜻을 바꾸려는 기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기도는, 정욕적이고, 욕심이 있고, 시기와 질투와 분냄이 그대로 존재합니다. 
기도하지만, 육신의 일을 도모합니다. 
기도하지만,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내 옛적 자아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기도하지만, 용서도 일어나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바뀌지 않습니다.

유명한 시인 릴케(R. M. Rilke)는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내 눈을 감겨 주십시오.
그래야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 주십시오. 
그래야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도를 '잘' 한다는 것은 내가 보고 판단하는 모든 육신의 눈이 감길 때 시작됩니다. 진정으로 기도를 잘한다는 것은 내가 듣던 육신의 소리와 주변의 소리로부터 차단될 때만이 들려집니다. 이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정이 내려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정이 내려지면 나의 정욕과 이기심은 물러가게 됩니다. 

기도는 인격적이기에 하나님을 향한 나의 소원과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가운데서 반응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면 잘못된 기도, 혹은 비인격적인 기도는 어떤 것일까요?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의 책 “주님과 동행하십니까?”에 보면 아주 짤막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번은 목사님이 영국에 있는 링컨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건물은 길이가 거의 210m나 되는 큰 건물이었고 예배당 중앙에는 오르간이 있습니다. 예배의식을 진행하는 성가대와 집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멋진 가운을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예배를 드리면서 혼자 속으로 이렇게 생각을 했답니다.
“이 웅장한 예배실과 이런 멋진 의식! 나도 멋진 기도를 해야지.” 
“오, 가장 높은 곳에 좌정해 계신 우리의 아버지시여! 오늘 아침 우리는 주의 존전에 모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닥쳐라. 우리는 종일 대화를 나누는 사이인데 이제 와서 가장 높은 곳에 좌정해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어쩌면 하나님은 이러한 의식적인 기도를 가장 싫어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시고, 쌍방 간에 인격적인 교제를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우리들의 삶이 점차로 교정되어 가기를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라는 책에서 이 부분을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기도는 당신이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아뢰기만 하는 것 이상입니다. 기도는 듣는 것도 포함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기도 중에 말씀하시는 것이 당신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기도는 관계성이지 하나의 종교 활동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당신에게 조정하도록 고안된 것이 아니라 당신을 하나님께로 조정하도록 계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도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에서, 당신의 인생을 통해서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를 알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적이었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기도에 대하여 이런 정의를 내렸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반복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아뢰므로 일어나는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가 반응하는 순종까지를 포함합니다.

기도는 전적인 위탁이다!
오늘 본문의 잠언 16장 3절을 보면,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삶의 일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영역을 맡기고 그분의 경영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므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실제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맡긴다!"라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Commit to the Lord whatever you do, and your plans will succeed."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주께 위임하면 성공하리라는 것이죠.
이 말씀 중에 우리가 무게 중심을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에 초점을 맞추어 보세요. 사실 기도하고 우리가 실망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맡긴다!"라는 말씀에 무게의 중심을 둬 보세요. 하나님께 맡긴 일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계획조차 그분에게 위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우리의 기대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아니라 기대의 결과조차 하나님께 완전히 위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점점 우리의 신앙이 자라는 경험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대보다 더 완전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7절에 우리가 잘 아는, 하지만 잘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는 말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를 '전적인 위탁'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이 말씀이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whatever you do."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분께 맡긴다는 것은 또한 기도의 종류가 무척 다양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지요.

대부분 우리가 생각했던 기도는 "청원하는 기도"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말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세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대적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누군가 미워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사단이 무서운 생각을 가져다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기 때문에 대적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삶이 나태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때, 무서운 생각이 들고, 삶이 우울해질 때, 우리의 마음속에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 대적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예배시간만 되면 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신인 관계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 마귀는 대적하면 도망가지만 대적하지 않으면 물러가지 않고 우리 속에 계속해서 머물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 것이 분명할 때 대적하며 기도해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이제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기도를 하나님께 청원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보다 대적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 기도해야 하는 순간이 훨씬 많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가끔 신앙인 중에도 "나는 원래 이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예수를 믿고, 기도하는데도 바뀌지 않는 것이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믿고 기도하며 살아가는데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삶에서 '방어기도'가 필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여러분이 하는 일에 대하여 누군가 부정적인 생각이나 이미지를 갖지 않도록 방어하는 기도를 미리 하는 것입니다.

저의 예를 든다면, 설교하기 전에 기도하는 것이지요. "하나님,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은혜 받는 사람, 삶이 변화되는 기적이 일어나도록 저를 사용해 주세요."
주일 아침에 1부 예배를 마치고 나면 장로님들이 함께 빈 성전을 향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곳에 앉을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미리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미리 준비되고 역사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기도이다!
우리가 흔히 기도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다! 혹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기도하며 하나님과 대화하기보다는 일방적인 선언이나 간구로 끝나는 것 같습니다. 문제를 가져와서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대적하는 기도를 담대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결해 주실지 답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방적인 시간이 계속됩니다. 매일 새벽마다 동일한 기도를 하고, 또 그 다음 날 찾아옵니다. 
사실 기도하면서 우리가 변하지 않는 것은, 기도하면서 응답을 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변하려 하지 않고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한 다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기도한 다음에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라고 했는데 어떻게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었을까요?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양들에게 목자의 소리만 들렸을까요? 
많은 사람의 소리 가운데 자신을 인도하는 소리, 그리고 그 음성을 듣고 따랐을 때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로 인도하는 소리를 구분하게 되지요.
때때로 많은 소리 때문에 구분하기 어려웠을 때도 있고, 다른 소리를 듣고 낭패를 본 경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전에 살던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얼마나 종교적으로 타락하고 신앙이 땅에 떨어졌는지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지만, 음성을 들어본 경험이 없었던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에게 달려갑니다. "저를 부르셨나요?" 몇 번 이 같은 일이 반복되자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에게 알려줍니다.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삼상 3:9)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응답합니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엘리 제사장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힘든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태도와 구분하는 능력이 아닐까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의도적으로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음성이 들려오면 많이 힘들고 귀찮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기보다는 가는 길에 "걸림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겠다는 태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제 그런 마음의 소원이 생겼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는 욕망이 생깁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은 매일같이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적어보고 다음 날 아침에 적어둔 말씀에 'O' 표나 'X' 표를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은 'O' 표 아니었던 것은 'X' 표를 하는 것이지요. 자꾸 연습을 하다 보면 점점 'O' 표가 많아집니다. 그리고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성경 말씀을 통해, 만나는 사람을 통해, 우리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이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라면. . .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맡긴다!"라는 말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위임하는 순간, 기도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있나요?"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지요. 그런데 이 전적인 위임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시간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합니까? 그에게 끊임없이 솟아나는 육적인 생각과 소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이 갈등이 보이게 되고, 이것을 이기기 위해 기도하게 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이 부분에 대한 민감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로마서 8장 26-2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은 우리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순간에 이미 탄식하시고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은 토니 캠폴로가 쓴 [끝까지 사랑하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교편을 잡고 있던 대학의 한 청년은 같은 학교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려고 노력했다. 정작 그 여학생은 그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내 사무실에 찾아와 여학생의 마음을 돌이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담을 청했다. 그는 기도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물으면서도 과연 그래도 되는지 궁금해했다. 그는 말했다. 

"어쨌거나 기도로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는 내가 자신의 노력에 동참해주기를 바랐다. 성경에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는 말씀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 청년이 나를 의인으로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우쭐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말도 안 되는 그의 계획을 따를 수는 없었다. 대신에 나는 그가 하나님이 뜻에 순복하고 있는지,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사적인 바람들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 압력을 행사하려는 것은 아닌지 청년에게 물었다.
이 청년은 딱 맞는 공식에 따라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고, 자기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조정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히려 그 반대임을 그에게 납득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근래 들어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려는 매우 흥미로운 시도들을 종종 본다. 이른바 '부자로 만들어주는 십일조'이다. 어떤 사람은 벌고 싶은 금액의 10분의 1을 '하나님의 일'(구체적으로 말해 설교자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에 드리라고 설교한다. 자신이 갖고 싶은 만큼의 금액 곧 원하는 수입에 해당하는 십일조를 드리면 장차 하나님께서 헌금한 액수의 열 배를 주신다는 논지이다. 이 말에 일부 사람들은 희망에 차서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을 몽땅 찾아다가 하나님께서 열 배로 갚아주실 것이라고 약속한 목사에게 갖다 바친다. 잘못된 헌금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을 돈 갚아야 할 빚쟁이로 내몬다. 

그것이 얼마나 그릇된 일인지는 논할 가치조차 없다. 정말로 화가 나는 것은 이런 가르침이 많은 개발도상 국가에서 보편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극빈자들이 갈취당하는 동안 그들로부터 돈을 거둬들인 목사들은 호화롭게 살고 있다.

우리는 어쩌면, 기도의 모델을 얍복 강가에서 환도 뼈가 부러질 때까지 기도했던 야곱에게서 찾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도는 언제나, '나의 요구'를 말씀드리는 것이요, 기도는 언제나,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얻어내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능력 있는 기도는 언제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어내는 기도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기도하면서 얻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말을 하기도 하고,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권면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아직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인격적인 관계를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되는 간증을 듣습니다. 
사실 그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과정입니다. 때로는 사역에 대한 보상이 늘 따릅니다. 

특별히 트레스 디아스를 하다 보면 팀멤버들에게서 이런 간증을 많이 듣습니다. 
은혜를 받고 충만하고 기쁜 마음으로 봉사를 갑니다. 그러면 갔다 와서 정말 기적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문제가 풀리는 것들 말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 때, 인격이 형성되지 않은, 늘 보채고 울기만 하는 아이들에게 무조건 들어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엄마이고 아빠이기 때문에.

그러나 어느 정도 신앙이 성숙해지면, 하나님은 서서히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3년 동안의 공생애를 지내면서 기적을 보여주시고, 먹여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하셨지만, 부활하신 이후에는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고, 거꾸로 십자가를 지고 순교할 것을 예언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을 체험하고 난 후의 초대교회는 수없이 많은 기사와 이적이 나타나지만, 성숙된 그리스도인들이 요구되는 시점에서는 야고보서 기자를 통하여 기도의 다른 면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2-3)고 말입니다.

한국 교회는 늘 야곱의 투쟁하는 모습의 기도를 가르쳐 왔습니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축복을 받고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습니다. 마치 어미 품에 안겨 젖을 먹는 아이가 보채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더 이상 보채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여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우리에게 의문이 생기지요?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기도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답이 있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라고 말입니다. 
성령님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는 기도를 하십니다. 
조금 전에 읽은 야고보서 말씀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다. 그러면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기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이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구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응답은 복이 아니라 해가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기도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가끔 국외에서 돌아오면, 아이들은 제 가방에 관심이 있합니다. 그 속에서 무엇이 나올까 하고 말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부흥회에서 돌아올 때면, 가방에 관심이 있었던 것을 생각합니다. “무엇이 나올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선물보다는 저에게 더 관심이 있습니다. 
가끔 저는 아이들이 저보다 선물에 관심을 자주 보일 때,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저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아내를 볼 때, 감동이 들기도 하지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가끔 이렇게 묻지요. “너희는 아빠가 반가운 거야, 아니면 선물이 반가운 거야?”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해할 수 있지만, 아빠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는 않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바로 이런 기도의 태도를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에 비유합니다. 크리스마스 때 아이들이 기다리는 산타클로스는 그분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라 그분이 가지고 오는 선물에 대한 관심입니다. 선물을 받은 아이들은 이내 산타클로스에 대하여 잊어버리고 맙니다. 여기에는 인격적인 만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관계와 조건만이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난번에 한 집사님으로부터 귀한 고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중국에서 목사님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답니다. "내가 이번에 돌아가서 사업만 잘되면 중국에 교회 하나를 짓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집사님이 깨닫게 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내가 사업이 잘되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필요한 일이기에 할 뜻이 있느냐를 묻고 계신다는 것이지요.

“그분을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그분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알았으면 뜻을 따르기 위해 나의 욕심이 바뀌고, 내 생각이 바뀔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바로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요구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우리를 향한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산타클로스를 대하듯 하나님을 대한다면 하나님을 만나 인격적으로 사귀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기도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더 깊이 사귀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바라는 것을 얻으려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계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하여 기도한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들으려고 무릎을 꿇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마음을 열어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모양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좀 더 좋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기도를 '잘'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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