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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옥중 찬미 (행 16: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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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 찬미 (행 16:19-40) 
 
 
오늘은 빌립보의 간수가 변화된 사건을 중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사도가 점 귀신을 쫓아내자, “종의 주인들”은 즉시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알아차렸습니다(19a). 이들의 태도에는 돈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는 그들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만일 생명에 더 큰 가치를 부여했다면 한 여인이 귀신들림에서 해방된 사실을 주목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귀신이 나감과 함께 그들의 소득도 나갔음만 계산했습니다. 때로 복음은 재정적인 손실을 가져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광인을 고치실 때, 기꺼이 돼지 2,000마리를 희생시키셨지요(막 5:9-13, 17). 이해득실에 계산이 빠른 사람들은 한 사람의 회복보다 망해버린 양돈 사업을 알아차리는데 빠릅니다.

하나님을 경외했던 루디아는 마음을 열고 자신의 집으로 영접했었습니다. 반면에 이들은 “바울과 실라를 잡아” 관원들에게 끌어갑니다(19b). 모든 일을 돈으로 환산하는데 익숙한 그들은 전도자에 대해 마음을 닫았습니다. 예수 믿다가는 집안 망하겠다고 생각했겠지요. 이처럼 물질 중심적인 가치관은 복음과 복음 전도자에 대해 배척하는 태도를 가지게 합니다. 현실적인 이득이 있어야만 복음이라 생각하게 하고, 손해를 가져오면 거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보다 돈을 중히 여기는 사회에 복음이 전파될 때는 항상 가치관의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루디아처럼 가치관이 변하는 사람도 있고, 종의 주인들처럼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여종의 주인들은 상급 관원들에게 고소하면서 그들이 화내는 진짜 이유는 슬쩍 감추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유대인”이며 자기들은 “로마 사람”임을 부각해서 인종적인 반감을 부추겼고,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하는 정치적 위험인물이며,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하는 이단자인 것처럼 비방했습니다(20-21). 그러자 선동된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22)했고, 상관들은 자초지종을 자세히 조사하지 않고 대중들의 욕구에 따라 신속히 판결했습니다. 본심을 감추고 교묘히 보복하는 주인들, 인종이나 지역적 반감 때문에 쉽게 선동되는 군중들, 공의보다 여론에 떠밀려 판결하는 상관들 …. 진리보다 각자 자기 실리를 따라 움직이는 불의한 사회의 축소판입니다.

전도자들은 가치관이 전도된 불의한 사회에서 애매한 고난을 당합니다. 폭동이나 사회를 혼란케 하는 신흥종교의 전파는 위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법을 존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이득을 위해 교묘히 법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불법 폭행을 당한 것이지요. 바울과 실라는 옷이 찢어지고 벗겨지고 “매”를 맞았습니다. 많이 맞은 후에 “깊은 옥”에 갇혔고, 발에는 “착고”가 채워졌습니다(22-24). 온 몸이 쓰리고 아팠을 것이며 억울하여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선을 행한 후 받게 된 당황스런 결과는 신앙적 회의와 좌절감을 가져다 줄 수도 있었지요. 그런데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고, 다른 죄수들은 이것을 들었습니다(25).

사람이란 몸이 아프거나 환경이 나빠지면 우울해지고 의욕을 잃기 쉽습니다. 억울하면 밥맛을 잃고 화가 나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합니다. 선한 의도가 당황스럽도록 왜곡되어 내 손과 발을 차꼬처럼 묶을 때, 사람이 싫고 만사가 귀찮아집니다. 빛줄기 하나 없는 깊은 토굴에 갇힌 심정이 되지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런 일들을 겪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 앞에서 한바탕 펑펑 울고서 모든 것을 그분의 뜻에 맡길 수 있기만 해도 대단한 일이지요.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가치관이 철저히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견고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에베소 사역은 처음부터 유난히 ‘기도’와 연관해서 언급됩니다. “기도처”에서 루디아를 만났고(13), 귀신 들인 여종 역시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만났습니다(16). 냉습한 옥에서도 “기도”는 멈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단은 좋은 협력자처럼 다가왔다가 실패하자 무서운 핍박자로 돌변했지만, 사단이 아무리 애써도 막을 수 없는 것이 기도할 수 있는 자유였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교회의 특권이며 희망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교회는 단지 하나님께서 위기에서 구해주시도록 기도하며 구해 주셨을 때 감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황이 변하기 전에 기쁨으로 “찬미”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함을 보여주지요. 이런 가치관과 태도가 기도하는 일과 밀접히 연관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주목할 일입니다.

전도자들이 찬미하고 있는데,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26). 이 일이 기적인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인생의 한밤중에 찬미하는 일 또한 기적이라는 사실은 종종 놓치기 쉬운 사실입니다.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이 은혜인 것처럼 감옥에서 기도하며 찬미할 수 있게 하시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루터(Luther)는 파문당한 후 발트부르크 성에 갇혀 있는 동안 독일어 성경을 번역했고, 존 번연(John Bunyan)은 감옥에서 천로역정을 썼습니다. 자유가 박탈되고 환경이 열악해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로 자기 연민에 빠져 있지 않게 하셨습니다. 깊은 밤일수록 별빛이 선명하듯, 최악의 상황에서의 전도자들의 찬미는 죄수들과 간수들의 마음에 선명한 인상을 남겼을 것입니다.

큰 지진 후에,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27) 했습니다. 로마법에는 죄수가 도망갈 경우, 그 죄수가 받을 형벌을 간수가 대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고 “크게 소리 질러” 자결을 막았습니다(28). 기도 중에 막힌 문이 열렸으니 ‘도망하라는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하고 판단하기 쉬웠으나, 전도자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달아났다면 일이 커질 뻔했습니다. 간수를 죽이고 탈옥한 형국이 되었을 것이고 복음 역사에 큰 지장이 있었겠지요. 

이전에 사도들이 옥에 갇혔다가 나왔을 때는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서 나왔습니다(5:19). 베드로의 경우도 주의 사자가 깨우며 “따라 오라”(12:7-8)고 했었지요. 그러나 바울과 실라에게는 그런 지시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말씀이 없는 상황에서 지진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급히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중하게 생각하여 탈옥할 경우 간수가 난처해질 것을 고려했겠지요. 기적 일으킨 장본인들이 가만히 있으니 다른 죄수들도 달아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간수는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그들을 옥에서 데리고 나왔습니다(29-30a). 진행되는 상황들은 지진의 기적이 바울과 실라보다 간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더 크게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한밤중의 찬미소리, 큰 지진, 도망하지 않은 죄수들 등,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상황들은 간수로 하여금 전도자들 앞에 “무서워 떨며” 무릎 꿇게 했습니다. 죄수들을 “선생”이라 부르며 그들에게 자신의 구원이 달렸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었지요. 무엇보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30b)라고 묻게 했습니다. 죄수들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상관들의 문책으로부터 구원 얻을 묘안을 물은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전도자들이 전파해왔던 구원에 대한 관심이었겠지요. 복음에 무관심했던 간수의 마음에 신앙적 두려움의 지진이 발생한 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31)고 했습니다.

간수는 전도자들을 “선생” 곧 ‘주’(kuvrio", 퀴리오스)라는 존칭으로 부르자, 바울은 즉시 그의 시선을 구원의 주이시며 생명의 주가 되시는 “주 예수”께로 돌립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을 간수와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했습니다(32).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께서 구원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등을 말했을 것입니다. 말씀을 들은 후 간수는 전도자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33). 자기 집을 열어 전도자들을 위해 음식을 차려주고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했지요(34). “자결”밖에 길이 없다고 절망하던 한 인간이 “크게 기뻐”하는 또 하나의 기적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복음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있는 자로 크게 기뻐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날이 새자 상관들은 전도자들을 놓아주도록 명했고, 간수가 이 말을 전하며 평안히 가라고 했습니다(35-36). 하지만 바울은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37)고 항의합니다. 상관들은 “저희가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38). 로마 시민은 어떤 경우에도 재판 없이 매를 맞거나 구속되지 않는 특권이 있었는데, 이를 어기는 자는 중한 벌을 내리도록 로마법에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관들은 예우를 갖추고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39a)야만 했습니다. 옥에서 나온 후에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한 것을 보면(40), 바울이 상관들에게 항의한 까닭은 이제 막 형성된 빌립보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였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전도자들이 범법자가 아님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 어린 형제들에게 위로가 되고, 범법자들과 한 통속이라는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상관들도 간수처럼 전도자들로 인해 두려워했지만,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을까?’ 묻지 않았고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자리 보존을 위해 껄끄러운 인물들이 “성에서 떠나기를 청”함으로써 복음을 들을 기회를 잃어버렸지요(39b).

구원은 오직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은 언제나 복음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을 빌립보 사역에서 분명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모든 힘겨운 상황을 은혜 체험의 기회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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