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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러므로 온유하십시오 (엡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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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온유하십시오 (엡 4:1-3)

: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중국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노자가 있습니다. 노자에게는 상종이라는 스승이 계셨습니다. 스승이 병을 앓게 되자, 노자는 스승의 문병을 갔습니다. 문병 온 제자에게 스승이 자신의 입을 벌려 보여주며 물었습니다.

“나의 혀는 아직 그대로 있느냐(吾舌存乎)?”
제자는 “있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나의 치아는 있느냐(吾齒存乎)?”
제자는 “없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시 스승은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이게 무슨 까닭인지 너는 알고 있느냐?”

이 때, 제자인 노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혀가 아직 붙어 있는 것은 그것이 부드럽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치아가 빠지고 없는 것은 그것이 너무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스승은 제자의 대답을 듣고 웃으며 말을 했습니다
“그렇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바로 이러한 것이니라.”
노자의 유약겸하(柔弱謙下), 부드럽고 겸손함의 철학이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고, 겸손함이 오만함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부드러움과 겸손함이 천하 경영의 요체라는 것입니다. 노자의 이런 ‘유약겸하’ 사상은 중국을 넘어 세계의 철학, 세계의 사상으로 오늘까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겸손과 온유는 윤리적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대부분의 고등 종교가 빠짐없이 주장하는 덕목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도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종교가 가르치는 바는 똑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종교를 믿어도 바르게 살기만하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분명 결과는 같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까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원인이 다르면 결과가 같아도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온유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에베소 교회에 보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바울은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러므로’ 행하라고 권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4: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먼저 부르심이 있었다는 사실이 가방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서 출발하여 ‘그러므로’ 우리의 삶으로 응답하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관점입니다. 그렇게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먼저 그 은혜와 사랑으로 부르심을 확신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2절 말씀입니다.
: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I. 겸손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첫 번째 모습은 ‘모든 겸손과 온유’입니다. 모든 것을 겸손과 온유로 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겸손에 대하여 생각하였습니다. 겸손은 예수님 당시나 오늘이나 그렇게 인기 있는 덕목이 아닙니다. 겸손은 힘없고 나약한 사람의 모습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겸손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은 예수님을 닮은 것이자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여야 합니다. 

우리들이 겸손과 함께 생각하여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II. 온유  

2절 첫 번째 구절입니다.
: 2a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여기에서 ‘온유[prau?th"/프라우테스]’는 온순한 기질, 유순함에서 왔습니다. 이것은 온화, 친절 또는 겸손을 의미합니다. 때로 ‘이해심 깊음’이라는 말로서 ‘정중함’(gentleness)이라고도 번역됩니다.

그런데 온유는 겸손과 마찬가지로 유약함이나 비겁함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강한 것을 알아주는 세상에서 온유한 사람은 경멸당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무시당할 수도 있습니다.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온유함은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엄마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향하여 “그렇게 물러 터져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느냐?” 닦달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겸손할 뿐만 아니라 온유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러므로’ 온유하라고 하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온유하여야 할 이유이자, 온유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 ‘그러므로’ 온유하십시다!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온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3장 12절 말씀입니다.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여기에서도 우리가 왜 온유하여야 하는 지를 같은 맥락에서 말씀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온유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뽑아주신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성도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온유함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거룩한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답게 온유해야 합니다.

1. 온유는 구원의 징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자신을 불러주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온유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온유한 사람이라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온유하면 그 결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온유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고민이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스스로 확신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겸손이나 온유를 전혀 볼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오히려 오만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구원받았다는 징표가 하나도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현실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거꾸로 가면 안 됩니다. 사과나무이기에 사과라는 열매를 맺고 배나무이기에 배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어떤 나무에 사과가 달려 있다고 무조건 사과나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과나무이기에 사과가 열립니다. 물론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전문가들이야 나무만 보아도 어떤 나무인지 종류뿐만 아니라 품종까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전문가는 열매를 보아야 어떤 나무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열매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하여는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포기하지 말고 열매 맺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열매 맺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그 열매로 겸손과 온유를 맺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신임을 확신하기에 온유하시기를 또한 온유하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온유의 열매를 맺어갈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11장 29절 말씀입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친히 낮아지시는 모범을 통해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온유함이 무엇인지를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고 기도하셨습니다. 


2. 온유는 예수님께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심보다 더 큰 낮아짐, 겸손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천사들을 동원하여 일시에 자신을 목 박는 사람들을 물리치실 수 있음에도 세상의 죄 값을 지불하시기 위하여 묵묵히 참으심보다 더 큰 온유는 없습니다.

신사적이며 존경받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토마스 무어경이 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무고하게 잡혀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있는 재판관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재판관이시여, 내가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친구여, 나는 당신과 나의 관계가 바울과 스데반의 관계가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스데반을 죽였지만,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이 두 사람은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대가 나에게 죽음을 선고하지만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구원을 함께 누리는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재판관은 토마스 무어 경의 이 감격스런 선언을 듣고서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사형을 언도했는데 그대가 나를 선대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토마스 무어경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대답하였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먼저 긍휼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여야 하는 그 모든 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셨기에 불쌍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참아주셨기에 참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기에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은혜를 더욱이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자동적으로 겸손해지고 온유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법을 배워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배워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그 분의 온유함도 닮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온유를 배우기 위하여 알아 할 것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 말씀입니다.

(갈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이 잘못하였을 때 어떻게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온유한 마음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온유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온유는 잘못한 성도들을 처리하는 일에 있어서 가져야할 태도로 언급되었습니다(고전 4:21, 갈 6:1, 딤후 2:25). 뿐만 아니라 부당하게 대우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향하여도 친절하고 온유하게 대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3. 온유는 타인을 향한 태도입니다.

성경에서 겸손과 온유는 거의 구분 없이 사용됩니다. 다만 일단의 정리를 위하여 자신을 향한 태도와 타인을 향한 태도로 구분하여 보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대하는 태도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하지만 온유는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온유가 힘이 없어서 참는 것이거나 비굴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온유는 다른 사람에게 기다려 주고 참아 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은 “엎드린 자는 넘어질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낮추고 무시할까봐 걱정하지 않습니다. 결코 자신이 받을 상처나 손해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 대하여 원한을 품을 일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향하여 온유하기를 원하고 원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온유일까요? 이제, 온유의 반대가 무엇이고, 온유를 가장 쉽게 표현하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하겠습니다. 먼저 온유는 반대는 무엇일까요?

야고보서 1장 20절 말씀입니다.

(약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성경은 여기에서 온유의 대비로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말합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화를 내는 것입니다. 격분하여 말을 함부로 쏟아놓는 분노는 온유와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시기와 다툼도 온유와는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4. 온유는 조폭의 반대입니다.

여기에서 조폭은 조직폭력배를 말하는 조폭이 아닙니다. 순수한 우리말로 ‘조폭하다’는 ‘성질이나 짓이 거칠고 사납다.’라는 뜻입니다. 온유는 거칠고 사나운 것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주 거칠고 사나운 생각을 쏟아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은 “나는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다”고 한 사람입니다. 헌데 그는 자기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결과로 큰 불행을 겪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가 있었습니다. 클레로스라는 그 친구는 알렉산더 대왕 밑에서 장군으로 봉사했습니다. 한번은 이 친구가 만취되어 군졸 앞에서 알렉산더 대왕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일시적인 분노로 알렉산더 대왕은 옆에 있는 병사의 창을 빼앗아 그를 향해 던졌습니다. 짐작이건데 그를 죽일 생각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알렉산더는 아끼는 친구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알렉산더는 곧장 후회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원망하며 자살을 기도했으나 측근자들의 만류로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만큼 그는 자신에게 실망하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세계를 정복했지만 자기를 다스리는 일에는 실패를 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폭력성은 힘이 있는 사람만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 있는 폭력성을 깨달으며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이 난폭합니다. 욱하는 성격이 겉으로 튀어나오려고 용트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자주자주 느낍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심이 은혜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거칠고 사나움이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니기를 소원합니다.  

온유의 반대가 거칠고 사나움이라면 비슷한 말은 무엇일까요?
민수기 12장 3절 말씀입니다.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는 본래 과격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로 의협심에 불타서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일로 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할 때도 물을 달라는 백성들 앞에서 한 성질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쳤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었습니다(민 20:8-12). 이 일로 결국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세를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사람들 앞에서 엎드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민 14:5). 그는 자신이 주장할 수 있는 순간에 오히려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향한 기도였습니다. 이것은 사람들 앞에서 철저하게 낮춤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5. 온유는 부드러움입니다.

‘버들가지가 바람에 꺾일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부드러운 버들가지는 못 꺾는다는 말입니다. 연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온유는 부드러운 것을 말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대하는 인간관계가 부드러운 것을 온유라도 합니다.

한 때, ‘나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그런데 이말은 모르면 무뚝뚝하다는 말입니다. 알기 전까지는 까칠하고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일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사실 알고 보면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여러분이 아시려나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것은 다른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전적으로 제 책임입니다. 이것은 저의 많은 결점 중에 가장 큰 결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도 젊었을 때는 일종의 신비주의처럼 까칠함이 강점이라면 강점이었을 것입니다. 불혹(不惑)이라는 나이 마흔 전까지는 한 점 의혹이 없이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장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천명(知天命)이라는 오십의 나이에 접어들었으니 이제는 하늘의 뜻을 알아 부드러워 질 때도 되었으련만 여전히 까칠한 모양입니다. 부드러움, 이것은 제가 가장 예수님을 닮아야 할 부분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날카롭고 딱딱하고 매정한 사람보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에게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기 마련입니다. 온유한 마음이 있는 곳에 훈훈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건전한 사회생활이 있습니다. 

부드러움은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의 성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는 정신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래서 온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능력을 얻을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온유하라고 하십니다. 이미 온유하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니 자신 안에 계신 분을 드러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었으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까칠하고 때때로 폭력적이기까지 합니다. 온유하지 못한 것을 성격 탓으로 돌립니다. 그래서 날마다 다시 시작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난 자신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겸손과 온유로 살아갈 이유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온유함을 배워서 온유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십시오. ‘그러므로’ 온유하시기를 온유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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