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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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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 21:1-11)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케이블이 발달하기 전이었던 1980-1990년대에는, 해마다 명절 때에 특히 크리스마스에는 이른바 고전 대작들이 꼭 방영되곤 했었습니다. ‘십계’ ‘쿼바디스’ ‘왕중 왕’ ‘벤허’ 등이 그러한 영화들입니다. 모두 기독교와 관련된 영화들인데, 그 중에서도 ‘벤허’는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를 감독한 윌리엄 와일러 자신이 “신이여 진정 이 영화를 제가 만들었나이까?” 라고 하면서 스스로 경탄했을 정도로 했을 정도로, 감동 깊은 대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벤허 중에서 이 시간 잠시 로마의 개선식 광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인공 유다 벤허가 해전에서 아리우스 사령관을 구해주고, 그 사령관을 로마 정부에서 환영해주는 개선식 광경인데, 이 영상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고대 로마의 개선식은 화려하고 장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로마의 개선장군의 개선식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승리의 입성’이라고 불리어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하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요성 때문에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모두 기록된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고난 주간 첫날에 되어진 일인데, 이 날을 기독교회에서는 ‘종려주일’로 지키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고, 자라난 곳은 나사렛이란 동리였습니다. 그리고 사역의 중심지는 주로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여러 번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아기 때, 소년 때, 시험 때, 공생애 제 1년의 유월절 때와 제 2년 유월절 때에도 올라가신 것으로 보이는데, 본문의 내용은 제 3년 즉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러 가신 기사이며, 그리고 그 때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 영원한 희생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1절에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왕 되시는 메시아로서 왕도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승리의 입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 주간 대적들에게 붙잡혀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승리의 입성’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이미 세 차례나 예고하신 대로 십자가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지만, 사흘만인 주일 새벽에 마귀와 사망 권세를 물리치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시켜 나귀를 데려오도록 하신 의도는, 구약 성경 슥 9:9절 말씀을 일깨워 주시고, 예루살렘 입성에 동행할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믿게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초인간적인 전지성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자신의 그 전지성으로 어느 마을 어느 집에 가면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시 139:1-4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은, 내 모든 형편도 잘 아시고 늘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나귀를 발견하거든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전에 아무런 연락 없이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마치 자신의 소유처럼 가져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일은 상식적으로나 법적으로 볼 때, 사리에 맞지 않은 행동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로서 이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여 참 평화를 주실 평화의 왕일뿐만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분으로서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므로, 이러한 명령을 아주 자연스럽게 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명령을 통해서 메시아로서의 입성을 준비하는 동시에, 자신이 만물의 주인이심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지시에 순종하여 나귀를 끌고 오려고 할 때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주 의미 깊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여기 ‘주’로 번역된 ‘큐리오스’라는 단어는 ‘주인’ ‘지배자’란 뜻인데, 본문에서는 ‘주인’ ‘사용주’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본문 ‘큐리오스’ 앞에는 ‘호’라는 정관사가 나오는데, ‘호 큐리오스’를 직역하면 ‘그 주인’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나귀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밝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나귀의 주인은 외형적으로 어떤 마을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는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 단지 이를 관리하는 청지기였으며, 진정한 주인은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주’라고 하신 것은, 주님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주’로 믿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주님의 주되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 원리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나귀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응하여 나귀를 내어 준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뜻에 순종하는 숨은 제자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나귀 주인처럼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우리의 물질도, 우리의 시간도, 우리의 달란트도, 우리의 건강도, 우리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어 놓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모든 것들의 진정한 주인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불량할 때가 많습니까? 마치 모든 것이 다 자기 것인 양 ‘주께서 쓰시겠다’고 해도 못들은 척하고, 못 내놓겠다는 그리스도인들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왜 하필이면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까? 4절에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예언을 하셨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인 것을 강조하여, 순결한 예수님을 태우실 나귀의 순결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딤후 2:20-21절에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나도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을까?” 예. 얼마든지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깨끗한 그릇이 되면, 누구든지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왕의 왕 되신 주님께 쓰임 받는 인생보다, 더 영광스럽고 가치 있는 인생도 없음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어떤 모양으로든지 주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내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당시 예루살렘에 공식 입성 행사를 갖는 것은, 왕이나 군대의 지휘관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귀환할 때입니다. 이 때 왕이나 사령관은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여러 번 이방의 정복군들이 위풍당당하게 군마를 타고 입성하는 것을 맞은 쓰라린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주로 전쟁에 사용되던 말 대신에, 주로 농사와 짐 수송에 사용됨으로써 평화를 상징했던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그 메시아로서 승리의 왕이신 동시에, 평강과 겸손의 왕이신 것을 나타내 줍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말 대신에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당시 무리와 제자들에 의해 오해되고 있는 메시아 사역의 본질을 가르치기 위함이기도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사람들이 고대하였던 압제받고 고통 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전쟁을 통하여 해방시킨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바쳐 하나님과 사람들을 화목 시키기 위해 오신 평화의 왕이심을 알리려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이 되신 것 같이, 성도들도 피스 메이커 곧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과 같이 평화의 소식을 온 세계에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조금 전 우리는 영화 벤허에 나오는 로마의 개선식 광경을 보았습니다. 고대 로마의 개선식은 영화의 장면 그대로 화려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개선식을 거행하는 데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개선식을 거행할 장군은 적어도 6천 명 이상의 적에게 사상을 입히거나, 아군을 무사히 고향으로 데려와야 했습니다. 이는 전쟁에서의 승리와 병사들의 무사귀환이라는 병사들의 무사귀환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개선식은 전 로마에 걸친 행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앞에 원로원, 그 다음에 전쟁포로들, 다음에 출전한 병사들, 붉은 칠을 한 개선 장군, 그리고 그 바로 뒤에 한 노예가 따랐습니다. 노예는 장군의 뒤를 따르면서 그의 귀에 노래를 부르는 것이 그의 임무였는데, 그가 부르는 노래는 바로 ‘메멘토 모리’입니다. 메멘토 모리란 “너 또한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성공과 자만을 경계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세계를 제패한 로마인의 철학과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 시 가장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귀를 타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겸손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장엄하고 화려하기 그지없었던 개선장군의 개선식과 비교할 때, 초라하기만 했던 예수님의 입성 모습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자기를 낮추셨는지 보여주는 한 폭의 그림이라고 할 만합니다. 빌 2:7-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는 것은 엄청난 자기 비하이며, 우리는 이를 일컬어서 ‘비하의 신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겸손도 이에 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격적 특징 중에 하나인 겸손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 겸손의 바탕에는 우리를 향한 사랑과 긍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이,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는 자기가 가르쳤던 제자들을 모아놓고 송별회를 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스승의 곁을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워서 성 프란시스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배웠는데, 이 세상에 나가 꼭 필요한 말씀을 해주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대로 살아가겠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질문을 받았던 성 프란시스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겸손하라” 또 다른 제자가 물었습니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이때도 그의 대답은 “겸손하라”였습니다. 다시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지만 그의 입에서는 “겸손하라”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학교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나신 예수 선생님께 배워야 할 필수과목은 바로 온유와 겸손 이라고 수없이 말씀드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왕으로서 환호한다는 경의의 표시였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예후가 왕위에 등극할 때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뭇가지를 베어서 길에 편 것도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 나뭇가지들을 종려나무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이란 명칭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은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그리고 손에 손에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들이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로 불렀습니다. 이는 다 같이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로, 군중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호산나’란 말은 “부디 구해 주십시오.” “지금 도와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무리들은 마치 고난에 처한 백성들이 자기들의 왕이나 혹은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의심할 바 없이 예수님을 자기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환영하였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무리가 진실한 제자들처럼 보였지만, 막상 주님께서 잡히시게 될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없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기독교가 자신의 종교라고 믿고 또 말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오분지 일, 전 세계적으로는 인류의 삼분지 일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될까요? 이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문제입니다만, 얼마 못 된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입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현장에는 사람들이 넘치게 많았습니다만, 제자가 되라고 부르시는 곳에서는 소수만이 남아서 좇을 뿐이었습니다. 

오늘도 은혜를 받고 능력을 받는 자리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듭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낼 수 있는 자리, 즉 일꾼이 되고 제자가 될 것을 다짐하는 자리에 찾아오는 이들은 적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 함께 영광받기를 원하면서도,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기는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옳지 못한 태도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고자 하면, 고난에도 반드시 동참해야 합니다. 이것은 공식이요 원리입니다. 공식과 원리를 무시하고서는 문제를 풀 수가 없는 것처럼, 제자가 되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외면하는 그리스도인은, 천국에서 기업을 이을 자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의 약속에 참예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 바로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하나님께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원한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의 뒤를 좇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많은 무리들은 겉옷을 길에 펴고, 손에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열광을 하며 환호를 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승리의 입성’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미움과 증오에 대한 사랑의 승리요,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요, 악에 대한 선의 승리요, 교만에 대한 겸손의 승리요, 전쟁에 대한 평화의 승리요, 더 나아가 인류 최대의 원수인 마귀와 죄와 사망에 대한 부활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시리라는 신약의 예언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이미 다 이루어졌고, 오직 한 가지 주님의 재림 예언만이 남아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이 1518회나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줄로 믿습니다. 

초림하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러나 재림하실 예수님은 천지를 진동하는 우렁찬 나팔소리와 함께 천군천사들을 대동하고 그야말로 위풍당당하게 오실 것이라고 성경에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영광의 구원주로 오시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엄위하신 심판주로 오시게 됩니다. 그 때에 주님을 믿지 않았던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리라.”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며 살아온 그리스도인들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면서 최절정의 기쁨과 감격으로 주님을 환영하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스런 재림의 날에 우리 중 한 분도 빠짐없이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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