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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대답 (합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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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대답 (합 2:1-4)

예언서 하박국은 세상의 악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 방식을 두고 못마땅해 하는 선지자의 두 가지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 형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질문은, 유다 사회에 만연한 불의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부르짖음입니다.  내가 세상의 악함과 강포를 고발하며 부르짖었는데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언제까지 침묵하시렵니까?    어찌하여 나로 간악함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격하게 하십니까?   내가 하나님의 정의를 간절히 외쳤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박국의 질문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는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내가 너의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할 것이니 너희가 내 말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리라.  내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벌하기 위해 갈대아 사람들을 일으켰다.  그들은 너희보다 배나 더 악하고 잔인하며 표범처럼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먹이감을 움키려고 날으는 독수리처럼 너희를 향해 달려올 것이다.  자기 힘을 신으로 삼는 교만하고 사악한 그들이 바람처럼 급하게 휩쓸고 지나가며 더 큰 죄를 지을 것이다. 

하나님의 답변은 선지자가 예상치 못했던 두려운 소식이었습니다.   하박국은 정의를 구하는 외침에 속이 시원한 대답을 주실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죄악보다 더 악하고 잔인한 갈대아 사람들을 불러다 징계하시겠다 하시니 하박국은 하나님의 대답에 크게 당황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즉시 하나님께 따지듯 다시 질문을 하였습니다.

‘거룩하신 나의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계신 분 아니십니까?   우리가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갈대아(바벨론) 사람들을 세우신 것은 심판을 위한 것이며 꾸짖으시기 위함인 줄 압니다.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이신데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보고도 못 본체 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 잠잠히 계십니까?  의로우신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들을 물고기떼와 곤충처럼 살륙당하도록 버려두십니까?   악한 자들이 낚시와 그물로 물고기의 씨를 말리듯 약한 백성을 잡아가며 자기들의 소득을 풍성하게 하고 자기 배를 불리며 좋아하는데 이렇게 되도록 가만히 계시는 것이 과연 옳습니까?’

이것은 이제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불평이었습니다.   정의를 부르짖는 하박국은 하나님께‘어찌하여’를 연발하며 항의합니다.   그리고 나의 질문에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들어보리라 하며 성벽 높은 망대에 올라가 하나님의 답변을 기다리며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옳고 하나님의 생각이 틀렸다면 하나님이 뜻을 바꾸어 갈대아 사람들을 되돌려 자기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전령이 소식을 가지고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그의 기대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전령이 말을 타고 달려와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평화의 소식이 아니라 급하고 두려운 전쟁의 소식이었습니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전령이 빨리 달리는 말을 타고 전달하는 메시지를 누구나 분명하게 읽을 수 있도록 큰 글자로 판에 적으라는 명령입니다.  ‘지금부터 너에게 알리는 이 메시지,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한 메시지는 정한 때가 있으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하박국아, 내 생각이 옳지 않은 것이 아니라 너의 생각이 옳지 않다.   그러나 이 일의 종말이 신속하게 올 것이다.  내가 정한 때가 되면 그들이 저지른 악행대로 저주를 받아 멸망에 이를 것이다.   너희 생각에 그날이 더디게 온다 여길지라도 기다리라 그때가 되면 지체되지 않고 정확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를 치는 갈대아의 임금은 너희의 생각보다 훨씬 교만하며 불의한 사람이다.   많은 나라들이 그의 잔악함에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하심을 믿고 기다리는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두려운 환난과 고통의 날을 이기고 살리라.   너희가 더 악한 갈대아 사람들에게 무서운 시련을 당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기다리라.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환란 중에서라도 살리라.   이것이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의 요지입니다.   

악인을 처벌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옳지 않다 항의하는 하박국은 하나님의 정의를 자기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을 뿐이었습다.   하박국은 다만 이스라엘의 악한 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의 횡포를 그치게 하는 정도로 정의를 보여주시면 족하지 전체 이스라엘을 갈대아 사람들의 손아귀에 몰아넣어 괴로움 당하는 것을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힘 없는 백성들까지 참혹한 전쟁을 겪으며 갈대아 사람들에게 시련을 당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다운 공평한 처사가 아니라는 불평입니다.   

더 악한 사람이 덜 악한 사람을 억압하고 빼앗는 것을 보고도 못본체 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따지고 불평한다면, 보다 더 의로운 사람에게 꾸중을 듣고 징계를 받을 때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벌을 달게 받을 수 있습니까?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상황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들의 외침과 부르짖음이 있었지만 백성들은 한결같이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몰랐고 죄 가운데 계속 머물렀으며 하나님께 돌아올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는 언제나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엄한 메시지를 가감없이 전하는 선지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어떤 선지자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백성들에게 돈을 받고 예언하며 점을 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선지자가 없어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것이 아니라,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과 가짜 평화에 길들여져 방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 하박국 선지자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항의하는 선지자들도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재앙을 면하는 것이 싫다며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하박국은 의로운 사람이 악한 사람에게 괴로움 당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정의에 불만을 제기한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이런 식으로 불평하는 선지자들이 있는 것을 보아 이스라엘 전체에 퍼져있는 잘못된 선민사상의 폐단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살았습니다.  하박국 선지자 역시 갈대아 사람들을 보내 이스라엘을 징계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할 것입니다’(하1:12)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 혹은 죽지 않는다는 굳센 믿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혼동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무리 속에 들어 있으면 그 누구도 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는다는 태만한 신앙이 이스라엘을 병들게 하였습니다.      

이에 비하여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전달하였습니다.  ‘악인이 그 악을 버리고 의를 행하면 그의 의로 살고, 의인이 그 의를 버리고 악을 행하면 그 악을 인하여 죽을 것이다’  언약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며 그 언약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을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의 삶을 통해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죄의 유혹과 악의 세력을 분별하고 그것들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지 의도적으로 죄를 가까이 하며 자신을 더럽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 교회가 없는 것이 아니고 영적 지도자들이 없음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숫자가 부족하여 세상이 어둡고 정의가 바로 서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라는 외침이 만일 나는 예수 믿어 의롭지만 너희는 지옥에 갈 죄인이라는 영적 교만에서 나온 것이라면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오해와 무지함의 결과일 뿐입니다.    

예배당 안에서만 크리스찬이고 주일 하루만 거룩한 성도로 살면 나머지 한 주간은 예배당 밖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짓을 하며 살아도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무 생각도 없이 그렇게 믿고 스스로 위로하며 삽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시인하는 사람이니 천당가는 구원표는 이미 얻었고 이제 어지간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구원을 잃지 않는다.   혹시 죄를 지으면 그때 가서 회개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반복하여 죄를 짓고 하나님의 정의를 내 편리한대로 해석하며 내 맘대로 삽니다.   

하박국 1장 서두에 나오는 선지자의 탄식을 읽으며 우리 나라의 실상과 비교해 봅니다.   간악함과 패역, 겁탈과 강포, 변론과 분쟁이 우리 사회에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올바로 시행되지 못하고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고 있으니 정의가 굽어져 가고 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며 힘이 있는 자들은 힘이 없는 자들을 자기 마음대로 유린합니다.   성한 몸을 가진 권력자들이 신체 장애와 정신 장애를 가진 가엾은 어린 학생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고 짐승처럼 취급합니다.  선량한 사회복지가와 종교인, 교육자의 탈을 쓴 늑대들이 도망할 힘도 없고 억울함을 말로 표현할 능력이 없는 어린 학생들을 겁탈하고도 죄의식이 없습니다.   그러고도 뻔뻔하게 잘 살고 있으며, 그 죄악을 덮으려고 세상 권력을 동원하여 억울한 일 당한 사람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죄악입니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하나님께 외치고 싶습니다.  어찌하여 우리의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십니까?   저들의 악한 행위를 언제까지 방관하시며 잠잠히 계시렵니까?   우리의 질문에 하나님은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너희가 분노하며 치를 떠는 이유가 그들의 죄악이 미웁고 싫은 것이 아니라 뻔뻔한 그들이 죄값을 치르지 않고 오히려 큰 소리하며 사는 것 때문 아니냐?   악인들이 악을 행하면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사는 것이 싫기 때문 아니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요?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에 ‘미칠 것 같은 이 세상’이라는 복음성가가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노래 가사가 그 시대의 암울했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도 한 때 이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대학에 낙방하고 재수하던 시절부터 군대에 자원입대하던 1980년 봄까지 교회 청년들과 함께 모이면 이런 노래를 부르며 내 딴에는 이 세상에 대한 불만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의식을 가진 운동권 학생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냥 어리고 젊은 마음에 사회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었고 개인적으로 진로문제에 대한 고민과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조급함에서 불만을 그렇게 표현했다는 말이 정직한 대답일 겁니다.  나는 신앙인으로서 나쁜 짓도 하지 않고 그런대로 정직하게 살고 있는데 왜 나쁜 놈들이 더 큰 소리하며 잘 되는가에 대한 속상함과 약오름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악한 자들의 잘 산다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나보다 훨씬 나쁘고 못되게 사는 놈들이 나보다 더 이름있는 대학에 다니고, 모든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대기업에 취직하고, 회사에서 급승진하며 높은 자리에 일찍 오르는 것,  어디든지 지원하면 척척 합격하는 능력이 있고, 고소득 연봉에 잘 생긴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 병원에 갈 일이 없이 무병장수하는 것, 걱정 근심거리가 없이 세상만사 모든 일에 형통하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쁜 놈들이 죄값을 받아 망하는 꼴을 보고 싶은데 오히려 더 떵떵거리며 재미있게 사는 모양이 너무 약오르고 분통이 터집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결국 내가 지금 억울하고 분하며 견딜 수 없는 것은 내가 가져야 할 것들을 나보다 악한 사람들이 더 많이 가졌고 더 빨리 가지는 것에 대한 질투가 아닐까요?   우리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정의, 잘 산다는 것이 결국은 이런 것일 수 있습니다.   악인의 번영과 의인의 실패라는 기준을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에 두기 때문에 상대적인 박탈감과 허탈감을 가지게 됩니다.   나는 마음껏 누려도 되지만 나쁜 놈들은 절대 가지면 안된다는 것이 내 방식의 정의로움이며 공평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처리방식은 우리 생각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큰 도둑을 데려다 작은 도둑의 것을 훔쳤으니 작은 도둑의 입장에서 억울하며 약이 오릅니다.   그래서 큰 도둑을 벌하지 않는 이 사회는 정의가 땅에 떨어졌다 불평한다면 작은 도둑의 행위가 어찌 옳을까요?   그 정의라는 것은 우리가 정한 기준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큰 도둑과 작은 도둑의 차이일 뿐 도둑질은 모두 나쁩니다.  기대했던 사람, 존경하며 따랐던 사람,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실망을 안겨주면 다른 사람에게 당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 기대에 어긋났을 때 받는 충격과 실망은 이방인들의 죄악을 보시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보다 더 악한 민족을 불러다 징계의 막대기로 잠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갈대아(바벨론)라는 악한 민족 역시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즉시 징계하지 않고 잠잠하신 이유는 악을 묵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이 정해진 분량에 이르기까지 참고 기다리실 뿐입니다.   정해진 때가 되기까지 참고 기다리실 뿐입니다.  악한 자들은 심판의 날을 위해 마지막까지 남겨두시고, 악한 자들을 통해 성도들을 연단하여 찌끼를 제거하고 깨끗한 금과 은으로 나오게 하십니다.

하박국 3장 마지막 부분에 선지자의 놀라운 고백찬송이 나옵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렸던 요나의 고집스런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이 행하실 정의를 믿음으로 바라며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다루실 때 개인과 가정과 사회가 통과해야 할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벌하시려고 손을 드실 때 그 두려운 책망의 말씀을 듣는 우리가 너무 괴로워 창자가 흔들리며 입술이 떨리고 그 징벌을 기다릴 때 뼈를 썩게하는 고통이 따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산업을 치시므로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해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리라’찬송했던 하박국의 고백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기 바랍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항의하는 질문과 하박국의 질문이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하나님의 대답에 대한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기 고집과 주장을 꺾지 않고 항의합니다.  처음부터 자기 뜻을 정하고 하나님의 명을 거부했습니다.   니느웨에 가서도 역시 자기 뜻대로 말하고 불평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틀렸고 내가 옳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요나 선지자와 다른 점은 하나님의 뜻을 들어보려고 기다렸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들은 다음 수긍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고민하며 질문하는 믿음이 항상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갈등하는 믿음은 확신과 감사의 믿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고민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어쭈어 봅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고 마음이 불편할 때 질문을 해봅시다.  불평이라도 좋으니 하박국 선지자처럼 어찌하여 이렇게 하시는지 여쭈어보는 과정은 꼭 가져봅시다.   질문만 던지고 곧바로 뒤돌아서지 말고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답을 기다립시다.   하나님의 정의는 분명히 살아있습니다.   악은 망하고 하나님의 의는 영원히 살아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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