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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위한 잔치 (눅 5:2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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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5 : 27-35


1980년대 말 공산주의 국가가 붕괴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즐거워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대립의 시대는 끝났다,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우리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붕괴는 자본주의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대로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에 퍼지고 있는 ‘월가를 점령하라’는 시위가 보여주는 것이 그 예인 것입니다. 

계층 간의 빈부의 격차가 너무 큽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너무 심합니다. 너무 기복이 많습니다. 너무 리스크가 큽니다. 유럽의 국가들이 잘못한 대가를 아시아가 물어줘야 되는 입장입니다. 이대로 얼마동안 지탱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유효기간이 짧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유효기간이 칠십년을 넘지 못했습니다. 자본주의는 그보다는 길지만 이 역시 얼마나 지탱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이씨 조선 왕조가 오백년을 지탱하지 못한 것처럼 나치 독일은 천년제국을 꿈꾸었지만 이십년을 넘지 못했습니다. 결국 진리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이천년 전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낡은 종교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낡은 것이 아니고 시간의 증명을 받은 것입니다. the test of time. 옛말에 책 만권을 소장하면 신선이 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인류의 정신적인 스승이 되려면 적어도 이천년의 세월을 견뎌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독교 복음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통 기독교요, 신앙의 정수입니다. 

첫째는 신앙의 시작은 예수님의 부름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사람이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이것을 소명 ․ 예정이라고 부릅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섭리와 선택에서 시작합니다. 

둘째로 부르시는 분은 예수님이지만 신앙생활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사람이 응답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레위를 부르셨지만 레위도 일어나서 예수님을 좇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춤도 짝이 있어야 되는 것처럼 신앙에도 사람의 응답, 사람의 역할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 신앙의 능력은 사람이 무엇을 버림으로써 가능해진다는 사실이에요.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다고 했습니다. 세리로서의 기득권을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버려야했습니다. 그럴 때에 마음이 분명해지고 확신이 생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넷째로 신앙에는 잔치의 요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자는 어렸을 때에 제사 드리는 놀이를 하면서 놀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유교에는 제삿집 분위기가 농후합니다. 석가모니는 인간의 죽음과 고난에 대해서 번민하면서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는 염세적인 분위기가 농후합니다. 반대로 기독교는 죄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잔칫집 분위기가 농후합니다. 예수님이 최초로 행하신 표적이 결혼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까지는 오늘 본문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인데 오늘 본문에서만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레위가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벌였다는 사실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벌이지요. 그것은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뜻합니다. 탕자가 자기 아버지를 위해 잔치를 벌일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벌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레위가 연 잔치는 이것은 죄인들을 위한 잔치도 아니고 탕자를 위한 잔치도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잔치였습니다. 이것이 진짜 예배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예수님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고 예수님의 신세를 지려고 생각합니까. 교계에서는 요즘 수능일 기도회에 대해서 자성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종교에서도 수능일에 기도회를 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남의 종교 하는 식으로 기복신앙으로 좇아가는 것이 아니냐 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또 기독교 집회에서 소원을 종이에 적어서 비행기로 만들어 날리는 것에 대해서도, 절에서도 자기 소원을 종이에 써서 걸어놓지 않느냐. 우리가 다를 바가 무엇이냐 이런 식으로 자성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사람이 하나님께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무엇인가 부탁할 것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마치 자식이 용돈을 받기 위하여 부모님을 찾아오는 식으로.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든지 거기에 응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바다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보다 넓습니다. 하나님은 주고 또 주십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에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하나님도 우리에게 뭔가를 받기 원하십니다. 

우리나라에 어머니날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어머니날이 없었다면 일 년 365일이 전부 자식 놈들의 날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까지 뭉뚱그려서 어버이날을 만들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 별의 별 쓸데없는 날은 많이 만들면서 왜 아버지날은 만들지 않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부모님의 생신이 일 년에 한번 돌아오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자식이 부모님에게 선물을 제대로 드릴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없애려면 어린이날을 없애야 됩니다. 왜냐하면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제정했을 때만 해도 그게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일 년 365일이 다 어린이날이에요. 어린이 세상이에요. 부모가 열심히 돈을 벌어서 자식에게 쏟아 붓지 않습니까. 그런데 또 어린이날을 만듭니까. 어버이날이 있으니까 부모님 고마운지를 알 수가 있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위한 예배 회복이 필요합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벌였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예수님이 이유에요. 예수님이 모이는 이유에요. 예수님을 위하여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 순수성을 회복해야 됩니다. 아쉬운 게 있으면 주님을 찾다가 아쉬운 게 없으면 주님 모른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친구에 대해서 의리를 따지고 국가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고 또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요구한다면 왜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을 갖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이건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레위가 자기 집에서 잔치를 열었다는 사실입니다. 집이라는 것은 교회를 뜻합니다. 초대교회는 집에서 모였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했고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했습니다. 자기 집을 열었다는 말은 자기의 삶을 오픈했다는 뜻이고 자기 비용으로 잔치를 열었다는 뜻이고 자기가 사는 곳에 예수님과 사람들을 초청했다는 뜻입니다. 

요즘 추세는 예수님을 믿더라도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면서 믿으려고 합니다. 익명적인 그리스도인, 될 수 있는 대로 자기 삶을 오픈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레위는 처음부터 자기 집을 예수님에게 오픈했고 예수님뿐만이 아니고 많은 사람에게 집을 오픈했습니다. 중간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어요. 중립지대에서 예수님을 만난 게 아니고 자기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자신을 노출한 것뿐만이 아니고 사람들에게도 노출했습니다. 거기에는 리스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 나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아니나 다를까,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여는 것을 보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비방했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이건 예수님에 대한 비방이고 예수님을 초청한 레위에 대한 비방입니다. 만일 레위가 조용히 예수님을 따랐다면 이런 비방은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초청했더니 비방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아마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레위가 지금까지 편안하게 호강하며 살다가 죽을 때가 된 모양이다. 이제는 천국가려고 예수님을 초청하는구나.’ 생각은 자유에요. 

우리가 만일 남의 생각에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신대로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비방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오해하는 사람의 비방을 다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잔치는 바리새인들을 위한 잔치가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잔치에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만족하신다면 성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신다면 성공한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면 우리는 성공한 것입니다. 예배에 성공하는 것이 모든 성공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요즘 교회가 커야 되느냐 작아야 되느냐 하고 큰 교회 작은 교회에 대한 논란이 많이 있습니다. 이건 전혀 쓸데없는 논란입니다. 이 세상에 구원받아야 될 사람들이 쌔고 쌨는데 교회가 커야 되느냐 작아야 되느냐 논란을 하는 동안에 죄인들은 지옥에 갑니다. 

오순절에 베드로가 설교 한번 했는데 회개한 사람이 삼천 명이었다고 했습니다. 만일 교회가 작아야 된다면 첫날부터 실패한 것입니다. 오순절 첫날 설교 한번 했는데 세례 받은 사람이 삼천 명이었어요.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찾아갔더니 고넬료가 식구 모두와 친지들 큰 무리가 거기에서 기다리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해서 잔치를 열었더니 많은 세리와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누가 전도를 잘합니까. 처음 은혜 받은 사람이 잘합니다. 갓 구원받은 사람이 전도에 열의가 있습니다. 반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본인들은 전도 한명 안하면서 레위가 사람들 전도하는 것을 비방했다고 했습니다. 브라질에서 요즘 제일 뜨는 교회가 어느 교회인지 아십니까. 가톨릭교회입니다. 

어느 젊은 신부님이 목회하는 한 가톨릭교회가 지금 십만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교회를 짓고 있습니다. 브라질에서 잘 알려진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누구편이냐. 하나님은 개신교 편도 아니고 가톨릭 편도 아니고 하나님은 믿는 사람 편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사람들이 쓸모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성령은 당신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까지 논란을 할 것이냐 아니면 정말로 해야 되는 일을 할 것이냐를 선택해야 됩니다. 사람은 사람을 외모로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레위를 세리요 죄인이라고 업신여겼지만 그런 레위를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셨고 레위가 예수님을 처음 초청하는 날 레위 혼자 온 게 아니고 큰 무리가 모여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쇠도 뜨거울 때 두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자격증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를 다녀야 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주님의 종이 되기 위하여 먼저 교회가 나에게 직분을 주기를 기다려야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첫날부터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기다릴 필요 없습니다. 쇠가 뜨거울 때 두드려야 됩니다. 사람의 문이 열렸을 때 그 사람을 인도해야 됩니다. 사람은 절차와 순서를 기다릴지 모르지만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사람의 절차 같은 것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점잖고 얌전합니다. 대인관계에서는 그게 필요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는 그게 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믿음뿐이에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이에요. ‘믿음이 없이는 기쁘게 하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좀 더 큰 믿음의 그릇을 가져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인격보다도 우리의 성품보다도 정말로 하나님 나라에서 결과를 얻게 하는 것은 믿음이에요. 다른 것이 부족하더라도 믿음이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십니다. 

세 번째는 ‘큰 무리가 함께 앉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함께 모이는 곳입니다. 예배를 혼자 드리는 게 아니고 함께 드립니다. 우리는 천국에 혼자 가는 존재가 아니고 함께 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함께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두세 사람이 함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저희를 위하여 들으시리라’고 했고 ‘너희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이면 내가 그 가운데 함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독불장군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는 공연히 생긴 게 아니고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에요.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에요. 교회를 나갈 수도 있고 안 나갈 수도 있는 게 아니에요. 교회는 예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고백을 할 때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여기에서 거룩한 공회는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믿고 교회를 믿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이에요. 나 혼자 잘 믿겠다?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표방해야 될 표어가 있다면 ‘예수님과 함께! 사람과 함께!’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람과 함께. 그것이 예배요, 그것이 교회요, 그것이 우리 인생의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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