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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려면 (요 1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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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려면 (요 13:34-35)

(요 13:34)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

미국에서 아더 힝클리라는 18살 먹은 소년이 무려 3000파운드의 무게가 나가는 트랙터를 혼자의 힘으로 들어올린 기적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역도선수가 아니었고 타고난 장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이런 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었을까요?  

그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일하다가 여자친구의 비명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소녀가 언덕에 세워둔 트랙터 아래서 놀다가 갑자기 밀려 내려온 트랙터 바퀴에 깔리게 되자 소리를 질렀고 이 비명을 듣자마자, 아더라는 소년이 달려가서 트랙터를 들어올린 것입니다. 이 소년의 힘은 사랑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힘은 비단 트랙터뿐만 아니라, 이 세상도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꾼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의 사람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때문에 외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 주셨다고 하십니다. 그 사랑이 죄와 사단의 권세아래 눌려 있던 세상의 죄인들을 사망에서 구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고 하시고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만이 능력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에너지이기에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  사랑을 충만하게 하려면 먼저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은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옛 계명은 무엇입니까?  십계명 또는 율법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옛 계명을 지키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중에도 옛 계명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음식을 가려먹는 문제, 절기나 안식일을 정확하게 지키는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옛 계명은 어떻게 됩니까?  새로운 법이 공표되면 옛 법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새계명이 주어졌는데도 아직도 새계명보다 옛 계명에 집착하여 산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옛 계명은 잘 몰라도 새계명을 중요하게 여기고 잘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요14장 21절에 예수님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계명을 잘 지킴으로 사랑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서로는 세상에 있는 예수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먼저 예수믿는 사람들끼리 열심히 사랑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하루 전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난 직후 제자들을 향해 마지막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가장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 장소에서 가장 의미있는 시간에 예수님은 특별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떠나고 난 후에 제자들이 서로 진실된 사랑을 보이면 세상은 제자들의 사랑 공동체를 주목하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교회가 뜨겁게 사랑하는 삶을 통해서만이 세상에 도전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공동체입니다.  제직들간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목자와 목원간에 사랑해야 합니다. 목원과 목원간에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교인과 교인들끼리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진실되게 사랑하여 미움이 끼어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서로 열심히 사랑하여 비난과 원망이 끼어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특히 목장은 영적인 가정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최선의 장입니다.  서로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돌아 보아 격려하며 자신의 것을 나누며 사랑을 실천할 때 목장은 천국이 됩니다. 여러분, 목원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내게 맡겨준 소중한 사람이구나!' 하고 열심히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목장에 소속되시고 목장 모임에 적극 참여해 보십시오.  목장에서 목자와 목원들을 통해서 사랑을 듬뿍 받아 행복해 질 것입니다. 

2. 사랑을 충만하게 하려면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1절에 보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도 사랑해 보았다.'  '나도 열심히 사랑한 적이 있다.' 라고 반응합니다.  그런데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은 드뭅니다.  상대방이 사랑에 반응하지 않으면 손해보는 것 같아 사랑을 중단합니다.  상대방이 사랑을 몰라주면 섭섭한 마음이 들고 오히려 원망스럽고 미워집니다. 그래서 사랑을 접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끝까지 사랑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사랑하라는 말씀에 앞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양말을 신지 않은채, 샌달같은 것을 신고 다녔습니다.  포장된 도로도 없었습니다.  온갖 오물이 발에 많이 묻었습니다.  그렇게 더러운 발을 예수님은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정성껏 만지며 씻어주시고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 발이 어떤 발입니까?  예수님을 배반하고 뿔불히 흩어져 도망갈 발이 아닙니까? 바로 그 밤에 자기만 살겠다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기 바쁜 그 발들을 예수님은 정성껏 씻겨 주심으로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 발중에는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하는 이의 발도 섞여 있습니다. 예수님을 돈 몇 푼에 팔아먹을 배신자의 발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행동을 모르시고 씻겨 주셨을까요? 아닙니다.  누가 팔아 먹을지, 누가 부인할 것인지, 다 아셨습니다. 알면서도 예수님은 마치 종처럼 성의를 다해 그 발들을 씻겨 주셨습니다. 
   
아마도 우리 같았으면 가룟 유다가 앞에 앉았으면 "이런 은혜도 모르는 더러운 배신자." 하며 대야의 물을 뒤집어 씌우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도 똑같이 대하십니다. 정성껏 발을 씻겨 주십니다.  속에서 불이 올라와 수건을 그 얼굴에 집어 던지기라도 하면 속이 시원할텐데..,  그러나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아무 말씀도 없이 모른척 묵묵히 발을 씻겨 주십니다.  

'이제 잠시 후면 이 발로 대제사장을 찾아가서 나를 팔겠지.'  '이제 잠시 후면 나를 부인하고 이 발로 도망치기에 바쁘겠지.'  속으로 생각하시면서도 싫은 표정도 없이 묵묵히 그 발들을 씻겨 주십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주고도 오히려 이용당하고 배신당할 것을 다 알고도 사랑을 거두지 않고 더욱 섬겨 주는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제자들의 속셈을 들여다볼 때 사랑스러웠을까요? 사랑스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랑하기로 결심하였기에 힘을 다하여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자주 넘어지고 배반하지 않습니까? 연약함과 실망을 많이 안겨 드릴 때가 많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알면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실까요? 사랑하기로 결심하셨기에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도망갈때도 많고 배반할 때도 없지 않건만 사랑을 거두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믿습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해도 사랑받을 짓을 한 것이 별로 없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 '외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사랑하신다.' 말해도 믿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이 사람의 수준으로 사랑할 줄로 잘못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연약함을 다 아십니다.  사랑한다고 해 놓고 오래 못가 사랑이 식어질 것도 아십니다. 큰 은혜를 받고는 믿음으로 살겠다고 결단하고도 불리하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도 다 아십니다.  다 알면서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함과 사랑함의 차이를 아십니까?  둘 다 좋은 말이지만 크게 다릅니다. 좋아함은 갈등을 일으키고 다툼을 만들어내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좋아함은 그 기준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기뻐야 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만족함이 있어야 하고, 자신이 추구하던대로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희생과 헌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 밑바닥에는 자신의 만족에 항상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결국 자기가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내의 한계가 옵니다. 언제든 돌아설 수 있습니다. 
  
반면 사랑함의 기준은 상대방에게 있습니다. 상대방이 만족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행복해야 하고, 성장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고, 상대방의 생명이 살아야 합니다. 사랑함에 있어서 자신은 희생되어도 좋습니다. 자신은 상대방이 세워질 수 있다면 무너지고 없어져도 좋은 것입니다.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채워가는 과정이 사랑함입니다. 그래서 변함이 없고 따스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무덤과 절망에서 생명을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좋아함의 힘이 아닌 바로 사랑함의 힘입니다.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사도 요한이 결정적으로 변화된 것은 예수님께 사랑받고 큰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 사랑에 눈뜨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좋아하기보다 사랑하며 살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당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끝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배신하는 것을 알아도 모르는척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비겁하게  저만 살자고 도망가는 자도 온맘 다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어려울 때 정성을 다해 도와주었는데도 받은 사랑을 조금도 값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변함없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종처럼 엎드려 발을 닦아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셨습니까?  이제는 사랑을 미움으로 갚고 등을 돌리는 사람까지도 사랑할 수 있기 바랍니다. 실망을 안겨주는 사람도 포기하지말고 끝까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을 충만하게 하려면 사랑하였을 때 결과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인물이 좋다고,  머리가 좋다고,  성격이 좋다고, 부지런하고 성실하다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부자로 인정받는 것보다 유능하고 똑똑하다고 인정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인정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라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를 닮은 사람이다.'  '그 안에 예수가 살고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향기가 이 사람에게서 풍기고 있다.'  여러분, 주변 사람에게서 그런 평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한국 교회안에서 예수의 제자라는 칭찬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식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터튤리안이라는 교부의 글을 보면 초대교인들은 종종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 "당신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 일이 있습니까?"라는 말로 전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기독교회는 이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요? 교회사가들에 의하면,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기독교가 소위 국교화된 다음부터의 일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정교회가 없어지고 소위 예배당 중심의 신앙으로 전환한 다음부터의 점차 변하고 사라졌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을 떠난 물고기처럼, '가정'(집)이라는 사랑의 현장을 잃어버리자 우리는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끼리 먼저 열심히 서로 사랑하고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을 초청하며 "와서 우리의 참된 사랑을  보시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사랑에 주린 사람들이 교회에 왔다가는 사랑에 녹아지고 감동받아  "이제 예수님을 알 것 같아요. 당신들의 사랑을 보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슴깊이 깨달아지는군요!" 라고 말하며 회개하고 거듭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의 목장마다 이런 간증과 고백이 살아나고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의 가정안에서도 이런 기적같은 변화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랑은 어떤 돌같은 마음도 녹이는 강한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안에 사랑이 충만하게 되어 주님께 인정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모두 사랑이 충만하여져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의 제자라고 인정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식어버리면 의무만 남습니다. 부담감만 커집니다. 의무감, 부담감으로 교회생활하면 피곤합니다. 힘만 듭니다.  짜증만 납니다. 섭섭함이 증가합니다. 
   
그러나 우리안에 사랑이 불타면 다릅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솟아납니다.  기쁨으로 섬기게 됩니다.  누군가를 위해 종이 되어도 전혀 자존심 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것을 희생하여도 손해보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쁘고 행복합니다.  누가 뭐라고 비난해도 상관없습니다.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육체적인 피곤함도 금방 사라집니다. 

우리 목자 목녀들을 보십시오. 목원들을 섬기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VIP를 섬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시간과 물질과 몸으로 희생하며 섬기다보면 피곤합니다. 상처도 받습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하면서 그만두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늘의 복을 받아 기쁨이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보람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사랑의 비밀을 깨닫고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사는 소원을 품게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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