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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들음과 따름 사이 (렘 42: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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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음과 따름 사이 (렘 42:19-22)


[유다에 살아남은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이집트로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아시는 대로 나도 오늘 여러분에게 같은 경고를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보내면서, 나에게 간구하였습니다. ‘주 우리의 하나님께 우리를 위하여 기도를 드려 주십시오. 그리고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알려 주십시오. 우리가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 하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일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이 모든 것을 다 알려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나에게 청해서, 여러분의 하나님 주님의 말씀을 들었는데도,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이, 가서 정착하기를 바라는 그 곳에서,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죽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 두십시오.]

• 예루살렘 함락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도 우리를 불러 당신의 현존 앞에 세워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오늘은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한 대목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보려고 합니다. 주전 7세기 말부터 6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와 애굽이라는 초강대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던 유다의 운명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입니다. 그는 여러 차례 국가가 위기상황에 빠졌음을 경고했고, 주님의 나팔수가 되어 주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지만 그의 말은 경청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전쟁의 광풍이 몰아쳤고 유다인들의 삶은 거덜나고 말았습니다. 앗시리아를 제압하고 중근동의 패권자가 된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은 18개월 동안이나 버티던 예루살렘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군인들은 왕궁과 민간 가옥에 불을 질렀고, 정복의 표시로 성벽의 일부를 허물었습니다. 그 혼란의 와중에 탈출을 시도하던 시드기야 왕과 귀족들은 여리고 평원에서 추격대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군인들은 그들을 하맛 땅 리블라에 있던 느부갓네살에게 끌고 가 그의 앞에 세워놓았습니다. 바빌로니아 왕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과 유다의 귀족들을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고 쇠사슬로 묶어 일반 백성들과 함께 제국의 수도로 데려갔습니다.

한때 유다인들로 북적이던 도성은 황무지로 변했고, 계절마다 들려오던 축제의 함성도 그쳤습니다. 거리를 질주하며 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겼고, 신랑신부의 친구들이 부르던 즐거운 노랫소리도 그치고, 추수꾼들의 질펀한 농담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땅이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땅이 된 것은 아닙니다. 바빌로니아 군 사령관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민들에게 포도원과 농토를 나눠주어 경작하게 했습니다. 선의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해서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그러면 예레미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주전파 사람들로부터 민족 반역자라는 말을 들어가면서도 바빌로니아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살 길이 없다고 외쳤던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헛된 꿈을 심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냉엄한 현실을 꿰뚫어보면서 역사의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살펴 백성들에게 고하는 자입니다. 수치스럽더라도 바빌로니아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지만 이미 기득권에 배불렀던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망하면서 예레미야 역시 포로가 되어 바빌로니아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의 근위대장인 느부사라단의 호의로 풀려났고, 총독으로 임명된 그달리야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 정치적 혼돈

그달리야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존경받는 선비 집안 출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사반은 요시야 임금 때 서기관을 지낸 인물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그의 집안을 신뢰했던 것 같습니다. 낙심한 이들을 격려하고 사람들이 먹고 살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총독으로서 그가 맨 처음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는 파괴된 집들을 수리하고, 가급적이면 먹을 것을 많이 모아 여퉈두라고 백성들에게 지시했습니다. 참으로 모진 게 인생입니다. 사람들은 충격과 상실감에 애써 달래며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소문이 퍼지자 몸을 숨기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달리야에게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군대장관들도 있었는데, 특히 요하난은 총독에게 아주 비밀스러운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왕의 종친인 이스마엘이 암몬족의 사주를 받아 총독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달리야는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게 오판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왕족인 자기를 제쳐놓고 서기관 가문에 속한 그달리야가 총독으로 선임된 것에 앙심을 품은 것 같습니다. 게다가 다윗 왕가를 무너뜨린 바빌로니아와 협력하는 자를 제거한다는 명분도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이 찾아왔을 때 그달리야는 친교의 식탁으로 그를 초대했고, 그 식탁공동체는 결국 살육의 현장으로 변했습니다. 그달리야와 그 자리에 있던 유다인들 그리고 갈대아 군인들이 한꺼번에 살해당한 것입니다. 희망의 싹은 이처럼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분별력 없는 신뢰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닙니다. 지도자는 착하기만 하면 안 됩니다. 어둠의 속성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동시에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일에 있어서는 빛의 자녀들보다 어둠의 자녀들이 더 지혜롭습니다. 그달리야의 착함은 그 자신은 물론 다른 무고한 이들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피에 취한 이스마엘은 순례차 예루살렘을 찾은 북부 지역 사람들까지 다 살해하고는 암몬으로 달아납니다. 개인적인 원한이나 정파적 이익을 떠나 함께 협력해야 할 그 중요한 시기에 이스마엘은 자기의 사욕 혹은 사감을 풀기 위해 불화를 조성했던 것입니다.

요하난은 자신이 위험에 빠졌음을 직감했습니다. 총독 살해 혐의가 자기에게 씌워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는 불안해졌습니다. 바빌로니아가 어떤 조치를 취할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빠진 그는 애굽으로 도피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합니다. 바빌로니아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고 있는 애굽은 정치 망명객들을 받아들여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도 바람일 뿐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 중보기도 요청

그는 모든 군 지휘관들과 더불어 예레미야를 찾아와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여쭤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가 그들의 절박한 요청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자 그들은 장담하며 말합니다.

“진실하고 신실한 증인이신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맹세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예언자님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예언자님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전하여 주시는 말씀대로 행동할 것입니다.”(42:5)

하나님의 응답이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그 말씀에 순종하겠다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을 거라고도 말합니다. 이쯤 되면 그들의 믿음이 참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그런 큰소리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말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얼마나 허약하고 변덕스러운지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지시하는 바가 우리의 판단과 일치하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따를 수 있을까요? 구체적인 상황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엎드리고 또 엎드렸을 겁니다. 사람들의 급한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하나님은 즉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일각이 여삼추 같은 시간이 무려 열흘이나 지났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이 땅에 그대로 머물러 살면, 내가 너희를 허물지 않고 세울 것이며, 내가 너희를 뽑지 않고 심겠다.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렸으나, 이제 내가 뜻을 돌이켰다. 너희가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그 바빌로니아 왕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너희를 구원하여 주고,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려고 하니, 너희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 주의 말이다.”(42:10-11)

메시지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이미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뜻을 돌이키셨다. 둘째,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구원하여 주신다. 셋째, 바빌로니아 왕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이 그들의 신뢰를 앗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도 전쟁과 기근과 염병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으려는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강제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살 길을 마련해놓으셨지만 그들 스스로 걷지 않으면 그 길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떠라 했는데도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손을 내밀어라 했는데 내밀지 않는다면, 일어나 걸으라 했는데도 일어나려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할 수 없습니다.

• 믿음은 결단

요하난을 비롯한 남은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레미야가 바룩의 충고를 받아 그런 말을 했을 거라고 단정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했지만 한 순간도 자기들의 판단과 생각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의 확실성에 근거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불확실해 보이고 이해할 수조차 없는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기는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자아의 한계를 돌파하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으라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영생을 구하던 부자 젊은이에게는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으라고 하실까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이들을 보면 참 예쁩니다. 그래서 뭐라도 주고 싶습니다. 아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탕을 주기도 하고 과자를 주기도 합니다. 오물오물 과자를 먹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어른들은 일쑤 입을 벌려 ‘아’ 소리를 내면서 ‘한 입만 달라’고 합니다. 아이는 잠시 당황합니다. 모른 체 외면해 버리는 아이도 있지만 선뜻 과자를 내미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이들에게 한 입만 달라고 하는 것은 그 과자가 정말 먹고 싶기 때문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에게 더 큰 것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야, 정말 착하구나’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다른 것을 더 주기도 합니다.

• 자의적 믿음을 넘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하시는 까닭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더 좋은 것’이 꼭 우리가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리고 때가 무르익으면 주십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모세가 하나님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다는 말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가야만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는 말일 겁니다. 

여하튼 남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또 그 뜻이 무엇이든 순종하겠다고 장담했지만 결국은 그 말씀을 외면하고 맙니다. 자기들의 판단을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일러 자의적恣意的 믿음이라 합니다. 자기 좋을 대로, 편리한 대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까닭은 자기 욕망이라는 관성을 따라 사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도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빛이 될 수도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거스르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강이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는 자기를 증발시켜 바람에 몸을 맡겨야 합니다. 바람은 수증기를 안고 날아 수백 리 떨어진 산꼭대기에 이르러 비를 떨굽니다. 암담하고 힘들어도 하나님께 맡기며 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어두웠던 시기에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런 혼란 가운데서 사람들이 겪는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적대감과 이기심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졌노라 하면서도 쉽게 불신앙에 빠져버리는 이들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모습은 우리들의 초상인지도 모릅니다. 선택은 우리 몫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불신앙적인 삶을 계속할 것인지,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결단할 것인지. 

바빌로니아가 답이 아니듯이, 애굽 또한 답이 아닙니다. 삶이 어려울수록 근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근본은 결국 하나님입니다. 금융자본의 세계 지배에 항거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한미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될 거라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근본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이 가을에 저는 우리 모든 교우들의 믿음이 한 단계 더 성숙해지기를 바랍니다. 참된 믿음을 향해 한 걸음만이라도 내딛는 용기를 발휘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믿듯이 주님은 우리를 믿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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