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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디매오를 고치심 (막 10: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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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매오를 고치심 (막 10:32-45)

신약에서는 영적인 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은 죄로 인해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그 베일은 벗겨져야 합니다. 믿음의 목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또한 삶의 목적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이 오실 때를 기대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강렬한 빛 때문에 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자 눈에서 비늘과 같은 것이 벗겨졌습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동행하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비늘이 벗겨지는 사건을 경험해야합니다. 이 놀라운 사건이 날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서 나타나길 축원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라는 찬송을 아실 것입니다. 그 곡에서 ‘예전에는 내가 보지 못했으나 이제는 봅니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은 신앙의 변화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역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9장 39절에서 4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예수와 함께 있던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이었다면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요 9:39)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게 되고, 스스로 본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설적인 사건입니다. 당시에는 스스로 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스스로를 모세의 제자들이라고 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라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데도 태양은 없다고 외치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자신들의 신학과 전통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올바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이러한 역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십자가 앞에서 ‘나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십자가에 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나와 상관없다거나 십자가에 달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십자가에 달리게 됩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은 영적인 눈을 뜨게 되고, 자만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합니다.


영적인 시력의 회복

여러분, 믿음은 어두운 방에서 창문을 열어 빛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은 이미 여러분을 비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커튼을 열고 그 빛을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여러분을 비출 것입니다. 아직 창문을 열지 않은 분이 있다면 창문을 활짝 여십시오. 그 빛이 우리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어두움이 밝음으로 바뀌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앞을 보지 못하던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눈을 뜨게 될 뿐만 아니라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변화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구절이야말로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의 역설을 잘 설명해줍니다. 오늘 이 사건이 마가복음에 나타난 마지막 기적입니다. 마가복음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기적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사건이 기록된 위치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의 사건이 한꺼번에 몰려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하면서 눈 먼 자를 고치시고, 고침을 받은 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사건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또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받은 구원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그것은 영적인 시력을 회복하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고통의 원인 과거 아닌 미래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여정을 방해하는 사람으로 갑자기 등장합니다.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입니다. ‘바’는 아람어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아들은 ‘벤’입니다. 비슷하지만 발음이 약간 다릅니다. ‘바’는 ‘아들’, ‘디매오’는 ‘존경받는’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번역하면 ‘존경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름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리고로 갔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 성을 떠나려는데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사람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46~47절).

앞을 보지 못하는 바디매오가 구걸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가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은 오랫동안 구걸을 하면서 영양실조를 겪어서 있을 수 있고, 선천적으로 앞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구걸과 앞을 보지 못한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의학수준도 낮았기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리고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살기에 매우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첫 관문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려는 사람들과 절기마다 그곳을 지나가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구걸하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앞을 보지 못해 구걸을 하며 사는 바디매오를 보면서 사람들은 누구의 죄 때문인지 혹은 무슨 죄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 2절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요 9:2) 
제자들은 불행해 보이는 사람을 보고 ‘고통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 했습니다. 부모의 죄는 자식에게 전가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은 부모의 죄든지, 혹은 자신의 죄든지 간에 고통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통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통, 주님 하실 일 드러내는 도구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요 9:3).

예수님은 고통의 원인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미래에 하나님이 하실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금 고통을 겪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유없이 찾아온 고통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가 바로 고통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대가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고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고통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지 말고 미래에서 찾으십시오. 산모가 겪는 진통이 좋은 예입니다. 산모는 왜 고통을 겪어야합니까. 과거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미래에 태어날 생명을 위해서 고통을 겪는 것입니까. 고통의 원인이 과거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고통의 원인은 미래에 있습니다.

고통 속에 있던 바디매오가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흥미로운 것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시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소리쳐야 맞는 것 같은데 그는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령님이 이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고백은 마가복음에서 처음 나왔습니다. 마가복음 이전에는 단 한 명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에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단어가 종종 등장합니다.

구약에서 메시야를 지칭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된 호칭이 ‘다윗의 자손’입니다. 메시야를 표현하는 가장 합당한 호칭이 바로 다윗의 자손입니다. 따라서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부른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역사적인 호칭이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십시오

바디매오는 육체의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을 읽을 수 없었지만 그는 유대인으로서 회당에서 들었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율법을 많이 읽고 연구하는 바리새인들은 눈앞에 계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분이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도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바라봤습니다. 심지어 나사렛 사람들도 예수님을 자신들과 함께 지내던 사람이 라면서 무시하고 거절했습니다. 이렇듯 모두가 나사렛 예수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바디매오만이 예수님이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메시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쩌면 그가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헬레켈렌은 보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습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 많은 것을 보기 때문에 더 많은 잡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구약의 언약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자마자 다윗의 자손이라며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디매오의 요청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그저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의 요청이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호소력 짙은 기도입니다. 혹시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르는 막연함이 있습니까. “나를 불쌍히 여기십시오”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믿음의 사람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더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사람을 불러오너라.’ 그러자 그들이 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예수께서 너를 부르신다’”(48~49절).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소리를 치는 바디매오를 꾸짖고 막아보려고 했지만 바디매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주변상황과 환경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능력이 많은 분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바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면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실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디매오를 예수님의 방해자로 여겼습니다. 어린 아이가 등장했을 때에도 제자들은 어린 아이를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는 소중한 존재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는 자신이 가야하는 길을 막는 방해물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만나야 할 소중한 존재로 여기셨습니다. 방해물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의 부름에 응답하신 예수님

여러분, 우리가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눈으로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에 방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를 누가 방해합니까. 다른 종교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정치가들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방해를 합니다. 본인 스스로가 하나님의 사역에 방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시고 바디매오를 부르셨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누구든지 으뜸이 되려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바디매오의 부름에 걸음을 멈추신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에 걸음을 멈추느냐가 우리의 신앙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발걸음이 무엇에 영향을 받고 있는지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악을 행하는 발은 빠른데 선을 행하는 데는 걸음이 더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부름에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멈추신 발걸음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녹아져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소원이 믿음을 키웁니다

“그는 겉옷을 던져 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로 갔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무엇을 네게 해 주기 원하느냐?’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보기를 원합니다’”(50~51절).

예수님은 처음부터 무조건 기적을 베풀어 주시지 않으십니다. “내가 무엇을 네게 해 주길 원하느냐?라고 질문을 먼저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질문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바디매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질문을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한 의도입니다.

바디매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앞을 보는 것이지만 어쩌면 그는 앞을 보는 것을 포기하고 체념한 상태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바디매오도 자신의 눈이 나을 거라는 소원조차 사라져 버린 상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바디매오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치유하기 이전에 그의 마음에 있는 소원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자신의 그토록 소원했던 마음을 일깨운 이후 예수님의 치유에 놀라고 감사하는 믿음으로 병이 낫게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 이전에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소원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소원이 있어야 믿음으로 자라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되는 원동력 ‘믿음’

여러분, 삶 속에 해결되지 않는 일의 이유가 때로는 물질이 없어서인 것 같고 때로는 능력이 부족해서인 것 같지만 사실은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고통 속에 있지만 미래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기대한다면 그 고통은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디매오를 일으키신 예수님의 기적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러자 그 즉시 그는 보게 됐고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52절).

예수님이 바디매오를 고치시는 모습을 보면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침을 바른다든지, 진흙을 바른다든지 등의 전혀 병을 고치지 못할 것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바디매오에게는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셨습니다. 마치 능력이 없어서 그냥 가라고 하는 것 같지만, 바디매오는 이미 고침을 받았습니다.

바디매오에게 어떤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했지만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아보고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쳤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단순합니다. 단지 하나님께 나아가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바빠서가 아니라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바디매오는 즉시 고침을 받았지만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육체적인 변화와 더불어 영적인 변화도 일어났습니다. 이후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을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상황과 환경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날마다 주님 앞에 눈 먼 자가 되어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겸손한 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겸손한 고백을 통해 가려져 있던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는 역사가 가득하길 축원합니다.
(이재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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