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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날을 사모하라 (벧후 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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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날을 사모하라 (벧후 3:8-13)


이스라엘의 야드밧셈 박물관에는 나치 정권하에서 유대인들이 무참하게 핍박을 받고 죽어가면서 사용했던 유품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옷, 신발, 식기, 도구 등과 무참하게 학대를 당하고 죽음을 당한 사진들이 걸려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나치 수용소 벽에 써놓은 낙서까지도 그대로 벽에 기록해놓고 있습니다. 

그 중에 “We are not last”(우리는 마지막이 아니다)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동료와 부모, 형제가 독가스실에 끌려가고 있었지만 절대로 희망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좌절하지 않고 소망의 밧줄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당당하게 다시 나라를 세웠으며 지금까지 세계에서 유대 민족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희망을 품고 사는 자입니다. 불경기 때문에 혹은 불행한 환경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희망을 가지고 살면서 세상에 희망의 빛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일하며 바쁘게 사는 것일까요? 모두 다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바보같이 삽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위하여 시간과 마음을 다 쏟아 부으며 살다가 죽는 순간에 후회합니다. 
“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했을까? 왜 용서하지 못했을까? 왜 너그럽게 받아주지 못했을까? 왜 나누어 주지 못했을까? 왜 잠시 허리를 펴고 먼 산 한번 바라보는 여유조차 갖지 못했을까? 왜 건강할 때 하지 못했을까?”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에야 보이는 것이 있고 들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간 순간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살아야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올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는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고,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환경 때문에 감사하고, 환경 때문에 행복하겠다면, 요즘 행복할 사람 찾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저기에서 우울한 소리만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질병의 거부’의 저자 노먼 커즌스는 웃음은 유효기간이 없는 최고의 약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희귀성 퇴행 관절염에 걸려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었습니다. 하지만 웃음이 병을 고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그는 그날부터 각종 코미디 영화와 유머집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배를 잡고 웃었고, 재미있는 책을 읽으며 하루 종일 웃었습니다. 그 결과 진통제와 수면제 없이도 편히 잠을 잘 수 있었으며, 결국 완쾌될 수 있었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먼저 웃으십시오. 감사할 일이 있고 싶다면 먼저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는 법. 기적을 바라지만 말고 먼저 감사부터 시작하십시오.
나이가 젊을수록 세월이 참 느리기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세월이 참 빠르다는 말을 합니다. 어릴 적에는 기어가다가 청소년기에는 걸어가고 장년기가 되면 달려가다가 노년기가 되니 날아가는 것이 세월이라는 말도 합니다. 얼마나 빠르면 창틈 사이로 지나가는 준마의 그림자와 같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가십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인지, 벌써 주님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신지 2000년이나 되어가고 있는데 도대체 다시 오실 그 날이 언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도대체 다시 오신다는 말을 믿을 수나 있는 것이냐고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주님의 시간으로 보면 그래봤자 이틀이 지난 것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답답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주님이 오시는 그 날보다 우리가 주님 앞으로 부름 받는 날이 더 빠를 수도 있습니다. 

살전 4:16~18절에 보면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이 되면 이 땅에 살아남아 있던 자들이 다 주님 앞으로 들림 받아 앞서 부름 받은 분들과 함께 주님을 영접하게 하셔서 영원히 주와 함께 있게 하십니다. 문제는 그 날이 언제냐는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궁금해 하지만 정작 보다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 날들이 이렇게 늦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하면 우리네 인생이 100년을 산다고 한들 주님 앞에서는 두 시간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나마도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문득 돌아보니 세월의 무게들이 머리에 흰 머리로 가득하고 이마와 눈가의 잔주름으로 묻어나며 뼈마디의 쑤심과 근력의 약함으로 드러나 보이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주님 이렇게 사느니 빨리 주님 앞에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하소연도 해보지만 왜 이런 몸으로 이다지도 오랫동안 세상에 남겨두시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나를 있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아직까지도 세상에 더 남아있게 하시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영혼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분명히 구원을 받았는가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면 언제 주님이 나를 부르신다고 해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이 세상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파라다이스라 천국이라 천당이라 뭐 여러 가지 말로 부르지만 처음 하나님께서 만드셨던 그 에덴동산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들어갈 하나님 나라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온갖 금은보화로 장식이 된 곳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하늘로서 새 예루살렘 성이 내려오는데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고 말씀합니다. 그 곳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이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가 정말로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심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어주셨음을 믿으십니까? 내가 진실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는다면 나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또한 나의 모든 필요를 따라 채우실 것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을 통하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을 했고 바울 사도는 빌 4:19을 통하여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날마다 필요한 은혜를 주시겠다고 하는 또 다른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육신의 피로도 주님께서 풀어주셔야 하고 건강도 주님이 주셔야 하며 날마다 새 힘이 넘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셔야 하고 필요한 재물도 은혜도 평안과 기쁨도 주님께로부터 날마다 우리들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품을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언제든지 주님의 품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지를 마십시오. 오직 주님이 기뻐하시도록 우리의 마음을 정하면,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면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우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하셨으니 피로가 말끔히 가시도록 맑은 몸과 정신도 주시고 내 안에서부터 새 힘이 넘치도록 만들어주실 것이요 재물로도 쓰고 남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실 것이요 기쁨과 평안이 넘치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주님이 마지막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올라가시면서 주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것이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까이에 있는 내 가족들 내 이웃들로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땅 끝까지 가지 못하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급하게 땅 끝 사람들을 불러 우리 가까이에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 사회를 다 민족 사회로 급격하게 바꾸어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만큼 주님이 급하십니다. 주님의 때가 가까웠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열방, 모든 족속, 모든 언어에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짜이짜이족이라든가 볼리비아와 같은 나라는 그 나라 말을 우리 한글로 표시하게까지 만들고 계십니다. k-pop의 열풍이 각 나라를 뒤흔드는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에게 주신 사명대로 세계만방에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갈 수 없으니 이제는 이 땅으로 그들을 불러 모으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다문화 가정들이라든가 외국인 근로자들을 우리가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들 가운데도 복음이 전해지도록 그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도록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했습니다. 이제 잠시 후면 주의 날이 마치 도적이 오듯이 그렇게 생각지 아니한 날 생각지 아니한 때에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다 용광로 속에 던져진 암석처럼 뜨거운 불에 풀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집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다 녹아질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온 세상의 화산들이 다 폭발하게 된다면 다 용암에 뒤덮여 녹아버리게 될 것입니다. 9.11 사태 때 미국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 쌍둥이 빌딩이 녹아내리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비행기 안에 실린 기름에 불이 붙어 빌딩이 녹아내릴 정도면 온 세상의 화산이 다 폭발한다면 그래서 온 땅이 용암으로 뒤덮인다면 남아 있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돌아보십시오. 우리 주위에 우리 가족 가운데 우리 동료 가운데 이웃 가운데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를 살펴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도록 이끄는 일에 우리가 온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 날들을 주님이 미루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잠들어만 있지를 않습니까? 더 이상 잠자고 있을 수만 없습니다. 이제는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한 영혼 한 영혼을 위해서 부르짖어 기도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우리 온 마음을 다 쏟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깨십시오. 나는 안 된다 피곤하다고만 하지 마시고 “주님, 힘주십시오. 나는 감당하겠습니다.” 기도하면서 감당하십시오. 주님의 살아계심과 치료하심과 공급하심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믿고 결단하고 순종함으로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헌팅턴 프레스’ 신문사 건물입구에는 3개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지구본을 껴안고 미소를 짓고 있고, 다른 하나는 지구본 위에 거만한 표정으로 서 있고, 나머지 하나는 사람이 지구본 밑에 깔려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동상 밑에 설명이 있습니다. “지구본은 흘러가는 시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구본을 껴안고 있는 모습은 시간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표현한 것이며, 지구본 위에 거만하게 서 있는 모습은 시간의 귀중함을 비웃는 것이고, 지구본 밑에 깔려 있는 모습은 시간을 무시하다 실패의 나락에 떨어져 고통당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 신문사는 항상 흐르는 시간 속에서 최후의 신문을 만들고자 이 동상을 세웠습니다.” 

시간은 소중합니다. 시간은 물질보다 귀합니다. 잃어버린 돈은 다시 찾거나 벌 수 있지만 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힘쓴다 해도 지나간 세월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오직 지혜 있는 자처럼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합니다. ‘아끼라’는 말은 ‘redeem(대속)’의 뜻을 가집니다. ‘값을 지불하고 시간을 사서 내 것으로 만들라’는 의미입니다. 
벵겔은 이 말을 “악한 자의 손에서 시간을 사라”, 칼빈은 “마귀의 손에서 시간을 사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시대가 악하기에 시간을 선하게 사용하라는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살았느냐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사용하였느냐를 보십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세월을 어떻게 살았느냐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느냐 하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입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란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생활을 말합니다. 믿음 안에 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고 결단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심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합니다. 결국은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했느냐에 따라 우리의 열매가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가진 것이 없어서 할 수가 없다고 믿습니다. 

그 믿음대로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너무 힘들어서 무엇을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나는 아파서 못한다, 나는 바빠서 못한다, 나는 피곤해서 못한다고 합니다. 그 믿음대로 그 고백대로 그는 할 수가 없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내 믿음이 못한다고 하는 믿음인데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모든 것으로 채우시리라고 믿으면 그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피로도 풀어주시고 더 건강하게도 해 주시고 물질로도 공급해주십니다. 까마귀를 통해서도 엘리야를 먹이셨던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주님을 위해서 믿음으로 살겠다고 믿고 고백하는 우리의 필요를 어찌 채우시지 않겠으며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게 하시겠다고 하신 표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경건이라는 말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발휘하는 사람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믿음 안에서 살아가며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요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며 오직 말씀대로 순종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이 바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가 하면 마지막 때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유혹해도 이 세상은 다 지나갈 것들입니다. 다 사라지고 말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에 목을 매지 마십시오.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너무도 짧은 세상입니다. 한 평생이라고 해 봐야 하루살이만도 못한 날들을 살다 끝나는 인생입니다. 

이 짧은 인생을 헛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보람된 인생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정을 나누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 때문에 아옹다옹하지 마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아름다운 사귐을 이어나가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필요를 따라 공급하시기를 힘쓰십시오. 상대방을 먼저 즐겁게 하고 편안하게 하는 삶을 사십시오. 나의 필요가 아닌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고자 할 때 내 필요도 덩달아 채워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상의 도리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돕는 배필로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돕는 배필이란 도움이 필요한 배필이라는 뜻도 됩니다. 우리 가운데 혼자서 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고 상대방을 도움으로 나도 채워지고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아가십시오. 특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으니 더욱 날마다 깨어 기도할 수 있도록 건강도 주시고 은혜도 주시고 날마다 새 힘도 넘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믿음으로 깨어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20대의 꿈 많은 청년이 살았습니다. 그는 어느 날 심장마비에 걸려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습니다. 그는 좀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하나님께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하나님, 정말 너무 하십니다.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필이면 저처럼 꿈이 많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젊은이를 이와 같이 급하게 부르셨습니까? 게다가 하나님께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부르시면 제가 어떻게 준비를 하고 올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항변을 들으시고 그에게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 저를 부르실 때는 제가 두말하지 않고 즉시 달려오겠습니다. 다만 저를 부르시기 전에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예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제가 잘 준비하고 달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청년은 다시금 되살아났습니다. 그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래서 성공했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결혼을 해서 아름다운 가정도 이루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도 이제는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손주도 여러 명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잠을 자는 가운데 다시금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다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습니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난번에 분명히 저를 부르시기 전에는 미리 예고를 해달라고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또다시 예고 없이 부르시면 제가 어떻게 준비를 합니까?”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아니다, 나는 이미 너에게 여러 차례 예고를 주었다. 단지 네가 듣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자 그는 의아스러운 듯이 하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 언제 저에게 예고를 하셨습니까? 제 기억으로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설명을 하셨습니다.

“그래, 너 한번 잘 생각을 해보아라. 너 나이 40세가 되면서 너의 몸이 예전과는 같지 않다고 느끼지 않았느냐? 네가 50줄에 접어들면서 눈이 침침해지고 어깨가 결리지 않았느냐? 그리고 네가 60줄에 접어들면서는 거울을 보면서 네 스스로 무엇이라고 말했느냐? ‘나도 이제는 많이 늙었구나’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70줄에 접어들면서 네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한 사람씩 두 사람씩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네 스스로 무엇이라고 말했느냐? ‘나도 이제는 갈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네 입으로 갈 때가 가까웠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이만큼 너에게 예고를 해주었으면 되었지 무엇을 어떻게 더하란 말이냐?”
이 말씀에 그는 더 이상 변명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마 16: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그렇습니다. 지금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는 것은 주님이 오실 날이 그만큼 가깝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이제는 뒤로 미룰 수가 없습니다. 구원의 문이 닫히기 전에 우리 온 가족이 믿음으로 화합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서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알지 못하는 시간 알지 못하는 때에 주님이 오시게 될 터인데 영원한 불 속에 버려져 가슴을 치며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어디서 시작했느냐는 어디서 끝나느냐 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우리는 어디에 서 있고 싶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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