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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으켜줌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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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으켜줌 (눅 7:11-17) 
 
 
❚단장의 심정으로

최근에 한 TV 프로그램이 이런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중고등학생 4명의 윗옷 주머니에 소형 녹음기를 넣어 하루 동안 어떤 말을 쓰는지 조사해보니 학생 1명이 4시간 동안 최대 385번의 욕설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전에도 욕은 했지만 어쩌다 화나면 한 번 했지, 욕을 입에 달고 살면 좀 이상한 아이, 불량한 아이 취급을 받았지요? 그런데 놀라지 마세요. 이렇게 4시간 동안 385번의 욕을 하는 아이들이 특별히 불량한 아이가 아닙니다. 아주 지극히 평범한 아이들, 내 자녀들이 이렇게 욕을 입에 달고 산다는 것입니다. 모범생도 마찬가지고요. 그게 욕인지도 모르고, 또 그 욕이 어떤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평범한 대화 속에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요즘 지나가는 아이들의 대화를 들으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지요? 욕 없으면 대화가 안 됩니다. 그야말로 모든 대화가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납니다. 멀쩡한 중고등학생이 상욕을 하고, 초등학생도 하고, 여학생들도 남학생들에게 질세라 거친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내뱉습니다. 한 번은 우리 아이 핸드폰에 찍힌 문자메시지를 보고 황당했던 적이 있습니다. “몇 시에 어디서 만나자 이 ◯새끼야.” 깜짝 놀라서 “이게 웬일이냐”고 물으니 저희 아이 대답이 걸작입니다. 

“애들 다 쓰는 말이야, 애칭인데 뭘.” 세상이 이쯤 되고 보니 이제 일부 학교에서는 ‘욕 안 쓰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욕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욕의 뜻을 풀이한 프린트 물을 나눠주고, 선생님이 단어 하나하나 의미를 설명해줍니다. 이 설명을 들은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강단에서 욕을 해서 죄송하지만 하는 수 없이 해야겠습니다. “그전에는 ‘씨발’이 무슨 사투리인줄 알았어요. 근데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성(性)적인 의미라는 걸 알고 너무 놀랐어요. 이제는 쓸 때 ‘아, 그게 그 뜻이었지’라고 생각하고 잘 안 쓰게 돼요.” 그런데 이 욕이 그냥 성적인 욕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 뜻을 아십니까? 뜻을 알고 나면 절대 못 쓸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아이들은 그 뜻도 모르는 채 오늘도 이런 말을 쓰며 살고 있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우리 자녀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게 어디 욕설만의 문제겠습니까? 요즘 애들이 욕을 많이 하는 이유가 그만큼 스트레스 많이 받고 힘들어서 그렇답니다. 우리 아이들이 점점 피폐하고 찌들려 갑니다. 옛날보다 환경은 좀 나아지고, 우리 때보다 머리는 더 좋아지고 공부는 더 열심히 하는지 몰라도 도대체 뭐가 선하고 악한지도 모르고, 바른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할 줄도 모르니 정말 큰일입니다.

신문에 이런 기사도 났더군요. 10대 청소년의 성폭력 범죄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검찰청의 ‘청소년 성폭력 범죄 현황’ 자료에 따르면 청소년 성범죄자가 매년 꾸준히 늘어나고 있고 특히 올해 들어서는 8월말 현재 1,817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아들 가진 부모는 아들가진 부모대로, 딸 가진 부모는 딸 가진 부모대로 불안해서 못 살겠답니다. 어린아이 가진 부모나 다 큰 자녀들 가진 부모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자녀들의 문제에서 우리는 늘, 언제나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떤 부부는 결혼하고 오래 되었는데도 자녀가 안 생겨서 걱정입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를 낳고 난 뒤에도 걱정입니다. 어릴 때는 어릴 때대로 걱정입니다. 모든 부모는 이런 기대감이 있습니다. 우리 아이 낳을 때 이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잘 난 아이로 자라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뜻대로 되나요? 휴~ 아이가 커가면서 공부 때문에 걱정입니다. 

공부를 못하면 못하는 대로 걱정이고, 잘 하면 또 잘 하는 대로 걱정입니다. 대학진학이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닙니다. 또 대학에 들어가도 걱정이네요. 어마어마한 학비에다가 그렇게 고생하고 키워도 취직조차 못해 또 걱정입니다. 아이를 하나 낳아서 다 키우는 데 평균 2억 4천만 원이 든답니다. 군대 갈 때 걱정입니다. 다 커서 시집 장가 갈 때도 걱정입니다. 시집 못 가 걱정, 장가 못 가 걱정이지만 정작 짝을 만나서 결혼해도 걱정입니다. 

러시아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네 자녀가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라, 바다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라,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 그만큼 결혼도 잘 해야 합니다. 정말 좋은 남편, 귀한 아내를 만나야 합니다. 하지만 결혼한다고 끝이 아닙니다. 그저 부모는 일생 자식 걱정에 매어 삽니다. 90 노모가 70 다 된 아들에게 말합니다. “길 다닐 때 길 조심, 차 조심 혀. 이상한 사람 따라가지 말고...” 이게 부모 마음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걱정하고, 이렇게 조심하고, 이렇게 기도하건만 자녀들이 잘못 될 때, 비뚤어진 길로 갈 때, 부모의 기대에 어긋날 때, 자녀가 인생에 실패할 때 부모의 마음은 그야말로 찢어집니다.

중국 <세설신어>(世說新語)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환온이라는 사람이 배를 타고 촉나라로 가는 도중 부하가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잃고 슬피 울며 언덕을 따라 백여 리를 따라오다가 마침내 배 안으로 뛰어들어 죽고 맙니다. 죽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가르고 속을 들여다보았더니,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단장(斷腸)입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가 아니라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이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식만 생각하면 애가 타고(‘애’라는 순우리말도 ‘창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늘 자식걱정에 가슴이 메어지고, 자식걱정 하다가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지는 게 부모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은 이런 부모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모의 마음을 더 애타게 하고, 속 끓게 만듭니다. 창자 마디가 토막토막 끊어지게 만듭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과부와 외아들

오늘 본문에는 2중의 고통을 겪은 가족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나인성에 살던 과부 집안입니다. 어머니는 과부고,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과부 외아들과는 결혼도 하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과부의 외아들은 그만큼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너무도 크고 깊어서 자칫 집착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부인 어머니가 외아들이 결혼했어도 놓아주지 않아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 부모님들 기억하십시오. 창세기 2장 24절은 결혼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즉 결혼과 동시에 부모는 아들을, 딸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부모님들, 이 말 들으니 섭섭하지요? 하지만 정말 중요한 원리입니다. 

내 아들이기 이전에 이제는 며느리의 남편입니다. 내 딸이기 이전에 이제는 사위의 아내입니다. 그러니 부모가 자식에게 너무 집착하면 내 아들 가정이, 딸 가정이 행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놔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부의 경우, 어떻겠습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과부로 살며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내 외아들, 하나밖에 없는 자식, 그 아들 하나 보고 살았겠지요. 그 아들 하나 보면서 모든 고통과 외로움도 다 잊을 수 있었겠지요. 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귀한 아들이었겠지요. 그래서 ‘과부의 독자(외아들)’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이 외아들이 과부 어머니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외아들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14절에서 주님이 그 외아들에게 “청년아!” 하고 부르시는 것을 보니 이 외아들은 아직 창창한 젊은 나이에 병 때문인지, 사고 때문인지 갑자기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어머니, 이 과부 어머니의 고통과 슬픔이 얼마나 컸을지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편도 잃었는데 이제 유일한 희망인 외아들도 잃었습니다. 이제 당장 먹고 살 길조차 막막하고, 더 무서운 것은 살아갈 희망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외아들을 잃은 과부 어머니를 보신 주님은 13절에 이렇게 위로하십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주님은 이렇게 진실 된 마음으로 과부를 위로하신 후 관에 손을 얹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죽었던 청년이 되살아나 앉고 말까지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되살아난 외아들을 어머니에게 ‘주십니다’(15절).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이야기가 성경에 여러 차례 나오지만 이런 표현은 그 어디에도 안 나옵니다. 죽었다가 살린 자를 어머니에게 주셨답니다. 무슨 뜻일까요?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왜 성경이 이런 특별한 표현을 쓴 것일까요?

❚나오미에서 마라로, 다시 나오미로

저도 늘 이 본문을 읽으며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그 답을 놀랍게도 구약의 룻기를 읽다가 발견했습니다. 룻기 4장 맨 마지막 결론 부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룻기의 주인공인 룻은 모압 여인으로 일찍이 과부가 되었다가 보아스라는 남자를 만나 재혼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게 됩니다. 아들도 낳습니다. 그 아들이 나중에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고 메시야의 조상이 됩니다. 룻기는 이 아이의 이름을 이렇게 부릅니다. ‘오벳’. 이 오벳이라는 이름은 히브리말로 ‘섬기는 자, 봉양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아이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요? 룻기 4장 15절을 보면 룻과 보아스가 아들을 낳자 동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여기 나온 대로 오벳은 나오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손자기 때문입니다. 나오미가 누구입니까? 나오미라는 이름은 비록 ‘희락’ 혹은 ‘기쁨’을 뜻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희락이나 기쁨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습니다. 베들레헴에 큰 기근이 들자 정든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향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안 굶어죽으려고요. 그런데 그만 그 모압 땅에서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맙니다. 설상가상,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다 요절하고 맙니다. 이제 남은 것은 과부가 된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 뿐입니다. 쌍 과부집도 아니라 세 과부집입니다. 

그래도 고향에 돌아가면 굶어죽지나 않겠다 싶어 세 과부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오는 도중 며느리 오르바는 떠나고 룻만 데리고 가게 됩니다. 그녀를 알아본 베들레헴 동네 사람들이 “야, 저게 누구야? 옛날 모압으로 이민 갔던 나오미잖아?”(1:19) 하는데 이 말을 들은 나오미는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희락, 기쁨)라고 부르지 말고 차라리 ‘마라’(쓰다, 고통)라고 불러다오.” 이게 나오미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기구한 여인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불행한 과부가 또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일찍이 남편을 잃고 두 아들도 잃고, 이제는 대까지 다 끊어질 처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며느리 룻이 보아스라는 좋은 남자를 만나게 하시고 둘이 맺어져 아들까지 낳은 것입니다. 가문의 대도 잇게 되었고 온통 절망과 고통뿐이던 나오미의 인생에 손자 오벳은 소망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예쁜 손자 하나 얻은 정도가 아니라 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란 말입니까? 이런 나오미의 상황을 잘 알던 동네 여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4:17)

여인들은 나오미가 손자를 봤다고 하지 않고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거 놀랍지 않습니까? 이 아이는 나오미의 잃어버렸던 삶의 소망이요 기쁨이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마라(쓰디쓴 고통)가 되어버렸던 그녀의 삶을 다시금 나오미(희락, 기쁨)로 회복시켜준 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벳을 ‘나오미의 손자’라 하지 않고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일으켜줌

다시 나인 성 과부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물론 주님이 다시 살리신 것은 죽었던 청년입니다. 주님이 다시 일으켜 주신 것은 죽었던 외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 청년을 다시 살려서 과부인 어머니에게 ‘주십니다.’ 이제 감이 좀 잡히십니까? 과부 나오미가 남편도 잃고 아들도 잃고 나오미(희락)가 마라(고통)로 추락했지만 하나님이 그녀에게 오벳을 주셔서 인생이 다시 회복된 것처럼, 오늘 주님은 외아들을 잃은 이 과부의 고통과 절망을 아시고 아들을 다시 살려 그녀에게 ‘주신’ 것입니다. 살 소망을 다시 주시고, 살아가야 할 이유를 다시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런 분인 것을 여러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다 아십니다.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아무도 몰라주는 나의 내면 저 깊은 고통과 눈물을 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나인 성 과부처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아들아, 딸아 울지 마라” 하시며 우리의 눈물을 친히 닦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자녀를 일으켜 주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 7:14) 하시며 우리 자녀를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여러분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아니면 우리 자녀들을 일으켜 줄 분이 없습니다. 이 시대에 너무도 악한 일이 많고 유혹이 많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 자녀를 지켜주고 붙들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이 시대는 너무도 절망이 많고 넘어질 일이 많습니다. 수많은 우리의 자녀가 비틀거리고 넘어집니다. 죽기도 합니다. 오직 우리 주님만이 우리 자녀를 일으켜 주시고 다시 살리실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 자녀들을 일으켜 주셔야 합니다. 또한 주님이 자녀들 때문에 찢기고 상한 우리를 위로하시고 친히 눈물을 닦아주셔야 합니다. 주님이 비틀거리는 우리 가정을 세워주시고, 자녀 문제로 힘들고 절망해서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부모들을 위로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 주님만 이렇게 하실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찢겨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위해 통곡하다 단장(斷腸), 내장이 다 토막토막 나고 만 어미 원숭이처럼 말입니다. 이 ‘단장의 고통’ 없이는 결코 우리 자녀를 세우고 일으켜 줄 수 없습니다. 

부모들이 주님처럼 이 ‘단장의 기도,’ 그야말로 장이 끊어지고 토막 날 정도의 간절한 기도를 하지 않고서는 이 험난한 시대에 결코 우리 자녀를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일으켜주심, 세워주심을 믿고 주님만 의지하기 바랍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가정을 이끌어 가면서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기 바랍니다. 자녀를 위해 단장의 기도로 부르짖어 주님이 친히 우리 자녀와 자녀손들을 책임져주시고, 일으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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