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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나은 것을 택하라 (전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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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것을 택하라 (전 7:1-10)


영감받은 솔로몬은 보다 나은 인간들의 삶을 위하여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은 비교법을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입니다.
여기 본문에 아름다운 이름, 죽음, 초상집, 책망 등을 오히려 낫다고 함으로 현실도피주의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바른 선택을 통해 인간들의 삶에 자극을 주어서 더 나은 삶을 지향(志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당신의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삶은 바뀔 수 있다. 선택은 당신이 가진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 중에 하나다."라고 "존 맥스웰"은 말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자기에게 선택권을 이양한 자를 위해 최고의 길을 예비하신다."라고 했습니다.
선택은 망설이거나 아주 작은 미련도 주지 않습니다. 선택은 한 쪽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Ⅰ. 물리적인 소유가치보다 존재론적 가치가 낫다고 했습니다. 

본문 7장 1절에 『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의 대명사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자신의 이름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을 대단한 영예로 생각했습니다.
욥기 18장 17절에 『 그의 기념이 땅에서 없어지고 그의 이름이 거리에서 전함이 없을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잠언 10장 7절에 『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 』고 했습니다. 

어찌 히브리인들 뿐이겠습니까?
우리들 각자의 이름도 그 부모의 염원과 기대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오늘도 자신과 가문과 자신이 속한 단체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 이 사회는 저마다의 일터에서 소리 없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가 있고 자가 있습니다. 이름은 함부로 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저의 이름은 강구원입니다. 그리고 저의 호는 편재(片才)입니다. 그리고 자는 편운(片雲)이라고 지었습니다. 저의 낙관(落款)은 편운여가(片雲餘暇), 편재여가(片才餘暇)로 했습니다. 
여기 "기름"은 감람나무 열매에서 채취하는 식물성 기름을 말합니다. 감람유의 용도는 ① 식용품 ② 등화용품 ③ 의료용품 ④ 미용용품 ⑤ 향유용품 등 생활 전반에 걸쳐 폭넓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감람나무가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호세아 14장 6절에 『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소유가치보다 존재론적 가치가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아름다운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장 4절에 『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7절에 『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디모데후서 1장 14절에 『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 이름이 알려지도록 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13절에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자랑스러운 이름도 있지만 악명으로 인해 불명예스러운 이름들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가룟 유다, 빌라도 같은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더 좋은 이름으로 개명(改名)해 주시기도 합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이름을 가장 아름답게 역사의 현장에 기록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역사 속에 기록되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왕의 시종 행적이 선견자 사무엘의 글과 선지자 나단의 글과 선견자 갓의 글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의 왕된 일과 그 권세와 지난 시사가 다 기록되었습니다(대상 29:29-30).

바울의 동역자들의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3절에 『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기는 자는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 시인한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5절에 『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5절에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0절에 『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고 한 데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의 본질은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Ⅱ. 현실주의 가치보다는 내세주의 가치가 낫다고 했습니다.

본문 7장 2절에 『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초상집은 죽음 앞에 슬프게 곡하는 집인 반면에 잔치집은 즐거운 노래와 춤과 먹고 마실 것이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른바 영안실주의(靈安室主義)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이 일시적인 쾌락보다는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시의존사색이 더 유익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여기에 머물러(유심-留心)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유한한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죄와 탄식과 고통이 상존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은 평화가 넘치고 기쁨이 충만한 곳입니다.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고 그 무엇도 아쉬운 것이 없는 풍족한 나라입니다.
그곳은 상대적 빈곤감에 허덕이거나 다시 교육하거나 교육받는 세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도는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날 때 첫 울음을 우는데 그 울음이 "이 한 많은 세상을 어떻게 살까?" 하는 울음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죽음이 두려우면 초상집을 멀리하게 됩니다. 신불신자(信不信者)를 막론하고 늙으신 분들은 사람이 죽는 것을 남의 일로 생각하지 않고 대단한 관심을 보입니다. 하물며 성도들이야 죽음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본문 7장 4절에 『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인생은 진정한 자신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중생 받은 성도는 나온바 본향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 곧 천국을 사모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5-16절에 『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한결같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14절에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있다고 해서 나와는 죽음이 무관하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죽음은 인간들의 삶을 겸허하게 해주고 정직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명예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잔치집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본문 7장 8절에 『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 』라고 했습니다. 

Ⅲ. 진리의 채찍이 세상의 칭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본문 7장 5-7절에 『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 『 지혜 』를 의인화시키고 있습니다. 
잠언 7장 4절에 『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고 했습니다. 
잠언 8장 1절에 『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잠언 1장 20절에 『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라고 했습니다. 

잠언 9장 1절에 『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 『 지혜 』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 『 우매자의 노래 』는 "무모하고 부당한 칭찬" 곧 아첨(阿諂-남의 환심을 사거나 잘 보이려고 알랑거림)과 아부를 말합니다. 
솔로몬은 상대방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하는 소리보다 차라리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우매자의 웃음소리가 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 같다고 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는 땔감이 귀했습니다. 그래서 가시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했습니다. 특히 가시나무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빨리 타지만 쉽게 뜨거운 불기운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소리만 요란하지 내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같이 우매자의 웃음소리가 겉으로는 요란해도 사실은 진실성도 없고 내용도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칭찬이 인색한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칭찬할 것이 없는데 억지로 꾸며서까지 칭찬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처사입니다. 
나이가 열 살이나 젊어 보인다든지, 어떤 유명한 연예인이나 사회적으로 알려진 인사를 꼭 닮았다든지 이렇게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는 칭찬은 오히려 욕(辱)일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음에도 없는 대중적 칭찬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항간(巷間-일반사람들 사이)에 칭찬을 하면 고래도 춤을 춘다는 말이 한참 회자(膾炙-회와 구운 고기라는 뜻, 널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림)된 일이 있습니다. 

조선조 명종 때 정승 상진(尙震)은 관대하고 도량이 넓어서 사람들을 칭찬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어느 날 사랑방에 누군가 다리 하나가 짧은 사람의 이야기를 하자 "다리 하나가 짧다고 하지 말고 다리 하나가 길다고 하시오."라고 꾸짖었다고 합니다.
이런 칭찬에 고무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아첨이나 아부에 해당하는 것이지 칭찬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징계는 곧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8절에 『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법적으로 볼 때 인사한다는 말은 동사적 용법이지만 공손하게 인사한다는 말은 부사적 용법입니다. 따라서 어떤 행위의 가치는 부사적 용법에 따라 좌우됩니다.
성경에도 부사적 용법으로 기록된 것이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6:12), 착한 행실을 가져라(마 5:16), 아름다운 옷을 입어라(사 52:1)등입니다. 
예의가 있고 품위를 차린다는 것은 동사적 용법보다 부사적 용법을 살리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더 나은 것을 택하라"는 설교 제목은 문법적으로 비교적 용법입니다. 문법적으로 비교적 용법은 문자 그대로 비교하는 것입니다. 
비교해 보아서 그 중에 더 나은 하나를 택하든지 제하든지 하라는 것이 성경에 나타난 비교급의 의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직분, 곧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직분은 더 아름다운 직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직분은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 곧 은혜언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더 좋은 중보(中保)입니다. 

히브리서 8장 6절에 『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고 했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가인의 제사보다 더 나은 제사, 곧 믿음의 제사입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 『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나온 바 본향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 곧 천국을 사모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6절에 『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고난 받는 것을 부끄러워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장차 부활하여 천국에서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여! 

이제부터 우리는 담대하게 거룩한 선택을 합시다. 보배로운 기름보다는 아름다운 이름을 택합시다. 이 세상보다는 우리가 반드시 가야할 천국을 택합시다. 부질없이 아첨하고 남을 이용하기 위한 칭찬에 목말라 하지 말고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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