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진정한 가족 (막 3:31-35)

첨부 1


진정한 가족 (막 3:31-35) 

 
(눅2:39)을 보면, 갈릴리 나사렛을, 예수님의 '본 동네'라고 부른다. 그러나 (마9:1)을 보면, 갈릴리 해변 마을 가버나움을 예수님의 '본 동네'라고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마4:13)에서 밝히고 있듯이, 예수님이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갈릴리의 또 다른 마을, 가버나움으로 옮겨가셨기 때문이다. 

(눅4장)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나사렛을 떠나서, 가버나움으로 가신 이유를 알 수 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61장)에 있는 말씀을 읽으시고, 거기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자신임을 밝히셨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자, 회당에 있던 나사렛 사람들은 화를 내면서,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산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그 아래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셔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눅4:30). 나사렛을 떠난 예수님은, 그 곳에서 조금 떨어진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그 때부터 예수님의 '본 동네'는, 갈릴리의 나사렛이 아니었다. 가버나움이 예수님의 '본 동네'라고 불리게 된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귀신들을 쫓아내자, 온 갈릴리에 퍼졌다. 이 일로 무리들이 몰려와서,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그때 그들은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당하신 일을 떠올리고,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나사렛으로 데리고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예수님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왔을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에게 말씀하고 계셨다. 그러자 서기관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예수님을, 사탄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다(막3:22). 

하나님 나라의 영적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보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음악이 소음으로 들린다.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남을 돕는 일이, 미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사탄보다 더 강한 자, 곧 하나님이심을 밝히 말씀하셨다. 오늘 본문은, 그 뒤를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의 참 가족이 누구이며, 그의 참 가족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를 밝히셨다. 

1.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들(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왜 밖에 서서, 사람들을 보내서 예수님을 불렀을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동생들은, 밖에 서서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문제는, 그들의 마음이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던 사람들처럼,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예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고 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젊었다. 힘도 있을 나이다. 따라서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마음만 있었다면,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지 않고서, 직접 들어갔을 것이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금 안에서 하고 계신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던 일을 즉시 중단하고, 자기들과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요7:5)에서 밝히고 있듯이, 아직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만일 믿었다면, 사역을 방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 안으로 들어가,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물론 어머니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해준 말을 들었기에,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남자를 알지 못할 때, 예수님이 그의 몸 속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또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의 증언도 들었다. 

따라서 마리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자기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실, 구주이심을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도 때로는 인간적이고, 혈연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을 대하곤 했다. 예컨대 12살 때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러 계실 때, 마리아는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찾았다. 

가나의 혼례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도, 마리아는 걱정하면서, 예수님을 찾아서 그 사실을 일렀다. 이 때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신분과 사역을 망각한 채, 인간적이고 혈연적으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가 예수님을 보호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데리러 가버나움으로 왔다. 

지금 나의 모습은, 몸은 안에 있지만, 마음은 못마땅한 듯이, 밖에 서있지는 않는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안으로 들어와서, 겸손히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꿇기 바란다. 그것이 바른 신앙이다.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예수님은 앉은 무리에 둘러 쌓여있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이, 그들을 헤치고 지나갈 수 없어서, '앞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말을 앞사람들에게 전했을 것이다. 

그의 말은 계속 앞으로 전달되어, 나중에는 예수님 바로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그래서 맨 앞에 앉았던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그 말을 전했을 것이다. 여기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배척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고 칭했다. 

(막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요셉의 아들 목수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요셉이 이미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예수님의 형제들 4명의 이름과, 누이들이 나온다. 이들은 모두,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이다. (눅2:7)을 보면, 예수님이 마리아의 '첫아들'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천주교회에서는, 마리아의 종신 처녀설을 주장한다. 

마리아는 일평생, 동정녀로 지냈다는 견해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전처 소생들이었다고 주장한다. 또 그들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이, 예수님의 사촌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마리아를 높이려는, 잘못된 태도에서 나왔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마리아는 죄 없이 태어났다는 무죄 잉태설을 주장한다. 또 죄를 짓지 않고, 부활 승천했다는 (성모승천)설을 주장한다. 이러한 모든 주장은, 성경에는 전혀 근거가 없다. 

(눅11:27-28)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에 나오는 여자는, 마리아를 높이려고 했다. 

요즘 말로, 그는 전형적인 천주교 신자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를 높이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를 높이셨다. 이처럼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해서, 성경은 마리아를 높이지 않는다. 성경은 예수님의 동생들도 높이지를 않는다. 

본문과 같이,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여기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막으려고 했다.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들도, 본시 우리와 똑같은 죄인들이었다. 그들도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높여서는 안 된다. 오직 예수님만 높여야 한다. 

2. 예수님의 영적인 가족들(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그 때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서기관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밝히 드러내고 계셨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외치기를,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서 찾나이다."했다. 이는 참 당황하게 만드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상황의 주인이다. 그 어떤 상황도 다 주관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황하지도 않고, 난처한 표정을 짓지도 아니하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때의 상황을 이용하셔서, 사람들에게 중요한 영적 진리를 말씀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왜 예수님이 이와 같은 질문을 하셨는가? 예수님의 가족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가족조차도 몰라볼 정도로, 미쳤기 때문인가? 아니다. 

아니면 예수님이 기분이 나쁘셔서, 그의 가족을 무시해버리셨는가? 아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음을 알고 계셨다. 또한 그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여기면서, 예수님을 붙들러 온 것도 알고 계셨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그들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요19장)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그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셨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이렇듯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도,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돌아보실 만큼, 그를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그의 동생들도 사랑하셨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예루살렘 다락방에, 백 이십 명 정도의 성도들이 함께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 그러다가 그들 모두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행1:14)에 의하면, 그 곳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우들이 있었다. 또 그 자리에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 자리에는, 예수님의 누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의 동생들을 다 구원하실 만큼, 그들 모두를 사랑하셨다. 따라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고 물으신 예수님의 의도는, 가족들을 모른 체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그의 가족들을 경멸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해, 육적이고 혈연적인 관계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더 중요함을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그와 영적인 관계를 맺은 자들을, 참 가족으로 여기셨다. 그래서 (34)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변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주변에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셨다. 또한 그 곳에는 얼마 전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마12:49)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라고 했다. 

말하자면 이 때 상황을 보면, 예수님은 눈으로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또한 손으로 그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말씀하셨다. (막3:5) 예수님은 '노하심으로' 바리새인들을 둘러보셨다고 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잔잔한 미소로 제자들을 둘러보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이다.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막1:18).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아버지 세배대를, 배에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막1:20). (막2:14) 레위는 세관에 앉았다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랐다. 

(막10: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라고 약속하셨다. 

육적이고 혈연적인 가족을 잃는 대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영적인 가족들을, 새롭게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육적인 가족은, 제한적이며, 일시적이다. 이에 비해 영적인 가족의 수는, 무수하며, 영원하다. 그러기에 육적인 가족보다도, 영적인 가족이 더 중요하다. 

뒤에 예수님의 동생들도,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되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다. (약1:1)에서 자신을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 했다. 육적관계보다 영적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도, 예수님의 동생이다. (유1:1) 유다는 '예수님의 동생 유다'라고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다. 유다도 육적관계보다, 영적 관계가 더 중요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히2:11)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한 가족이 되게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며, 참 가족이다. 가족이라 하면, 어떤 개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나? 이해, 사랑, 따뜻함, 보살핌, 그리움이다. 우리들의 모습이 이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가족관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잘하는 일인가? 잘못하는 일인가? 잘하는 일이다. 성경은 자기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한다. 자기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 자존감이 낮은 사람,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은 인생에 성공할 수 없다. 따라서 자기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기만 사랑하면 죄다. 나를 사랑한 나머지 이웃들을 몰라라 한다든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이웃을 밟아 버린다든지,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면 죄다. 자기 사랑은 필요하지만, 자기만 사랑하면 죄가 된다. 

가족을 사랑해야 하는가?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가?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자기 가족만을 사랑하면 어떤가? 그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자기 가족만, 사랑하면 잘못이다. 내 가족의 유익을 위해 이웃은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다는 태도는, 죄악임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3.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길(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누구든지'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이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들어간다. 

또한 여기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동생들도 포함한다. 여기에는, 우리 모두도 다 해당이 된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해서, 온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종종 예수님께로부터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는 책망을 받았다. 예수님이 사로잡히실 때,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가족으로 삼아주셨다(히2:11).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허물이 너무나도 많다. 또 우리의 믿음도 한없이 부족하지만,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삼아주신다. 이는 예수님의 놀라우신 은혜이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바로 이 말씀 속에 한없이 부족한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지 밝히신다.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길이, 설명되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나? 물론 예수님은 여기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를 가리키지 않는다. (눅18:11)을 보면, 한 바리새인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한 내용이 나온다. 그는 토색이나 불의나, 간음을 행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며,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했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었다. 물론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는, 세리들이나 창녀들보다도 더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그의 가족으로 삼지 않으셨다. 

오히려 세리들이나 창녀들을 가족으로 삼으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마18: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이 되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리들과 창녀들은 달랐다. 물론 그들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는, 흠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믿어서, 예수님의 가족이 되었다. 그 결과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었다. 이단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하니까, 자신들이 원하는 행동대로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한다. 

결론이다. 저는 부족하고 허물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저를 택해서,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예수님의 가족으로 삼아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늘 저를 돌보신다. 예수님은 제가 천국에 가는 그 날까지, 늘 친히 저를 거느리신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다. 

이 은혜를 생각하면서, 위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내 구주 예수님을 더욱 사랑합시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저와 영원하게 한 가족이 된, 우리 믿음의 형제들을 힘써 사랑하자. 이러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