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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난 시의 기도 (욘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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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 시의 기도 (욘 2:1-10)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이 요나라는 이름 앞에 불명예스러운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닙니다. 도망간 선지자, 불순종한 선지자와 같이 좋지 않은 단어들이 붙습니다. 우리 이름 앞에는 언제나 좋은 단어만 붙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요나에게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바다에 던져지게 되었는데 은혜로운 하나님께서 요나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이 큰 물고기가 어떤 물고기인지는 모릅니다. 킹제임스버전(KJV) 성경에서는 이 물고기를 고래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고래라고 알고 계신 분도 있지만 실제 본문에서는 고래라고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르는 큰 물고기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물고기의 위장이 요나가 삼일 밤낮을 묵기에 충분한 크기였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물고기 위장에 들어간 요나는 그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장 속이 얼마나 냄새나고 어둡고 미끌미끌했겠습니까? 오죽하면 요나가 그곳을 가리켜서 “스올의 뱃속”이라고 표현했겠습니까? 스올은 히브리어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음부인데 죽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란 뜻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가는 곳에 무슨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 아무 소망도 없고 기쁨도 없고 생명도 없는 곳이 바로 스올입니다. 그만큼 그곳은 절망적이고 비참한 곳이었습니다. 요나 스스로 물고기 뱃속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밤낮을 지내면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업을 하겠습니까? 장사를 하겠습니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요나 2장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동사가 “기도하였더라”, “부르짖었더라”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욘 2:1-2). 

이렇게 요나가 기도하였더니 어떻게 됐습니까?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욘 2:7). 

요나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면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 상달될 때까지 기도해야 됩니다. 하늘에 상달도 안됐는데 중지하면 가다가 떨어지게 됩니다. 부산을 가는 사람이 대구에서 돌아오면 되겠습니까? 부산역에 도착했다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가야할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될 때까지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신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도의 내용이 감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욘 2:9).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입니다. “물고기야, 소화가 잘 되느냐?”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으시니까 물고기가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웬 맛없는 음식이 하나 들어와서 내 위장을 괴롭히고 있나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셨을 것입니다. “너는 그 위장에서 소화가 안 되게 하는 것을 토해내라!” 그래서 물고기가 니느웨와 가까운 곳에 요나를 토해낸 것입니다. 
 
요나 2장은 환난 가운데 기도해서 응답받고 구원받은 요나의 기도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기도에 관한 교훈을 배우고자 합니다. 

Ⅰ. 요나의 기도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 기도를 하려면 하나님께 접근 가능성(accessability)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대통령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대통령은 그만두고 동네 이장 만나기도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나 뵙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존재 자체를 부인하며 모독하는 불신자들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습니까? 불신자들이 할 수 있는 기도는 딱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내 죄를 용서해주시고 예수님을 믿겠사오니 믿음을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만 응답되는 것이지 다른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예수님을 믿고 성도가 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욘 2: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것은 요나 1장을 읽으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알고 있는 사실을 또 말하며 강조하고 있느냐? 그것은 물고기 뱃속과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성도들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몸을 찢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성전 안에 있는 지성소라는 곳에만 계셨습니다. 다른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도 아무나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 7월 15일에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죄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1년에 한 번, 한 사람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몸을 찢으시고 물과 피를 다 흘리시며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며 운명하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갈라지면서 이제는 누구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도움을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가 내 죗값을 갚았다고 믿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무슨 무함마드의 이름으로 나아갑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맹자, 공자의 이름으로 나아갑니까? 이외에도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죗값을 갚아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욘 2:4).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꼭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했습니다. 다니엘도 기도할 때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한 것은 성전에서 드려지는 짐승의 희생제사로 인하여 나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면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만유를 통치하시는 주권자(sovereignty)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도 하나님이 무능하다면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고 주권자이시며 능력자이셔야 됩니다. 그것이 기도의 전제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도 주관하십니다. 인간이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욘 2:3). 실제로는 선원들이 던졌지만 요나는 하나님께서 던지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선원들이 던지자고 해서 던졌지만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신 것입니다.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욘 2:3). 또 하나님께서 파도에게도 명령하셔서 요나가 타고 있던 배를 덮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연의 활동도 주관하십니다. 복음서에서도 갈릴리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나 제자들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막 4:38). 이렇게 제자들이 이야기하니까 예수님께서 일어나 풍랑을 향해서 잠잠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풍랑이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자연의 활동도 다 하나님께서 통제하시고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구원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일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욘 2:9). 물고기 뱃속에서의 구원이든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이든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구원이 가능하다면 요나가 왜 물고기 뱃속에서 스스로 나오지 못했을까요? 구원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으로 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10장에 예수님께서 어떤 부자에게 부자가 천국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어렵

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저는 지금 눈이 좋지 않아서 바늘귀에 실도 못 끼웁니다. 그런데 거기에 낙타가 어떻게 들어가겠습니까? 그러자 제자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냐고 물어봅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막 10:27).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동도 주관하시고 자연도 주관하시며 구원도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주권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욘 2:10).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명령하자 물고기가 요나를 니느웨와 가까운 육지에 토한 것입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도 사자에게 다니엘을 먹지 말라고 하자 밤새 배고파도 먹지 않고 기다린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들어줄 능력이 있으신 주권자라는 두 가지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Ⅱ. 요나의 기도에는 “세 가지 자원”이 있다 

첫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기도의 제일 중요한 자원입니다. 요나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외우고 있다가 그것을 기도에 사용했습니다.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욘 2:3). 이 말씀은 시편 42편 7절 후반부와 똑같습니다.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시 42:7). 

요나는 기도할 때 성경을 암송하고 있다가 그것을 활용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몇 구절이나 암송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성경을 많이 암송해놓으면 기도할 때 그것이 천국의 언어가 되어서 기도가 능력 있게 됩니다. 대표기도 할 때도 적어 나와서 읽지 마십시오. 어떤 분은 적은 것이 선풍기 바람에 날려서 기도하다 말고 종이 주우러 가시는데 그러지 마시고 외워서 기도하십시오. 기록된 말씀을 암송하여 기도에 활용해야 되겠습니다. 
 
둘째, 앞서간 “다른 성도들의 경험”도 기도의 중요한 자원이 됩니다. 요나는 기도하면서 다윗의 경험을 계속 활용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시 130:1). 다윗도 깊은 곳에서 부르짖어 응답받았으니 자신도 물고기 뱃속 깊은 곳에서 기도하니까 들어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다고 고백하는 것은 시편 18편 5-6절에 나오는 다윗의 경험과 똑같습니다.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시 18:5-6). 

그리고 요나가 주께서 자신의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다고 고백하는 경험도 시편 40편 2절에 나오는 다윗의 경험과 비슷합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시 40:2). 자신과 동일한 고난을 겪다가 구원받은 사람의 간증을 가지고 기도하면 능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암에 걸렸다 치료받은 사람의 간증이있다면 “하나님, 저 사람도 예수 믿고 나도 예수 믿고 저 사람도 암에 걸리고 나도 암에 걸렸는데 저 사람은 하나님께서 고쳐주셨으니 나도 고쳐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불공평하게 대하실 수 없으니까 고쳐주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28세에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서 기도하는데 어떤 사람이 중국말과 비슷한 말로 막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뭐냐고 물어봤더니 방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배우냐고 물었더니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라고 하면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는 말만 남기고 갔습니다. 

그래서 저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도 예수 믿고 저 사람도 예수 믿는데 어째서 저 사람만 저런 은사를 주시고 나는 안주십니까? 나도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했더니 그 다음날 온종일 턱이 막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집에 들어가서 기도하니까 턱을 움직이던 힘이 혀를 장악하면서 방언이 나오는 것입니다. 한 시간 이상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기쁨이 샘솟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인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를 붙들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향하신 언약적인 사랑은 기도의 든든한 자원입니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욘 2:8). 

우상숭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은혜라고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 언약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무궁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말 성경에 인애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이 “헤세드”를 못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헤세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할 때도 사랑하고 못할 때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충성하고 기도 많이 할 때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지만 죄를 짓고 절망과 나락에 빠져 있을 때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는 것입니다. 

“헤세드”는 그런 사랑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헤세드”의 사랑을 붙들고 기도한 것입니다. 지금 죄로 말미암아 고민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 같은 것을 사랑하실까? 1년 전에는 사랑하신 것 같은데 지금은 아닐 거야.’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하며 영원무궁합니다. 단지 우리가 순종하면 축복으로 사랑을 경험하고 불순종하면 고난으로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경험하는 방법이 조금 다른 것이지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영원합니다. 요나는 하나님 말씀과 다른 성도의 경험과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이 세 가지를 자원으로 삼아서 기도한 것입니다. 


Ⅲ. 요나의 기도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을 바꿔서 순종하고자 하는 목적입니다. 요나 2장을 읽어보면 재미있는 것은 요나가 하나님께 물고기 뱃속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 물고기 뱃속에 있으면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당연히 냄새나고 미끄럽고 어두운 물고기 뱃속에서 빨리 건져달라고 기도했을 것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그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대신 요나 2장 9절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욘 2:9). 선지자는 하나님께 순종을 서원합니다. 그러므로 서원을 갚겠다는 것은 이제부터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을 바꿔서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목적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원망과 불평이 많이 합니다. 가정에서도 항상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불만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불평하는 그 사람도 문제가 많습니다. 자연적인 상태에서 불평과 원망은 정상적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 모든 것이 감사로 바뀌게 됩니다. 고난도 변장된 축복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면 어둠의 세력이 물러갑니다. 감사는 빛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고난 중에 있는 분은 불평, 원망, 걱정, 근심을 다 버리시고 감사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결론 

인생에 환난과 고난이 찾아오면 성도들은 어디로 가야됩니까? 유대인들이 성전을 향해서 기도했듯이 우리 성도들은 “헤세드”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을 향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환난이 올 때에 거짓되고 헛된 우상을 향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실망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무당이 와서 굿했더니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무당과 귀신은 한편입니다. 무당이 굿하면 귀신이 잠깐 나갔다가 더러운 귀신 일곱을 더 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의 대상은 살아계신 하나님, 주권자 하나님, 영원토록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서 건져주셨으니 나를 이 구렁텅이에서 건져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다른 곳으로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때리셔도 하나님 품으로 옵니다. 제가 어떤 아이를 때렸는데 그 아이가 나에게 맞고 옆집으로 가면 그 아이는 옆집 아이입니다. 옆집에 가서 자기 아버지한테 이를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때려도 나에게 오는 아이는 우리 집 아이입니다. 아버지가 날 사랑해서 때렸다는 것을 알고 다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얻어맞고 징계를 받아도 세상으로 가면 안 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로 가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능히 들어주실 수 있는 주권자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도록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려운 상황에서 항상 구원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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