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지치지 말아야 할 이유 (사 40:27-31)

첨부 1


지치지 말아야 할 이유 (사 40:27-31)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는 성도는 결코 지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 백성이 어떤 환경에서도 피곤하지 않고 독수리처럼 창공을 향하여 비상(飛翔)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수난과 징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창조주 여호와를 향한 절대 신앙을 권면하고 위로를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는 장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고난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태도를 지닐 수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앙망(仰望)하라고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27절=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우상을 따라가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징계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제국으로부터 세 차례나 침략을 당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나라는 완전히 패망하였고, 예루살렘 성전도 빼앗겼습니다. 백성들은 먼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당하는 극심한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렸거나 자신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2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격려하십니다.

28-29절=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이 말씀은 자기 백성을 능히 고난으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창조자로서의 여호와의 절대 권능과 은혜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30, 31절의 말씀입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본절은 징계로 인해 고난 중에 있는 선민들에게 하나님을 원망하며 낙심하는 대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도록 하기 위하여,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와 같은 새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이 피곤해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지치면 안 됩니다. 왜 지치면 안 됩니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1.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므로

28절=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지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인생을 길게 보아야 합니다. 조급하면 지치게 됩니다. 시간적으로 오늘만 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내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장소적으로 여기만 보면 안 됩니다. 또 다른 곳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일을 그르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어려운 형편이 지속되자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으로서 우리의 천년이 하나님께는 하루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연단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피곤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면 쉽게 흔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양을 항해하는 배가 있었습니다. 배가 섬 하나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의 한 가운데까지 왔을 때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자 배에 탄 사람들에게 조금씩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두려움은 점점 커져서 풍랑 뿐만 아니라 암초에 부딪히면 어쩌나, 해적 떼를 만나면 어쩌나,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어쩌나… 보이는 것마다 두려움이 되어 다가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근심에 쌓인 어른들 사이를 거침없이 뛰어 다니는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애의 얼굴에는 무서워하는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무섭지 않니?” “네!”

“저렇게 시퍼런 바닷물이 뱃전을 마구 때리는데도?” “그럼요!” “넌 참 담력이 있고 용감한 아이구나.”

“무섭긴요? 뭐가 무서워요. 이 배의 선장님은 이 세상에서 최고로 용감하고 무슨 어려운 일도 척척 해내는 분이신 걸요. 이 배의 선장님이 바로 우리 아빠란 말이예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아버지인 선장을 믿는 아이는 풍랑도 해적도 암초도 그 어느 것도 무섭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선장을 알지 못하거나 혹 안다고 해도 깊이 신뢰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그들 앞에 있었습니다. 그들을 해칠 의사가 전혀 없이 바다 밑에 가만히 누워 있는 바위까지도 그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없는 것까지 상상해 내어 두려워했습니다.

너나 할것 없이 우리 인생은 풍랑이 자주 이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 탄 승객과 같습니다. 이런저런 역할로 살면서도 정작 자신이 자신의 삶의 선장은 아닙니다. 바다로 비유될 수 있는 세상은 너무 자주 그리고 크게 놀이 일고 있습니다. 바다에 파도가 없으면 바다이겠습니까?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노련한 선장이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혹 안다고 해도 그의 능력을 믿고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거친 풍랑이 두렵습니까? 앞을 보아도, 옆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실망거리와 힘든 일들뿐입니까? 조물주의 품이 얼마나 따뜻한가를 아는 사람은 그 품에 안긴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주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끝이 없으십니다. 그의 능력을 믿는 이는 항상 행복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선장은 누구입니까? 

세살 난 아들을 데리고 아빠가 동물원 구경을 갔습니다. 사자 우리 앞에 가서 섰습니다. 그런데 사자가 어린아이 앞으로 다가오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으르렁거렸습니다. 

아이가 “아빠!”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웁니다. “왜 그러니?” 아빠가 물었습니다. “아빠, 저 사자 좀 봐요.” 그때 아빠가 말했습니다. 

“너는 사자만 보지만 아빠는 사자와 너 사이에 있는 창살도 보고 있단다.”

그렇습니다. 고난에 처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선지자와의 대화도 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억압하는 앗수르와 바벨론을 좀 봐 주세요.” 

그러나 선지자는 외칩니다. “당신들은 앗수르와 바벨론만 보고 있지만 나는 그 나라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도 보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찾아오고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는 그 문제만 보기 쉽습니다. 그래서 부르짖습니다. “주님, 저 골치 아픈 문제 좀 보세요.”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문제만 보지 말고 나를 보아라. 나는 영원하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지치지 말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창조하신 분이시므로

28절=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가 지치지 말아야 하는 또다른 이유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창조자(the Creator of the ends of the earth) 이십니다. 

여기서 ‘땅 끝’ 이란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현재 당하는 시련과 그로 인한 위축된 상태와 선명한 대조를 형성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끝에 있는 것조차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극단의 위기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얼마든지 구원하실 수 있고 새롭게 조성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결코 지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창조의 사역을 계속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지금도 새로운 영혼의 창조 사역을 계속하시며,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을 성자 예수님의 보혈로 다시 살리시는 중생의 사역을 계속하십니다. 

하나님은 늘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무엇이든지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졌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4:17-22=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없으면 있게 하시고 안 되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는 결코 지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 여호와께서 천지의 창조주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분이 유일무이 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믿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나라가 이방 나라에게 멸망당하고 자신들은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와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오랫동안 부르짖었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요 능력의 주님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그러한 의심이 그들로 하여금 낙심케 하며 불신과 절망의 말을 내뱉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27절). 

성도 여러분! 성도가 고난 중에 낙심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에 대한 불신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는 분이 아니시며, 또 창조주로서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아무리 낙심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는데,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땅 끝까지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이 있는데, 어떻게 지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과 확신이 있는 사람은 고난이 올 때 잠시 당황할 수는 있어도 결코 낙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 때문에 낙심 가운데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주님을 향한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해보십시오. 흐트러진 신앙, 연약한 믿음, 굳세지 못한 모든 것을 가다듬고 다시 주님 앞에 서서 믿음을 바르고 굳게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어떤 고난이 닥쳐도, 아무리 커다란 슬픔이 밀려와도 낙심을 극복하고 새로운 힘과 용기로 담대하고 소망에 찬 삶을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믿는 우리는 결코 지칠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은 지치지 않는 분이시므로

28절=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 

본문은 중언법(重言法)을 사용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무한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여기 ‘곤비하다’ 는 동사는 힘에 부치도록 심한 노동을 한 결과 기진맥진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홀로 온 우주를 창조하셨지만 결코 기진맥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세계를 능력의 말씀으로 붙들고 완전한 섭리로 운행하고 계시지만, 결코 피곤을 느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 인간과 달리 피곤함을 느끼지 않으시며 그 능력에 있어서 무한한 분이시기 때문에 힘이 부치거나 뭐가 부족해서 아쉬워하실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4).

지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옆에 모시고 있는 우리는 결코 지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주십니다.

28-29절=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철, 곧 지혜를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때 그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에게는 능력과 힘을 주십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셨으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앙망한다’ 는 원문의 뜻은 새끼 새가 어미 새를 향하여 입을 좍좍 벌리면서 먹이를 기는 모습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힘을 받으면 지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독수리 날개치며 올라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30-31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앞절에서는 창조자 여호와의 절대 능력과 은혜를 강조한 것이라면 본절은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가 얻게 될 힘을 강조합니다.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는 자는 그가 아무리 체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순식간에 쇠하고 지치고 소멸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소년’ 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 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소년처럼 신흥 강국으로 등장하고 있는 바벨론도 기진맥진해지고, 장정처럼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앗수르도 멸망하게 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은 승승장구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에 보면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고 변화된 양상이 세 가지 동작의 형태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먼저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강한 힘으로 날개짓하여 높은 창공에 오르며 공중의 기류를 이용해 날개만 펴고 유유히 움직이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두 번째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달려가야 할 길은 아주 먼 길, 평생을 달려야 하는 길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 신앙의 경주를 하려 하면 우리는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갈 5:7). 하지만 하나님을 앙망하면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시므로 신앙의 경주를 무사히 마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일상적인 삶도 사실 매우 피곤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인 삶에 지쳐 낙심하고 좌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과 능력으로 일상의 답답한 고통의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능력 있는 삶’ 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어떤 문제와 역경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사명을 다하는 삶’ 입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며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 역시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습니다. 온갖 역경과 슬픔과 고난이 우리를 낙심케 만듭니다.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들과 우리를 죄악의 자리로 유도하는 올무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을 앙망하는 삶을 산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이 모든 삶의 문제들과 장애물들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공적이고 축복된 삶, 사명을 다하는 삶,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면류관을 받아 누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한 증기선이 뉴펀들랜드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수요일이었는데 바다에는 안개가 많이 끼어 배는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선객이 선장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선장님, 저는 토요일 오후까지 퀘벡에 도착해야 합니다. 그 때까지 그 곳에 배가 도착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저는 평생 동안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습니다. 정말 불가능한가요?” “저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지금으로서는 도리가 없군요.” “그러면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선장은 이 같은 상황에서 난데없이 기도를 하자는 이 사람이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보세요. 지금 안개가 얼마나 짙은 지 안 보이십니까?”

그러나 선객은 “내 눈은 안개가 얼마나 짙은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생을 움직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 있소” 라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다면 이 안개를 5분 내에 걷어주십시오. 하나님이 저를 위해 만들어 놓으신 퀘백에서의 약속을 아시지 않습니까? 바로 돌아오는 토요일입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가 기도를 마치자마자 안개가 걷히는 것이 아닙니까? 기도의 주인공은 바로 조지 뮬러였습니다. 그는 교회의 집회를 위해 퀘백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십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지치지 말아야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 결코 지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 아닙니까!
시 29: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은 모든 경우에 하나님을 앙망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크게 주님 주시는 능력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빌 4:11-13=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본문 30절 이하를 다시 봅시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우리 모두 여호와를 앙망하는 신앙으로 창공을 향하여 비상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