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찌하여 자고 있느냐? (눅 22:39-46)

첨부 1


어찌하여 자고 있느냐? (눅 22:39-46)


시127:2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이 구절을 보면 잠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인생에서 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계산적으로도 인생의 4분지 1내지 3분지 1이 잠입니다. 또한 잠과 건강과 상관관계가 분명합니다. 장수하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잠을 잘 자는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잠을 잘 잔다는 것은 심신이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육신이 건강하지 못하면 잠을 잘 자지 못합니다. 

정신적으로 걱정과 스트레스가 많아도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잠을 못 자는 불면증은 아주 큰 병입니다. 미국에서는 수면제가 연간 7백억 정이나 판매된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거의 2천만 정이 소비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면증에 시달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정말 잠을 잘 자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잠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구절들도 나옵니다. 잠은 기본적으로 축복이지만, 적절하게 절제해야 진정한 복이지, 지나치면 오히려 해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잠6:9-11절에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그리고 또 하나는 영적인 잠입니다. 영혼은 어떤 경우에도 잠을 자면 곤란합니다. 영혼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혼의 잠은 위험한 것이요 저주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가 바로 그겁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혹시라도 나 자신이 영적인 잠을 자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그런 모습이 있다면 즉시 영적으로 깨어나야 합니다. 모든 불행과 저주가 영적인 잠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영적으로 깨어 있을 때 승리와 축복을 경험합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깨어나 우리의 영혼이 새로워질 뿐 아니라, 그로 인하여 우리 모두가 승리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목전에 두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그 문제를 대면하셨나요? 예수님은 그 누구에게도 불평이나 원망이나 자학하지 않았습니다. 가면을 쓴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속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문제로부터 도피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문제를 알고 있었던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도 어렴풋이 다가올 시련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에게 중요한 어떤 사건이 일어나리라고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바로 자기 자신들의 고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근심하고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45절에 보면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제자들은 슬픔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미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슬픔과 불안의 순간에 저들은 오히려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주님이 무엇이라 이야기를 합니까? 46절에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여기 ‘어찌하여 자느냐’ 

정말 호되게 닦아 세웁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는 성도가 깨어 있지 못하면 환란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불신자들로부터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란과 수치를 통해 잠자는 성도를 깨웁니다. 그러다 보면 믿는 자들 때문에 애매하게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경우가 생깁니다. 

아브라함의 예를 살펴보죠. 그가 그랄 땅에 갔을 때 사람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거짓말을 합니다. 사라가 얼마나 대단한 미인인지 모르지만 잘못하면 자기 목숨이 위험할까봐 누이라고 속입니다. 맘을 놓은 그랄 왕 아비메렉이 사라를 데려갑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호되게 책망을 합니다. 만일 사라가 이방 왕에게 몸을 더럽히면 하나님의 언약의 씨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급하게 비상섭리로 기적을 베푸신 겁니다. 

꿈에 나타나서 아비멜렉을 야단치고 사라를 돌려보내게 합니다. 아브라함의 잘못으로 엉뚱하게 아비멜렉이 큰일 날 뻔한 겁니다. 아브라함이 영적으로 깨어 있었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영적으로 담대하여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고, 거짓말을 하는 대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승리했을 겁니다. 

여러분, 믿는 성도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고 잠자면 이런 일이 생기기 쉽습니다. 자기도 실수해서 어려움을 당하고, 애매하게 주변 사람들까지 못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돌려보내며 점잖게 책망하는 아비멜렉의 모습을 보십시오. 창20:9~10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대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하나님이 두려워 완곡하게 말해서 그렇지 얼마나 창피합니까? 완전히 훈계하는 게 아닙니까? 하나님의 족장이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이방의 왕인 불신자에게 훈계와 책망을 받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예수님의 말 그대로입니다. 마5:13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도 가끔 혼자 기도하셨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홀로 기도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남모르는 아픔을 가슴에 안고 눈물지으며 기도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골방에 문을 걸어 잠그고 땅을 치며 홀로 울어야 될 때가 있습니다. 티내지 않고 금식하며 전능하신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속에 동일한 과제가 있을땐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함께 모여 기도할 땐 특별한 능력과 은혜가 있습니다. 이럴 땐 자리에 앉아있기만 해도 행복합니다. 비전이 흐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해야 될 때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가정의 어린 자녀들을 함께 불러 모아 놓고 아버지의 말씀을 펼쳐놓고 가장된 사람이 기도해야 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주신 그 비전이, 비전 채플을 통한 약속이 너무 크고 놀랍기에 기도해야 할 때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이 백성 이제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전능하신 아버지의 자비를 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한국교회가 일제히 일어나 한국교회를 살려달라 외치며 임박한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성령받은 사람들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하늘문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가장 연약한 사람들이 손에 손을 붙들고 기도하게 될 때에 하늘의 신비한 권능을 체험하고 맛보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사역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역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역입니다. 교회학교 교사에게 가장 위대한 사역은 가르치는 순간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어린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게 될 때에 이미 위대한 역사는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목장의 목자가 맡겨주신 귀한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기 시작할 때에 그곳에 가장 위대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기도는 사역의 준비가 아니라 사역의 시작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기도로 내 이웃을 섬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내가 해야 할 가장 위대한 사역은 기도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가장 무서운 적은 기도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기도하지 않고 성공하면 성공 때문에 망합니다. 실패 가운데서도 기도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가장 비참한 실패에 내가 빠져있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 눈에 내가 실패자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도할 수 있다고 하면 실패 같으나 분명 성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세요. 생명을 건, 기도요 또한 중보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살리는 기도요. 희망의 기도입니다. 독일 뉘른베르크 출신의 르네상스시대 화가인 알브레히드 뒤러(Albrecht Drer 1471∼1528) 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습니다. 독일의 화폐에도 얼굴이 등장할 정도로 훌륭한 분입니다. 그는 <기도하는 손> 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기도하는 손>의 작품 뒤에는 이런 아름다운 사연이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미술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학비를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처지의 친구와 만나 의논을 했습니다. 뒤러의 친구가 이렇게 제의를 합니다. “네가 먼저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라. 나는 네가 졸업할 때까지 식당에서 일을 하며 너의 뒷바라지를 하겠다. 네가 졸업한 후에 네가 다시 나의 뒷바라지를 하면 되지 않겠니?” 친구는 뒤러를 위해 열심히 식당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꼬박꼬박 학비를 보냈습니다. 뒤러가 졸업할 무렵에는 그의 그림도 하나씩 팔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뒤러가 오랜만에 친구를 찾아 식당에 갔을 때 친구는 마침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여! 저의 손은 노동으로 굳어져 이미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할 몫의 능력을 뒤러에게 주시고, 주의 영광을 위해 제 친구가 진실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도와주소서!” 자기를 위해 희생한 친구가 기도하는 손을 본 순간 뒤러는 자기가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뒤러는 곧 바로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뒤러의 <기도하는 손>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63빌딩도 기도하는 손의 모습을 따서 지어졌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기를 가슴에 안고 젖먹이는 엄마의 손도 아름답습니다.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며 수고하는 손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손은 기도하는 손입니다. 

기도하는 손은 하늘의 문을 여는 손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손은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축복의 손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손은 하늘의 능력을 붙잡는 손이기 때문입니다./기도하는 손은 사탄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핵무기와 같은 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기도하는 손을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아무리 고사리 같은 손일지라도, 때로는 투박한 농부의 손일지라도 기도하는 손, 기도하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누구나 밀레의 <만종>이라는 작품을 보면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기 전 부부가 들녘에서 기도하는 모습은 너무나 평화롭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예수님은 정말 기도하지 않으셔도 되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기도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은 평생 기도의 줄을 놓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감당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광야에서 굶주림과 마귀의 지독스러운 장난 앞에서도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고요한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도 7마디는 바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지금도 하늘 보좌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야 더할 나위가 있습니까? 지금은 정말 기도의 줄을 붙잡고 더욱 더 주 앞에 가까이 나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내일부터 '터치 153 새 생명 축제'에 올 태신자와 우리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잠자는 자여! 어찜이뇨!”라는 주제로 새벽 특별 기도회를 두 주간 열게 됩니다. 한 생명을 주님께 인도한다는 것, 뭐 쉬운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전도를 해야 합니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지옥이 예약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을 맞바꾸어,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 은혜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이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생명의 빚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냥 예수 믿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누군가의 전도 때문이 아닙니까?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희생을 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로 영접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간을 바치고 심지어 돈을 써가면서 나를 위해 수고한 사람이 있었기에 내가 오늘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저의 경우를 봐도 그렇습니다. 한 산동네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시고 신학을 마치신 젊은 목회자가 달랑 가방 하나들고 산동네에 온 것입니다. 다 쓸어져 가는 허름한 집 하나를 개조해서 예배당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사모는 굶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동네는 그를 환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도 같은 그 동네에 살고 있는 희망을 잃은 수많은 실패자들, 내일을 체념한 채 사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내 놓았습니다. 그 눈물겨운 희생은 생명을 낳게 하는 참 기쁨의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뭐, 여기 모인 여러분들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올 때 반드시 누군가의 배려가 없이 어떻게 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 은혜를 알았다면 어떻게 그냥 무덤덤하게 있을 수가 있습니까? 전해야 하지 않습니까? 거기엔 정말 부담이 있고 희생이 따릅니다. 희생하기를 꺼리는 사람은 능력 있는 전도를 못합니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전도의 현장에 가보십시오. 그곳에는 반드시 생명을 거는 희생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진지하게 자문자답을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값진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고 있는가?’ 우리 한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주님은 절대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빨리 가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잃은 양들을 찾아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학려 들지 않으면서 이웃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내 가족이 구원받기를 원합니까? 이 부패한 한국 사회가 치료받기를 원합니까? 희생 없이 말입니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위해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하는 것은 보통 큰 희생이 아닙니다. 

제가 몇 사람을 놓고 시간을 내어 기도를 해보니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쁜 일과를 끝내고 피곤에 지쳐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시간인데, 몇 사람을 생각하면서 계속 엎드려 기도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만한 대가도 치르지 않고 어떻게 죽은 영혼이 살아나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인격적으로 멸시를 받릉 수도 있습니다. 돈을 써야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돈을 쓸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바쁜 세상에 중요한 약속이나 스케줄을 뒤로 미루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만나 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의 형편을 이해해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조그마한 수고 하나 하나가 희생의 제물이 되어 활활 타오르며 향기를 토할 때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당신이 지실 그 십자가를 감당키 위해 한밤을 보내며 눈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 기도는 부활의 능력으로 세상 앞에 당당히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저와 여러분이 귀담아 들어야할 말씀이 아닌가요? 이제 우리도 한 영혼을 주 앞에 인도하기 위하여 좀 더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기 위해 우리 믿음의 형제들이 새벽을 열어야합니다. 

중국 선교의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허드슨 테일러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헌신과 행복의 비결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연주자는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에 악기를 조율합니다. 음악회가 끝난 뒤 조율한다면 어리석은 일이겠지요?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의 뜻에 나의 생각을 맞추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보람되고 행복해집니다." 

여러분, 기도는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 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장벽이 있다고 할지라도 기도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 장벽이 무너집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한 곳에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사도들이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은 한 곳에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에게 말씀하시기보다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새벽에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한 곳에 모여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새벽은 응답의 현장입니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여리고가 새벽에 무너졌습니다. 홍해 역시 새벽에 갈라졌습니다. 절망과 한숨과 탄식으로 버무려졌던 인생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가을에 기도합시다! 지난 여름 영적으로 나태해졌다면 다시 영적인 허리띠를 졸라매고 깨어 기도합시다! 이제 내일부터 "잠자는 자여! 어찜이뇨!!"이라는 주제로 10일동안 영적 진군을 하려고 합니다. 이제 모두 주 앞에 나와 엎드리십시다. 우리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새벽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맛보는 축복의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