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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집 예수 (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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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집 예수 (요 5:1-9)
   
지난주간에는 참으로 바쁜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바쁜 중에 오헌숙권사님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오권사님이 뇌출혈로 쓰러지고 뇌사판정을 받은 상태에서 가족들이 장기를 기증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권사님은 7분에게 장기를 이식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권사님은 54세의 짧은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가 내어준 장기로 7명 많은 사람들이 새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숭고한 생애를 마감하셨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세상에 홀로 던져져 있습니다. 부모님이 계시고, 형제가 있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어도 사실 자기의 인생은 자기 홀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교회가 있고, 믿음의 형제들이 있어도 사실 나의 실존적인 존재는 나 홀로 있습니다. 남편이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남편의 믿음으로 아내가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아내의 믿음으로 덩달아 남편도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믿음은 나의 믿음이고, 당신의 믿음은 당신의 믿음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믿어야 하고, 내가 확신해야 하고, 내가 소유해야만 합니다. 하나님도 내가 믿어야 나의 하나님이 되고, 예수님도 내가 믿어야 나의 주님이 되십니다. 우리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시고, 구원이 되어주십니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뿐이 없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 공관복음에는 예수님이 병자를 치료하신 수많은 이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7가지만 선별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갈릴리 사역이 아닌 예루살렘 중심의 기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이적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데, 마침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에 가시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성벽을 따라가며 ‘모퉁이 문’, ‘에브라임 문’, ‘골짜기 문’, ‘분문’, ‘샘문’, ‘마문’, ‘어문’, ‘양문’ 등이 있었습니다. 동북 편에 있는 한 문이 있었는데, 그 문의 이름을 “양의 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문을 통하여 기드론 골짜기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에는 이 문을 스데반문이라고 부릅니다. 그때는 그 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양의 시장이 있었기 때문에 양의 문, 양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양문 곁에는 ‘베데스다’라는 이름의 못, 연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그리스제국에서 독립한 하스모니안 왕조 때에 만들어졌는데, 빗물을 저장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저수지였습니다. 이 저수지가 양문 곁에 있었기 때문에 제물로 바쳐지는 양들을 씻길 때에 그 물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이 연못은 빗물을 받아 저장하는 저수지였지만, 간혹 밑에서부터 물이 솟아오르는 때가 있었습니다. 

이 베데스다라는 연못의 이름이 의미가 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 연못은 수영이나 목욕도 할 수 있는 아주 넓은 연못이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이 흙으로 메워져 있고, 웅덩이 일부만 남아 있고, 이 베데스다 연못 옆에 기념교회로 성 안나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 출입문에는 오늘의 본문을 각국어로 기록해놓고 있습니다. 

이 연못가에는 행랑 5채를 지어놓고 이 연못에 들어가 질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수많은 환자들이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오늘과 같이 좋은 병원들이 있어, 온갖 질병을 치유하는 시대가 아니라, 예전에는 약이 없었고, 고치는 의사도 없었습니다. 의학이 발달된 시대에 사시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연 치유만을 기다리는 중에 이 연못이 움직일 때에 들어가면 어떤 질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이 연못가의 행랑에는 각종 질병의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연못 아래에는 지하수가 흐르고 있는데, 간헐적으로 지하수가 부글부글 거품을 내면서 올라오는데, 이때에 물이 움직이게 됩니다. 이 연못은 간헐천이라고 구분할 수 있습니다. 뜨거운 지하수와 수증기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가스가 함께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기적으로 분출하는 온천을 말합니다. 못이 움직인다고 하면 누구든지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떠한 질병에 걸렸던지 나았다고 합니다. 

이 연못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행랑 5채를 지어놓았습니다. 그 행랑 안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다 불치의 병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질병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각색 병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대표적인 환자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세 종류의 환자들은 유대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눈먼 사람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진리를 보지 못하고, 주님을 앞에 두고도 하나님의 아들인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리 저는 사람들은 바로 걷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살지 못하고 자꾸만 곁길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혈기 마른 자 중풍병자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무기력해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병자를 통하여 유대인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상태를 미루어 짐작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는 다리를 저는 절뚝발이였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무능한 혈기 마른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물이 움직이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기로는 가끔 어쩌다가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오셔서 이 연못가에 있는 행랑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절기에 성전 마당에 모이는 수많은 군중 앞에 서시지 않고, 가장 외로운 사람,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찾아가시고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38년이나 행랑을 지켜온 불치의 병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병자가 아주 오래되었고,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을 알아보셨습니다. 오늘 나오는 38년 된 병자는 맹인인지, 다리 저는 사람인지, 혈기 마른 사람인지 말하지 않지만 38년이 된 오래된 환자요, 절망적인 환자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이 움직이면 누구보다 빨리 뛰어가야 하는데, 이 사람이 이렇게 오랫동안 들어가지 못한 것을 보면 반신불수의 환자였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38년 된 병자에게 다가가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여보시오, 당신 낫고 싶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질병에서 낫고 싶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까? 이 38년 병자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하게 물으셨습니다. 마음으로 원하고 있다 할지라도 입술로 고백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속으로 사모하여도 입으로 말해야 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환자는 자기의 깊은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되돌아보고, 표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환자가 말하였습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라고 하였습니다. 

1. 우리에게도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주님은 같은 질문을 던지시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은혜받고 싶으냐?”, “성공하고 싶으냐?”, “문제 해결되기를 원하느냐?”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문제에 벗어나고 질병에서 놓임 받기를 원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영적 갈망이 솟아나야 합니다. 

전에 읽은 책 중에 “당신의 말 속에 성공이 들어있다”는 책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환경인데도 아주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기 스스로 자승자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나는 안 돼”, “나는 못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안 됩니다. 못하게 됩니다. 

그 책에서 가장 감명 깊은 부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저주를 다 감당하셨습니다. 그 율법의 저주에는 가난과 질병, 그리고 영적인 죽음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주장이었습니다. 아주 큰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로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귀에 들리는 대로 이루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민수기14:28입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잠13:12을 보았습니다.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고 했습니다. “소원이 이루는 것은 생명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새번역을 읽어보았습니다.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병들지만, 소원이 이루어지면 생명나무를 얻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말이 무엇인지 여러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들이 이루어질 때에 그것이 생명나무라고 할 수 있지만, 갈망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을 때에 그것 자체가 생명나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심령 안에 생명나무를 심고 자라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갈망하는 마음, 희망입니다. 그 희망의 나무, 생명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갈망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 갈망하는 마음 자체가 생명나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소원이 없으면 열매고 무엇이고 없습니다. 축복도 없습니다. 갈망하는 사람, 갈급하게 사모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빌2:13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소원이 있습니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실 때에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간절히 기대와 소망으로 가득찬 사람이었습니다. 

시편107:9에서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사모하지도 않는데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사모하는 영혼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고 있습니다. 


2. 우리 주님은 긍휼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 38년 병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다니시면서 화려하게 당신의 이름이나 드러내려고 하여 치유와 이적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살펴보면 언제나 사랑하시는 마음,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동정하시고,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에서 치유 이적을 행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절기의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즐기는 성전을 뒤로하고 소외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하버드대의 한 학생이 아프리카에 있던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환영은 없고, 슈바이처 박사님을 만날 수도, 만나주지도 않았습니다. 몹시 실망하여 귀국을 준비하고 있을 때에 큰 비가 와서 마을이 온통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센병을 앓는 한 아이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 뛰어 들어가 구해주었습니다. 그제야 박사님이 그를 불러 만나주셨습니다. “내가 며칠간 자네를 지켜보니 전혀 나를 만날 준비도, 만날 가치도 없었네. 그런데 아이를 구해주는 것을 보고 자네에게 긍휼의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네.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의사나 약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일세.”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치유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긍휼의 마음이다. 

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사랑의 마음이야말로 황폐하고 강퍅한 이 땅에서 품어야 할 마음이다. 지금 이 순간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긍휼의 손을 내밀어줄 사람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사랑은 모든 헝클어진 문제를 치료하는 유일한 약입니다. 사랑의 말은 상처를 치유합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기회와 시위를 떠난 화살과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그중 가장 무서운 것이 말입니다. 격려와 기쁨의 말은 사람에게 용기와 행복을 주지만 저주와 비난의 말은 한 사람의 신용과 명예를 일시에 무너뜨립니다. 개구리가 뱀에게 발각돼 잡아먹히는 것은 시끄러운 울음소리 때문입니다. 꿩의 울음소리는 사냥꾼의 표적이 됩니다. 사랑의 말은 상처를 치유합니다. 사랑한다는 말, 용서한다는 한 마디로 굳어버린 심령을 치료합니다. 

이 분 38년 된 병자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가족들이 있었지만, 그를 버렸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38년씩이나 옆에서 기다려주고, 간호해주고 도와줄 것입니까? 처음 몇 년은 곁에서 지켜주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처참한 한계 상황 속에 겨우 연명하고 있는 이곳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연못가에 모여 있는 이들은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나만 살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만 꽉 차 있습니다. 사실 병든 육신도 문제이지만 병든 마음들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병든 육신은 병원에 가서 고치지만 병든 마음들은 어디에 가서 고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우리를 불쌍히 보셨습니다. 


3. 우리 주님이 다 해결하셨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물이 움직일 때에 내가 도와주겠다, 내가 부축해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셨습니다. 38년 동안이나 누워 있던 환자에게 지금 당장 일어나 걸어가라 하시는 것은 잘못하면 조롱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납니다. “그 사람이 곧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놀라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찾아보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희망을 가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은혜를 귀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역사하시기를 좋아 하십니다. 주님의 능력을 힘입는 중요한 비결은 그 은혜에 대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은혜의 집입니다. 베데스다가 은혜의 집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그 분이 은혜의 집이십니다. 우리의 온갖 헝클어진 문제를 가지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큰 죄에 빠져 죄의 종으로 살고, 죄악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때에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우리의 무거운 걱정과 근심을 가지고 우리는 어디에 가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주님께로 나오십시오. 주님께로 가져가십시오. 우리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리하면 주님이 편히 쉬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해답이 되십니다. 

희랍어의 사람이라는 말은 ‘안드로포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의 뜻인데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고 합니다. 우리 사람이 인간됨은 희망을 가짐에 있습니다. 진정한 희망은 예수님을 바라봄에 있습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우리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희망이시고,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주님에게 나와야 합니다. 주님께로 가십시오. 

앞으로 나아가려니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뒤에서는 나를 추격하고 죽이려는 자들이 뒤따라오고 있습니다. 옆으로 보아도 피할 자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를 바라보십시오. 나에게는 아무도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 몸에 질병이 떠나지 않고, 우리 사업에 실패만 따르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떠나도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다.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예수님에게 마음 문을 열어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여러분의 사업을 맡기십시오. 여러분의 건강도 내어드리십시오. 

여러분의 가정도 예수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살고 죽는 모든 것을 주님에게 맡기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오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방황하지 말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아버지 집에는 먹을 양식이 풍성한데 집을 나간 아들은 밖에서 굶주리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들어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때에 머뭇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뜻을 다 내어놓고 주님께로 나오시기만 하십시오. 너의 염려를 다 맡겨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 우리 앞에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무서운 난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소원을 내어놓고 아뢰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고 생각지 않은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어려운 상황,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 속에 찾아오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소원을 아뢰어야 합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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